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9)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9)
  • 유지형
  • 승인 200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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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그려 낸다.

출생부터 기구했던 이월화는 극단에서의 혹독한 배우수업을 거쳐 윤백남의 도움으로 조선의 첫 영화 <월하(月下)의 맹서>에 출연,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가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이월화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한국 연극 영화사와 그 주역의 인물들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편집자주


등장인물


이월화(본명 이정숙)=이화학당을 나온 연극배우 출신 은막의 여배우. 계모의 손에 자라나 연극과 영화에 투신하고 자신을 키워준 영원한 스승 윤백남을 운명 직전까지 연모한다.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 가서 신혼생활을 영위하나 일본인 시어머니의 학대로 불행하게 그곳에서 죽는다.


윤백남 /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조선 연극 영화계의 거목. 이 월화를 무명극단에서 발굴해 연극계의 스타로 만들고 조선최초의 활동사진을 찍으며 이월화를 대 배우로 출세시킨다. 선비적 기질과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월화의 방종을 보고 절연한다.


안종화 / 배우 감독=이월화의 평생 친구. 끝까지 순수함으로 월화를 대한다. 최근 발굴되어 화제가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이기도 하다.


박승희 / 배우 연출자=극단 토월회의 대표. 미주대사를 역임한 박정양 대감의 장남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극단에서 여배우 이월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만 약혼녀의 등장으로 결국 월화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박승규 / 극장 단성사 부사장=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친동생. 기생인 월화를 만나 동거하나 주위의 반대로 결국 헤어진다.


윤기성 / 연극배우=월화의 연하의 남자. 고아로 자라난 불우한 청년이다. 월화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나 결국 마약밀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응수 / 연극배우 여장배우=극단에서 월화를 만나 변태적 관계로 발전한다. 월화에게 많은 도움과 길잡이가 된다.


조씨 / 월화의 계모, 기생출신=고아인 월화를 키워준 은인이다. 월화를 괴롭히기도 자책도 하는 이중적 성격의 여인이다.




(39) 영화광


[인터뷰365 유지형] “이제 나 올 때가 됐는데?”

사내는 어두운 골목길 건너편에 서서 <명월관>입구에 꺼질듯 말듯 가물거리는 홍등을 벌써 한 시간째 바라보고 있다.

요정 안에서는 술에 취한 청년들의 고성방가에 가까운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데칸쇼 데칸쇼 한 반년 지내세..

그 다음 반년은 누워서 지내세.”

<경성제국대학교>학생들이 분명하다. 데칸쇼는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첫 글자를 따 온 말로 대철학자를 운위 하면서 뒹굴뒹굴 세월을 보낸들 어떠하리 하는 식의 대인 기연풍 하는 노래이다.

그들은 비뚜로 쓴 사각모에 장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일부러 찢어진 만도를 입고 경성거리를 걸으면 이 노래를 합창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장안 처녀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아마 종로의 카페 등지 에서 맥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 요정을 찾은 것이 분명하다.

평소 돈이 없는 대학생의 신분으로는 기생집은 엄두도 못 내나 이렇게 술이 취하면 우르르 요정으로 몰려와 술을 마신다. 분명 안주 한 접시 값도 안 되는 공짜나 다름없는 술값을 낼 것이 분명하지만 기생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반기고 서로 방에 들어가려고 야단들이다. 주인이나 지배인 역시 앞으로 이 나라를 지도할 미래의 인물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주자는 뜻에서 대충 모른 척 넘어간다.

“어린놈의 자식들이 공부들이나 할 것이지?.”

사내는 혼자말로 뭐라 계속 투덜거리며 명월관 입구에 시선을 떼지 않는다.

아직 계절은 가로수의 잎도 지지 않은 구월 인데 밤바람은 제법 쌀쌀하다.

감기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온다. 현재 위로가 되는 건, 피고 있는 마지막 한가치 남은 담배뿐이다. 이미 그의 발밑에는 한 갑 가까운 담배꽁초만이 동동거리는 발밑에 짓 밟혀 있다. 당장 요정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지만 내 형편에 그럴 수도 없다.

사내가 월화를 만난 것은 한 달 전 보교 동창생인 최 군의 동경 유학 환송연 이었다. 나이 삼십에 처자식이 있는 놈이 부모를 잘 만나 동경 유학이라니.. 허나 솔직히 그 친구가 부럽다. 환송연은 바로 이곳 명월관에서 열렸다.

그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영화배우 출신의 기생이라는 이 여자는 기생나이 스물 살 만 되도 환갑이라는데 이십 대의 중반을 넘은 나이임에도 그 얼굴에 청조함이랄까? 또한 몸맵시도 날씬하고 스마트 하다. 더욱이 왕년에 여배우라는 선입견에서 풍기는 황홀찬란 하거니 교만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단지 얼굴에는 시름 비슷한 우수가 가득 했는데 그것 또한 그녀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사내는 조선권번에 전화를 걸어 기생 월화와 놀이를 예약했다. 그녀는 선약은 많이 밀려 있었고 겨우 사흘 후에나 시간이 가능 했다.

