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던 기쁜 우리 배창호
보고 싶었던 기쁜 우리 배창호
  • 김두호
  • 승인 200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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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으로 영화를 만들고 세상을 본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대망의 2008년 새해에 한동안 꺾인 한국영화의 기력을 되살릴 구원의 기사(騎士)는 누구일까? ‘추억의 영웅’으로 잠겨 있던 배창호 감독이 눈을 부릅뜨고 신작 영화를 준비 중이다. 한국영화의 1980년대 중반은 ‘배창호 시대’였다. 신상옥 감독이 이장호를 낳고, 이장호는 배창호를 낳았다. 우리 영화사에 작품을 남긴 감독이 통틀어 3백여 명에 이른다. 그들 중 시대를 불문하고 자신의 전성시대를 이끌어 낸 감독은 소수로 꼽힌다. 배창호 감독이 그 중의 한사람이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시작된 배창호 영화는<적도의 꽃>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깊고 푸른밤> 등의 화제작을 잇달아 히트시키면서 수입 영화에 짓눌려 있던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세우고 영화인의 기를 살렸다.


작업복바지에 걸레가 된 군용점퍼 차림,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비렁뱅이 모자를 눌러 쓰고 1천여 명의 6.25 피난인파(엑스트라) 속을 헤집고 다니며 메가폰으로 통제 고함을 질러대는 광기의 남자. 1985년 대작 멜러영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의 강원도 횡계 로케이션 현장에서 본 젊은 날의 배창호 감독 모습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카메라가 돌면 신발이 벗겨진 것을 잊어 먹고 양말바람으로 ‘레디 고’를 외쳐대는 괴짜였다.


만든 작품들이 밤하늘의 폭죽처럼 터져 오르던 시절에는 끝없이 술을 마셔대고 담배도 하루 3갑씩을 태웠다. 그 젊은 날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언제부터인지 그는 술 담배를 멀리하고 작품도 악기(惡氣)가 빠진 사랑과 정(情)을 소재로 한 부드럽고 편안한 영화 쪽으로 돌아섰다. <황진이>로 시작해 <러브스토리> <정> <길> 같은 영화들이 작품 선택과 연출 패턴의 변화를 보여준 작품들이다. 3년 전부터는 건국대에서 영화예술학과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기도 했으나 지난해 교수직도 정리했다. 창작활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학교를 뛰쳐나온 그의 근황과 함께 진행 중인 일들에 대해 물었다.




다들 부러워하는 교수생활을 청산한 것은 이유가 있겠지만 용기도 필요했을 것 같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각오인가?

영화감독이란 어디에 소속되어 규칙적으로 일하는 것이 훈련이 안된 직업인이다. 그럼에도 3년간 출퇴근하는 생활을 해온 것은 나름의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한 거다. 학과를 신설하는 일부터 학생을 가르친다는 보람으로 불만은 없었다.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언어도 접하고 작품을 지도하거나 편집을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내가 창작해야할 시간이 없어진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내 본연의 자리로 복귀한 것뿐이다.


준비하는 작품이 있는가?

영화를 시작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영화준비 작업이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소모품 적으로 흐르는 요즘 작품들의 경향과 달리한 소재를 찾고 있다. 주로 역사서적을 많이 보면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다.


좋아하던 술 담배를 끊었다는데? 때때로 재미없다는 생각은 안드는가?

1990년대와 함께 술 담배로 흔들리는 생활을 정리했다. 다시 접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들 정도로 잊었다. 재미있게 사는데 그것들이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끊은 후에 느꼈다. 나는 사람들의 잃어가고 있는 사랑의 마음을 영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걸 갖고 있다. 영화에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처신에 신경을 쓴다. 술을 마시면 무책임하게 실언을 하는 점에서도 경계했다. 내 탁한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내가 창조하는 등장인물의 아름다운 영혼을 그려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연출 작품 17편중 1986년에 연출한 영화 <황진이>부터 배감독의 작품성향이 달라졌다는 평이 따른다. 대체로 드라마가 악과 선의 갈등구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면 배감독의 작품은 ‘선(善)’에 치중해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이 없어져 과거와 같이 강렬한 메시지가 없다는 점이다. 황진이도 기생이라는 신분보다 구도자의 인물로 그려낸 점에서 논란을 많이 남겼다. 감독의 평소 그 같은 의식이 반영된 건가?

