“내가 6.25 휴전 전보 친 장본인” 무대 인생 70년 송해
“내가 6.25 휴전 전보 친 장본인” 무대 인생 70년 송해
  • 김우성
  • 승인 201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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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우성】“최초 콘서트 여는 대중문화 분야의 인간문화재”

1984년부터 KBS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온 코미디언 송해(84)는 국내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MC 기록을 갖고 있다. 대학생 아들을 사고로 떠나보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방송을 은퇴했다가, 바람이나 쐬자는 PD의 권유로 다시 마이크를 잡았던 게 어느덧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전국~”이라고 외치는 그의 구수한 목소리에 휴일 정오의 나른함을 깨던 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고, 부모가 되어, 또 새로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TV 앞에 모인다.

대문 밖에 나서면 금방이라도 만날 것 같은 친근함으로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송해는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가용 없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방송활동의 원천으로 삼는다. <전국노래자랑>에 120여 명의 PD가 거쳐 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방송을 펑크낸 적 없는 근면함은 방송 관계자들에서 명성이 높다. 지난해 <전국노래자랑> 30주년 공연에서는 이상용 이상벽 이경규 강호동 이수근 등 후배MC들이 자리를 지키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 예술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4살 때부터 도립극단, 이동예술대 등의 공연에 아코디언 하나 들고 따라나서며 예술인의 길을 걸었으니 무대 위에서만 70년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는 1·4 후퇴 무렵 피난길 연평도에서 LST화물선에 올라 혈혈단신 월남했다. 부산에서 국군 통신부대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휴전 직후인 1955년 황해도에서의 경험을 이어 창곡악극단 가수로 연예계에 정식 데뷔했다. <전국노래자랑>을 맡기 이전에는 구봉서, 서영춘, 김희갑, 배삼룡 등과 한국 코미디의 부흥에 일조했다.

오는 9월 12일, 송해는 자신의 84년 인생과 70년 예인생활을 돌아보는 공연 ‘나팔꽃 인생 송해 빅쇼’를 무대에 올린다. 원래 가수 출신인 그가 생애 최초로 가수 입장에서 여는 콘서트인데 노래, 악극, 코미디극 등 장르를 넘나들 예정이다. 공연을 보름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송해를 만났다.

늘 소박한 무대(전국노래자랑)에만 서시다가 큰 공연을 준비하신다기에 좀 놀랐습니다.

“나 공연합니다”하고 크게 떠들 건 아닌데 좀 쑥스러워요. 다만, 65세 정년을 맞은 분들이 사회에서 너무 빨리 벗어난다는 생각을 갖던 차에 “송해는 이 나이까지 즐깁니다”하고 보여드리고 싶었지요.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인생 70부터, 80부터, 이런 식으로 계속 늦춰지고 있어요. 어느 설문조사에서 앞으로 인간 수명이 100세까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어요. ‘무조건 오래 사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덜 살더라도 건강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자식에게 부담 주기도 싫고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답변이 많았는데,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공연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 해도 방송일 때문에 쉽지 않으셨을 텐데 실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는지요.

바쁘고 급변하는 세상입니다. 망각이 빨라요. 한류만 봐도 쉼 없이 새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우리 것을 잊게 돼요. 돌아가신 박동진 선생께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명언 중의 명언을 남기셨잖아요. 우리 것이 정말 소중한데 외세에 묻히고 다 잊어버리는 이 때에 우리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어요. 오며가며 거리에서 만나는 분들과 오랜 세월 함께한 선후배들이 송해만의 공연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격려해주셔서 더 늦기 전에 시작하게 됐습니다.(웃음)

이것저것 다양하게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못 듣는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준비했는데 뭐 좀 듣기 안 좋아도 나름대로 열심히 부를 겁니다. 하하. 우리가 어떤 고난에 맞닥뜨리면 노래로 풀잖아요. 가사를 음미해보면 참 좋은 노래들이 많지요. 그래서 노래에는 시대상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이번 공연을 시대적 연결의 의미에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서로 보급하면서 배우자는 의미로 국악도 준비했고, 희극과 악극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또 여러분들께 노래 요청도 받을 겁니다. 신세대 노래는 빨라서 못하고. 하하.

