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학부 소용돌이로 시련 겪은 서울기독대 이강평 총장
계약학부 소용돌이로 시련 겪은 서울기독대 이강평 총장
  • 서영석
  • 승인 201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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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을 태운 버스가 고장 나면 고쳐서 가야지요” / 서영석

 

 

 

 

[인터뷰365 서영석]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서울기독대학교는 교명이 몇 차례 바뀌었지만 1937년 미국에서 온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해 태동한 70여년 전통의 유서 깊은 신학대학이다. 이강평 총장은 이 대학의 신학과 출신이므로 교육적으로 보면 자신의 모천(母川)인 모교로 돌아와 만년의 꿈을 모교 발전에 바치고 있는 분이다.

이 총장은 서울기독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거쳐 웨스터민스터 신학대 목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특별한 이력은 한양대에서도 체육학을 전공한 뒤 미국 톨레도대에서 체육생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체육학자이면서 체육계 지도자로도 활동해 온 점이다. 한양대 교육대학원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정책실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 대학배구연맹회장 등을 역임했지만 스스로는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교회와 함께 살아온 목회자임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2006년 제5대 총장으로 재선임 된 취임식 자리에서 당시 박종순 한기총 대표회장은 축사를 통해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신다”며 “이 총장님은 하나님께서 서울기독대를 위해 뽑으신 일꾼으로,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서울기독대학교가 서울 도심에 캠퍼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학인데 어떤 특성의 대학입니까?

교훈(Motto)이 “성서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Bible)”입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학문과 교육 이념을 실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전통적인 신학대학입니다. 그러나 신학과를 비롯해 사회복지, 국제경영정보, 음악, 무용, 교양학과가 있고 대학원도 일반, 전문, 특수 전공분야로 나누어 석, 박사과정이 있습니다.

1937년 4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죤 체이스 선교사가 서울 송월동에 설립한 그리스도교의 교회신학교가 뿌리입니다. 80여 년을 거치는 동안 1963년 교명이 성서신학교로 개칭됐고 1965년 서울기독교신학교, 1972년 학교법인 환원학원이 창립되면서 4년제 대한기독교신학교로, 이어서 1982년 서울성서신학교와 통합하여 대한기독교신학교로 개칭됐어요. 1985년 교육부가 4년제 대학 학력인정의 정규 대학으로 승인을 해 현재의 캠퍼스로 이전 했고, 1997년 12월 대한기독교신학교에서 대한기독교대학교로, 다시 1999년에 이르러 서울기독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현재에 이른 것입니다.

 

체육 분야는 어떻게 인연이 되셨는지요?

어릴 때는 대구에서 수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운동이 너무 좋아서 서울의 중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배구선수를 하려고 당시 유명했던 인창중학교를 택한 것이 스포츠와 연을 맺은 계기가 되었어요.

 

대구가 고향이신가요?

선친의 고향은 평양입니다. 어머니의 고향이 선산이어서 대구서 살게 되었어요. 운동을 하게 된 계기도 아마 운명적으로 움직이며 살아야 하는 역마살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운동하실 때 애기 좀 해주시지요.

참 많이 맞았습니다. 선배에게는 절대 복종이 당연시 되던 시절이라 나이 어린 선배에게도 꼼짝을 못했지요. 이때 인내심이란 커다란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땐 한국 사회가 참 먹고 살기 힘든 때였어요. 어려운 시절에 운동을 하다 보니 힘은 들었지만 일반 학생들에 비해 조금은 윤택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배구는 제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정말 열심히, 미친 듯 배구에 매달렸지요. 배구는 6명의 선수가 뛰는 운동이지요. 요즘 학생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당시는 9인제로 하는 배구도 있었어요. 9인제와 6인제가 혼용으로 이루어질 때 전 센터를 맡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파이크를 때리는 선수에게 공을 띄워주는 역할이지요.

 

배구선수 시절 스타플레이어 셨다면서요?

중학교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어요. 고등학교 진학 때는 광주의 광주조대부고로 스카우트 되었으니까요. 이어서 한양대 배구선수로 활약을 하다가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것이 현역 선수론 마지막이 되었지요.