타계하신 영화평론가 정영일씨는 <황진이>를 한국영화의 쿠데타라고 평했다. 겉으로 드러낸 기생이라는 모습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 내재된 갈등과 진정한 인간적인 갈망이나 자유의지를 깊이 있게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황진이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대부분 야사이지, 실록에는 몇 줄 밖에 안 나온다. 지족이야기도 야사다. 절절한 사모의 정을 나타낸 임재의 시조가 그래도 분명한 사료였다.



그런데 관객들에게 낯선 황진이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감독이 머리로만 찍었지 가슴으로 그려내지 못한 탓이다. 지금 만든다면 삶의 체험을 통해 습득한 내공을 녹여 한 단계 더 승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에 만든 작품들은 사실 젊은 광기가 앞섰지 내 스스로 삶의 진정한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로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연출의도도 <황진이>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가?

사물을 사랑이나 선(善)으로 접근하고 생각하는 시각은 창작에도 매우 소중하다고 본다. 선을 보여주더라도 싸움이나 갈등구조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 입체적인 표현작업의 정리를 잘해야 관객의 공감을 받아내는데 <황진이>는 좀 더 정제된 이야기로 농축 엑기스를 뽑아내지 못해 결국 ‘나의 황진이’ 선에 머물렀다. <기쁜 우리 젊은날>도 시도와 의도는 같았는데 결과는 달랐다.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선입견을 바꾸어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신 자신의 ‘기쁜 젊은 날’은 언제였다고 기억하는가?

1980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이장호 감독님의 연출캠프에 들어갈 무렵의 나의 처지는 모든 게 힘들었다. 생활도 넉넉하지 못했고 영화감독에 꿈을 걸고 뛰어들었지만 선택이 옳은지도 확신이 안서고 불안할 때에 기쁜 일이 생겼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시나리오 공모사업에 <정오의 미스터 김>이라는 시나리오를 써서 응모했는데 1등에 뽑혔다. 그때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상금 3백만 원을 받아서 기뻤고 영화작가로 인정을 받아서 뿌듯했다. 그 후 감독이 되어 만든 작품이 처음 선을 보이는 시사회에서 박수를 받고 호평을 받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이어서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면 언제나 가슴이 뛰었다.




배 감독은 25살이던 1979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종합상사에 취직해 나이로비지사 설치 임무를 받고 케냐에 들어가 3백만 달러짜리 참치잡이 어선 두 척을 팔았다. 아프리카에 첫 한국 선박을 수출한 인물로 현지 신문이 인터뷰 기사까지 실었다. 그렇게 전도유망한 길목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울로 돌아왔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에 저지른 반란이었다.


그의 꿈은 일찍부터 영화감독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어머니 때문에 태아시절부터 영화를 접했다는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보았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의 장면들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 어두컴컴한 고성(古城)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 흑백의 음영이 뚜렷한 긴 복도. 이상한 모습의 아이들...바보아이의 미소와 창문 사이의 햇살... 연세대경영학과 시절 연극서클에서 활동하면서도 영화감독을 꿈꿨고, 아프리카에서도 8mm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사표를 받아주지 않는 회사에 일방통고를 하고 서울로 온 배감독은 최인호 작가를 통해 소개받은 서울고 선배 이장호 감독을 찾았다. 조감독 3년만에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 무렵 대단한 행운이었고 실력을 조기에 인정받은 것과 같았다.



연출을 시작하면서부터 지켜 본 배창호라는 인물은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씨가 변하지 않고 인품도 돋보인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검소하고 겸손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고 또 효심이 지극한 것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타고난 심성인가, 가정교육의 영향인가?