(공연 총연출자인 신승호 감독이 옆에서 거들었다)

송해 선생님이 직접 겪었던 해방과 6.25, 사회변화와 연예계 생활이 종합적으로 하나로 묶인 공연입니다. 이 분의 평소 국가, 사회, 인간에 대한 사랑이 표현될 것입니다. KBS <가요무대>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 중에 송해 선생님만 아는 노래가 많아요. 들어보시면 “아 그게 저 노래였어?”하실 만한 곡들이지요. 저는 송해라는 인물을 한 마디로 ‘대중예술 분야의 인간문화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웃음)

(송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께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흘러간 노래’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흘러가지 않았어요. 지금도 부를 수 있잖아요. ‘그리운 노래’, ‘들어보고 싶은 노래’라고 표현하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애정, 남녀 간의 사랑, 상처 등을 고루 위로하는 게 우리 가요입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노래 부르고 싶다는 분들 있으면 무대에 모실 겁니다. 제가 전국노래자랑을 오래 해서 관객들 긴장 풀어주는 데에는 소질이 있거든요. 하하. 각 방송에도 일반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야 할텐데...

장충체육관에서 공연하는 뜻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요.

저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장충체육관에서 나랏님 선거며 행사, 공연이 열리고 수많은 체육인들이 배출됐는데 그런 역사적인 장소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어 영광이면서도 한 편으론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어요. 난 동대문운동장 없어질 때도 많이 울었어. 예전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연예인 체육대회만 13회나 진행했거든요. 그때 어지간한 국제경기보다 관중이 더 들었어요.(웃음) 장충체육관이 전문적인 공연장이 아니다보니 음향이 걱정되기는 합니다만 여러분들의 품속에 안겨 살아오면서 익혔던 것들을 가감 없이 성의껏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공연 제목인 ‘나팔꽃인생’은 어떤 의미인가요?

4~5년 전쯤 작곡가이자 가수인 신대성 씨와 어느 지방의 추어탕 집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식사하고 나오는데 옆집 담장을 타고 나팔꽃이 그렇게 소담스럽게 피어있을 수가 없었지요. 어릴 적 동네 담장에서 보던 풍경이었어요. 우리 어릴 적에는 나팔꽃을 들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거든요. 나팔꽃은 아침에 환하게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들해지지만, 또 다음날 아침이면 활짝 피어있습니다. 이게 우리 인생과 아주 닮았잖아요. 말없이 피고지고 다시 생생하게 여러분을 만나겠다는 의지도 담겨있지요. 나팔꽃의 모양이 축음기하고도 비슷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팔꽃인생’이라는 말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피난 당시 일화 좀 말씀해주세요.

21살. 뭐든지 해보고 싶은 나이에 6.25가 발발했어요. 고향에 구월산이라는 명산이 있는데 패잔병 4천명이 산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서 징을 쳐가며 약탈을 했어요. 날 밝으면 다음마을로 도망가고, 또 다음마을로 여섯 일곱 번 정도를 도망가다가 아 이제 여기까지만 피신하면 다시 집에 갈 수 있겠지 싶었는데 영영 못 돌아가게 됐지요. 연평도에서 LST화물선을 탔어요. UN이 정보가 빠르니 그 날짜에 피난민들이 몰려올 거라 예상하고 배를 대기시킨 거죠. 제 예명 송해(본명 송복희)는 그때 그 배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다야 내 갈 길 어디냐”라고 읊조리며 지은 겁니다.

피난 와서 국군에 입대를 하셨죠?