 

유학 후 지도자로 활동을 하신건가요?

모두들 그러하듯 코치와 감독을 했습니다. 숱한 학교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며 같이 뛰었지요. 지금,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선수로 뛸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만큼 배구는 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대신중고등학교 코치를 비롯하여 인창고등학교, 이화여대 감독을 했고 미국에서도 UCLA 감독과 미국여자대표팀 감독까지 했으니 배구선수 출신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영예였지요.

 

 

 

 

지난 일들 가운데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면 어떤 기억들이 먼저 떠오릅니까?

미국에서 체육학 박사학위 받았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가 미국으로 유학 갈 당시 알파벳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었어요. 우리 시대 운동선수가 거의 그렇듯이 아예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오로지 운동기계로 키워졌으니까요. 까만 것은 글씨고 검은 것은 알파벳이다 정도 알고 유학길에 올랐으니 그 고충은 말로 다 못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해냈다는 대견함을 정말 잊을 수 없어요. 주위 분들이나 절친한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학위를 따지 못할 것이라 공공연히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통의 결과로 받은 박사학위를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또 1976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내가 지도한 미국이 5위를 기록했을 때 의미 있는 눈물을 흘렸어요. 우승 이상의 보람을 느꼈어요. 그때 미국의 배구는 세계 20위권의 변방에 머물러 있을 시기였고 특히 감동이 있었던 것은 5,6위 순위결정전의 상대가 페루였는데 감독이 일본사람이었어요. 모든 스포츠가 한일전이면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선수들은 다른 나라사람들이지만 감독들끼리 한일전을 벌였거든요. 그날의 승리가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의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미국배구하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데 일조를 한 셈이군요.

자랑일 수 있지만 그 무렵의 청소년배구가 미국배구계의 발전에 기여하고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승승장구의 촉매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요.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8살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한 때 아버님의 사업실패로 고아 아닌 고아생활을 했고 자칫 불량소년이 될 뻔도 했지만 교회를 다닌 덕분에 나쁜 물에 휩쓸리지 않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제게는 종교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에 의지해 학생으로 선수, 코치로써 성공의 길을 찾을 힘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미국 유학 시절에 선언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박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인도를 해주셨기에 그 어려운 과정을 집념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요. 알파벳 공부로 시작해 대학원까지의 과정이 기적처럼 풀려나간 것이지요. 체육생체학 학위에는 일반 유기, 무기화학, 통계공부를 하려면 수학공부 등 과목이 너무 많아 고등학교 수업까지 들어가며 머리를 싸매고 매달렸어요.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감탄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상상조차 힘든 과정을 이겨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과연 내가 한 일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고통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진즉에 포기했을 겁니다.

 

생애를 통 털어 잊기 어려운 가슴 아픈 일이 있으셨다면?

모든 면에서 승승장구를 하다 금년, 2010년 1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이 너무 힘들었어요. 엄청난 고통에 수 없이 흔들릴 뻔 했지만 집념과 기도로 극복할 수 있었지요. 회유와 협박, 법정소송으로까지 비화 등 감내하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운동선수 출신으로 인성과 지도자로써 원칙 고수로 어려움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었지요.

 