쑥스럽다. 과찬이다. 부족한 게 많다. 은행에 근무한 아버지와 김소희, 박동진 선생 등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며 예능세계의 멋을 즐겼던 미인 어머니,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주던 이모들이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낸 시절도 있었지만 불행하고 힘든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것이 일찍 내면의 성숙기로 접어들게 했다.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 20여 년간 휠체어에 의지해 사셨다. 어머니의 목욕을 시켜드리며 영화를 만들었다. 첫째 이모도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살하셨고, 둘째 이모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출산을 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아기와 바꾸었다. 또 억울하게 강제 이혼 당한 셋째 이모 등 어머니와 이모들의 슬픔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인생을 생각하는 깊이가 나이가 들수록 깊어졌다. 나의 영화 속에는 살면서 보고 느낀 삶과 죽음의 실체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꼬방동네 사람들> <기쁜 우리 젊은날>에는 이모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과거 배 감독 댁으로 전화를 하면 아버지가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던 생각이 난다.

반평생 아내의 간병을 하신 아버지가 1998년 먼저 세상을 떠시고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말씀은 못하셨지만 그 긴 세월을 병마와 싸우시면서 보여주신 눈빛은 언제나 미안한 마음을 내 가슴 속으로 파고들게 하셨다.


귀여운 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 된 13살 배영수다. 요즘 영어 숙제를 도와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딸의 아버지는 섬세하고 세심하고 다정다감해야 한다는데 매사에 신경이 쓰인다.



<깊고 푸른밤>이 단일 극장에서 60여만 명을 동원해 배감독 시대의 절정을 기록했다. 1985년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도 받았다. 그 무렵 작가 최인호, 배우 안성기 장미희 김보연 등이 배감독의 작품 파트너들인데 늘 함께 어울려 다닌 것으로 안다. 지금도 자주 만나는가?

어쩌다 행사 자리에서 안성기를 만나기도 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 만나지 않고 지낸다. 다른 사람은 만난 지 오래된다. 시간이 많으면 혼자 산을 찾는다. 그러고보니 시간이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다.


조감독으로 배 감독이 극진히 아꼈던 이명세 감독이 최근 작품을 내놓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그와는 자주 만나는가?

서로 연락이 없다. 서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공유가 어렵다. 일하며 사는 사람들의 만남은 다들 어떤 목적이 있을 때 공동의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좀 외로워 보인다. 술 한 잔 나누고 싶어서 만나는 친구도 필요하다. 그런데 술도 끊고 산다니.

외롭지 않다. 외로울 때는 신앙생활로 빈 마음을 채운다.



<러브스토리>는 예쁜 부인(김유미 45)을 주연으로 출연시켜 직접 제작까지 한 영화였다. 그 작품도 자신과 부인의 연애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돈을 벌지 못한 것 같다. 과거와 달라진 관객 반응으로 실망을 느끼지 않았는가?

<깊고 푸른밤>을 만들 무렵은 한창 성공에 취해 있을 때였다. 그 때는 불안 초조와 책임감 따위를 함께 몰고와 마음도 불편했고 창작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일이 모두 장단점이 따르지만 마음만은 지금이 아주 자유롭고 평화롭다. 그런 안정된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러브스토리> <정>같은 작품이다. 결과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지만 직접 제작을 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만들고 싶은 영화를 내 마음대로 만든 희열이 있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다시 영화를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기회라는 것이 인간의 삶의 변화와 일의 성패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살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때를 만나야 빛을 보고 결실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나에게 다시 때가 남아 있다고 확신한다. 그 시기를 위해 창작준비를 열심히 하겠다.



배창호 감독은 이야기도중에 간혹 의미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세상이야기나 사람들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지만 그래도 화려했던 시절의 인연과 추억 이야기에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흥미있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생각은 모두가 진지하고 진실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행복하고 외롭지 않다고 했으나 얼굴에는 때때로 허전한 우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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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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