부산 내려가서 바로 훈련소에 들어갔어요. “중학교 졸업 이상 거수!” 해서 손을 들었더니 통신학교에 배정을 받았는데 무선이 그렇게 신기한 거야. 일반 전문학교에서 2년 공부할 분량을 6개월 만에 맞아가며 배웠지요. 요즘 자동차 광고 보면 “쭈다쭈 또또또또또”하더니 차가 슈욱 나와서는 “케이파이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제가 다루던 모스부호로 쭈다쭈가 ‘K’, 또또또또또가 ‘5’를 의미해요. 제가 1953년 7월 27일 9시부터 휴전전보도 쳤습니다. “27일 밤 10시를 기해 모든 전선에 전투 중단!” 어느 프로그램서 전우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더라고요.

지금은 밝게 회상하시지만 고생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

일본군 출신 고참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일부러 포복시키고 날 많이 힘들게 했어요. 제대만 하면 저 놈 꼭 찾아간다며 벼르고 별렀었죠. 나중에 대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니 웬걸.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가 났죠.(웃음) 부산생활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번 공연에서도 그 당시를 노래로 대변하려 합니다. 피난 당시 저에게 도움을 줬던 경상도 아지매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씀을 자주해주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제가 단단히 각오하고 인생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제가 실제 서울로 상경하던 장면도 공연에서 표현될 겁니다.

연예계 데뷔 당시에는 분위기가 어땠나요.

휴전 후 바로 일반 악극단에 들어갔는데 초창기 연예계 생활은 지금과 비교가 힘들 만큼 무서웠어요. 당시 일본식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적산가옥 여관에 묵게 됐을 때 선배 방 앞을 지날 때면 마루에 삐그덕 소리 안내려고 앞 축으로만 총총걸음으로 지나가고 그랬지요. 이동할 때는 선배들 보따리 5~6개씩 더 들고 다녔고, 공연 끝나면 한 겨울에도 양말만 7~8켤레를 빨아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생도 아니지. 그때로 돌아가 또 고생하라고 해도 그리운 선배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대중들의 박수를 받기 위해,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자 하니 건강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전국노래자랑 방송 때문에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요. 그저 내 마음 즐겁게, 상대방에게 웃음을 드릴 수 있는 직업 덕분에 건강한 게 아닐까 합니다.

전국노래자랑 얘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방송을 하며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어느 시각장애인 노인이 딸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 올라 ‘나그네 설움’을 절절하게 부르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노인이 그동안 살아온 생애를 노랫말에 진심을 담아 열창하는데 그냥 눈물이 주루룩 흘렀어요. 그분이 출연한 이후부터 전국노래자랑에 장애인 분들도 스스럼없이 출연하게 됐지요.

중간중간 힘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아무렴요. 여러분들과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방송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겪게 되고, 사람관계에서 오는 상처도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전국노래자랑이 없었으면 송해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되뇌었습니다.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 방송하는 날까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전국노래자랑 MC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남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내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마을 분들 모셔놓고 꼭 한 번 방송을 하고 싶어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국민들의 애환을 들어주던 그가 정작 실향민이라는 사실에 잠시 숙연해졌다.)

대중예술계의 어른으로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대중예술에도 유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요. 예술의 전당에도 공연장은 많은데 대중예술인을 위한 무대는 없어요. 대중예술도 우리 것입니다. 보존하고 지켜야할 때가 왔습니다.

한 국문학과 교수가 국내 유명MC들을 대상으로 발음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한글을 가장 올바르게 발음하는 방송인으로 송해가 꼽혔다. 이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는 한글학자, 아나운서 등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게 도움이 됐다며 “방송인들은 언어의 질도 문제이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의무”라고 했다. 송해라는 이름 앞에 ‘국민MC’라는 명예가 거부감 없이 어울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터뷰이 나우] <전국노래자랑>을 25년 넘도록 진행해온 코미다언 출신 방송MC 송해 씨는 얼마 전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도중에 자신의 실제나이가 호적보다 2살 많은 89살이라고 밝혀 화제가 됐다. <전국노래자랑>은 영화까지 만들어져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모으기도 했는데 최근 그는 건강보조식품의 광고모델료로 받게 될 1억원을 전액 출연해 장학사업과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재단을 설립할 뜻을 밝혔다. 그는 서울 낙원동에 사무실을 둔 원로 연예인 모임인 상록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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