그 어려웠던 일이란 어떤 내용의 일이었나요?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졌지만 금년 들어 산학협력단 계약학부와 관련해 3백여 명의 학생과 1백여 명의 교수진이 적을 둔 학과를 폐과 시켰다고 해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폐과를 한 적이 없지만 폐과라는 극단적인 표현에서 해석의 차이가 일어나 한층 오해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법과 원칙을 앞세운다 해도 3백여 명이라는 학생과 1백여 명의 교수를 동시에 퇴출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법규를 벗어난 교육시스템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산학협력단이 진행하는 2010년도 신입생 선발을 하지 않도록 권고를 했어요. 그런데 사태의 원인과 과정 등 진실을 제대로 확인 않고 결과만 보고 총장이나 대학 측의 횡포처럼 여론이 반영되어 난감했습니다. 대학은 이성과 지성으로 움직이는 신성한 학문의 도장이지 어느 대학도 총장을 비롯한 소수의 운영 관리자들이 마음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국가가 정한 교육 기준을 지켜야 하고 비리나 불합리한 문제가 있다면 총장이 자리를 걸고 해소를 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학생 선발에서 졸업까지 학교가 당당하게 학력과 학위를 인정하는 학생을 양성해야 한다는 원칙은 누구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계약학부와 관련해 법령위반, 업무방해 등의 사유로 문책성 인사를 단행하여 계약학부 겸임교수 8명을 해촉하고 계약학부 홍보담당 계약직원 1명을 계약해지 한 사실은 있어요. 일부 언론에서 1백여 명의 교수를 해임했다는 보도를 했는데 한 학기 단위로 위촉했던 시간 강사 분들을 모두 염두에 둔 것 같아요. 학기가 끝나면 위촉기간도 끝나고 재위촉을 하지 않았다면 해임으로 볼 수 없습니다.

 

계약학과의 폐과에 이른 법령 위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계약학과도 대학에서 학력을 인정해 학위를 주게 되지만 신입생 선발 등 학사관리는 대학과 법적인 절차와 계약에 따라 산학협력단이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9년 11월 실시된 교육과학기술부 감사에서 우리 대학의 계약학부 운영이 학과 설치 관계법령 7개 항목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지적 되고 더불어 관계자 엄중문책과 학과 폐지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우리 대학은 금년 1월 자체 조사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무위원회 규모의 계약학부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학과별 교육과정, 강사와 겸임교수진 및 MOU산업체의 법적 요건 등 관리 운영 내역을 파악하고 검토한 결과 교과부의 지적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시정요구를 수용한 것입니다.

교육 당국과 학교 측의 시정방침이 확고했지만 그러한 내용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로 2010년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것은 대학의 장래까지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과부가 지적한 7개항의 위반 사례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계약학과 설치 법적 요건, 계약학과 학칙의 반영, 산업체 등과 체결하는 계약사항, 계약학과 설치과정 절차 및 장학금 지급, 모집학과 및 등록금 기준 모호, 등록금 분납결정 및 교수(강사)의 자격 요건 등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관계법령 준수 및 시정 조치(관련자 엄중문책 및 학과 폐지)를 통보 받았습니다. 특히 교과부의 지적 중 자격 미달의 시간 강사 임용, 시간강사 위촉자가 학사, 석사과정 학생으로 재학 중에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또 고교 졸업증이 없는 학생을 입학시킬 수 없지만 대학을 다녀도 학사학위를 준다면 부정입니다.

대학이 산학협력단의 자율적인 운영지침을 신뢰한 것이 잘못일 수 있지만 MOU 업체도 부적격하고 학생 자격도 부적격한 사실이 늦게라도 확인됐다면 대학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법령에 의거해서 입학을 취소하고 대신 등록금과 입학금은 전액 반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승객을 태우고 달리는 차가 검정기관에 의해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 차를 멈추고 자체 점검을 해야 하고 그 결과 문제점이 확인되면 당연히 멈추게 하여 고친 후 움직이게 해야지요. 계약학과를 지속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학과의 문을 닫게 한 뒤 관계 법령을 근거로 MOU 체결업체의 적격성 확인, 학생자격의 적격성, 교육경비 부담 등 제반사항을 단계적으로 검토하여 문제가 없다면 계약학과를 지속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이었어요. 부적격 업체를 통하여 입학한 학생일지라도 고교 졸업의 학력을 가진 학생에 대해서는 본교 평생교육원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학위과정 연계를 지원하고, 부적격 업체 및 부적격 학생에 대해서는 등록금 전액을 환불 조치키로 한 것입니다. 입학에 하자가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당연히 구제를 하게 됩니다.

 

이번 사태로 고발까지 당하셨지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슬픈 일입니다. 나는 총장이면서 목사입니다. 대학도 교회도 신성한 곳이며 사심을 가지거나 신뢰를 잃으면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두고 학내 분쟁이나 비리로 매도하는 일각의 선동행위에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계약학과는 대학이 일종의 장학사업과 사회사업 차원에서 수용한 바람직한 교육제도인데 초기 운용단계에서 문제점들을 드러낸 것입니다. 운영상의 미숙과 시련의 과정일 수 있는데 문제점을 보완해가면 곧 단단하고 발전적인 정착단계에 이를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생각에 기독교 대학이라면 기독교 관련학과만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서울기독대의 학과 가운데 무용과와 음악과가 특별히 눈에 뜨입니다. 일반 대학의 무용, 음악교육과 달리 종교와 연관된 예술분야 학과인지요?

인성 교육의 마무리는 문화와 예술 교육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중세의 암흑기라고 함은 기독교가 예술의 타락에 경고의 의미로 박해를 가했던 시대를 일컫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술은 종교에 의해 다시 찬란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무용학과는 2001년도에 개설되어 예술성 순수 무용교육을 추구하면서 한편은 선교 무용 분야의 전통성을 살리고 현대적인 창조성을 새롭게 체계화하는 교육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음악과도 피아노와 성악 두 분야로 전공을 나누어 다른 대학과 차별화 된 특성화, 전문화, 실용화에 중점을 두면서 올바른 감성과 인격을 갖춘 음악인재를 양성하는데 교육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캠퍼스가 서울에 있는 점은 강점이지만 넓지 않은 공간으로 인해 학교 발전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학의 최우선 과제가 좀 더 넓고 새로운 교지(校地)를 확보하고 이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 계획을 추진 중에 이런 혼란한 사태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빠른 장래에 그 과제를 해결하려합니다.

그러나 명문 사학은 외형적인 하드웨어보다 교육의 질에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많은 인재가 모이게 하고 경쟁력 있고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느 대학이든 스스로 발전과 비전이 없는 교수는 떠나야 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스포츠계에서 오래도록 활동하시고 지금은 종교인과 교육자로 일과 삶의 무대를 바꾸셨는데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으시다면?

아직 논문을 쓰지 못해 신학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것이 가슴에 걸립니다. 물론 체육학 석, 박사학위는 취득했지만 하나님의 자식으로 더욱 정진하기 위해 공부했던 목회 부분의 학위를 미루다가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지요.

 

스스로의 삶을 성찰해 본다면 어떤 생각들이 먼저 떠오릅니까?

가장 먼저 ‘교만에 대한 자책’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선수로, 코치 또는 감독으로, 지도자 등 스포츠계나 학계, 종교계에서 승승장구해 인생에 실패를 몰랐어요.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만에 빠졌나 봅니다. 이번 학내 사태를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에 대해서도 뼈저리게 통감을 했습니다. 심지어 파렴치한 사람으로까지 몰릴 땐, “참 바보같이 살았구나” 라는 자책을 했어요. 운동선수 출신으로 단순하게 너무 사람을 믿은 것과 개인적 부덕과 부족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엄청났어요. 이제는 겸손을 바탕으로 목회자로써 나를 보는 모든 이들, 신도들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섬기는 자세로 임할 것입니다.

 

총장으로서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명문대 몇 곳을 제외하면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대학에 대한 긍지나 애교심이 없습니다. 학교 발전은 총장을 비롯해 교수와 학생, 졸업생과 학부모까지 한마음으로 뭉쳐서 참여해야 해요. 학생들은 대다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학교생활을 합니다. 졸업 후도 마찬가지 같아요.

총장으로 언제나 고민하는 것은 우리 서울기독대 학생들이 자신의 학교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재학생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학교가 작지만 큰 포부와 알찬 실력으로 대학을 나서는 인재들의 보금자리로 만드는 것이 자나 깨나 나의 소망입니다.

 

 

인재를 양성하고 성직자를 키우는 신성한 기독교대학교에 대립과 갈등의 회오리가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학교 측의 조처에 불만을 표하고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면서 대학의 운영 책임자들이 혹독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 혼돈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생애 가장 아픈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이강평 총장은 법과 원칙을 고수하고 신앙의 힘으로 치유와 극복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대학의 평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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