“어느 요릿집으로 보내드릴까요?”

“북창동에 있는 중국 요릿집 취성루로 보내 주시오”

“그곳엔 중국 갈보 들이나 출입하는 곳입니다. 저희 권번기생들은 그런 곳엔 가지 않습니다.”

“............?”

아니? 기생이 안 가는 장소도 있던가? 왜 그녀는 이곳으로 선약을 잡았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권번의 서기 인듯 한 사내의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손님! 정 조선요정이 싫으시면 남촌의 일본 요정도 괜찮습니다만?”

“취성루로 보내 주시오. 시간을 꼭 지키시오.”

사내는 더 이상 서기의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흘 후, 저녁 월화의 집 대문 앞에는 <경성운수>소속의 택시가 대기하고 있다.

월화는 붉은 양단치마에 남색 저고리를 입고 비단 꽃버선을 신고 방을 나선다.

“어머니! 놀이 다녀오겠습니다.”

방안엔 조씨의 소싯적 동무들이 놀러와 돈 내기 화투를 치고 있었다.

모두 왕년에 한가락 하던 기생들이라는데 지금은 세월의 그림자에 밀려 한가히 점에 일전짜리 화투를 치고 있다.

먼저 부용이라는 조씨의 수양 동생이 월화를 보더니 한마디 한다.

“과연 물 찬 제비로 구나.”

그러자 옆에 주름살투성이 얼굴에 진하게 화장을 한 매홍이라는 기생이 덧붙인다.

“앉으면 모란이요, 서면 작약이다. 라더니.. 해어화란 바로 너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에 홍단을 거두어 가던 조씨도 자랑스럽게 월화가 들으라는듯

“이년들아! 우리 딸이 네 년들처럼 평생 기방에서 썩을 팔자로 보이더냐? 명색이 배우니라.. 곧 이제 다시 활동사진에도 나오고 무대에도 설 것이야.”

큰소리로 호언장담을 한다. 조씨도 친구들 앞에 기생이 된 월화가 낮 적은 모양이다.

월화가 대문을 나오자 빤짝 빤작 윤이 나는 자동차 앞에 검은 정복을 입은 운전수가 대기하고 있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얼른 차의 뒷문을 열어준다.

택시는 어느새 총독부 앞을 지나 인사동 방향으로 가지 않고 통의동 방향으로 달리다가 남대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가고 있다. 그쪽 방향으로는 조선식 요릿집이 없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이나타운에 있는 취성루입니다.”

“......?”

월하는 내심 고개를 끄떡인다. 그날 밤 <명월관>에서 연회가 끝날 무렵, 그 사내의 귀에다 나지막이 속삭이었다.

"중국 요릿집 취성루로 나를 선약 하세요.”

월화의 귓속말에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우물우물 종이를 씹듯 말한다.

“나는 기생을 부를 만큼 돈이 없소?”

“계산은 내가 할 거예요.”

택시는 덕수궁을 마주보는 북창동 중국 촌 입구를 들어서자 골목마다 호떡집의 콩기름 냄새가 차 안에 까지 코를 찌른다. 사방이 거미줄처럼 갈라진 길가에는 다닥다닥 붉은 벽돌로 붙쳐 지은 게딱지같은 집 창문마다 장대 높이 검은 빨래가 널려 해적선의 검은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쿠리들이 긴 당목을 이용해 양쪽에 커다란 짐을 지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고, 전족을 한 여인들이 띠뚱 띠뚱 오리걸음으로 분주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런 구질구실 한 풍경들은 상하이를 닮아 있다. 상하이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으나 월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어, 택시는 곧 붉은 벽돌의 3층 건물 앞에 멎었다. 현관 앞에는 역시 붉은 간판인 <취성루>라고 옥호가 적혀 있다. 이곳 <취성루>라는 곳은 한 기생을 통해 들었다. 우연히 손님과 데이트 중에 중국 요릿집인 이곳에 들렸는데 아주 분위기가 이국적 취향으로 독특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소문을 내지 않고 남정네와 은밀한 연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는 최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월화는 그 사내와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와 단 둘이 만나고 싶을 뿐이다.

월화는 중국 요릿집 입구에 가로 쳐 놓은 붉은 구슬주렴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생각보다는 깨끗했고 호궁의 연주가 간드러지게 들려 왔다. 몇 개의 둥근 테이블이 놓였고 그중 한 테이블에만 비대한 체구의 중국인들이 쏼라 쏼라 떠들어대며 기름진 안주를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들은 화사한 한복을 입은 조선의 여인이 홀로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의 눈을 꿈뻑인다. 곧 붉은 커튼 뒤에서 중국옷을 입은 삐쩍 마른 남자가 나타났다.

“라이 라이! 어서와! 홀에 앉을 거야? 아니면 방을 줄까?”

화교 특유의 서투른 조선말로 버릇없이 말하는 장쾌에게

“나를 찾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능숙한 중국말로 월화는 대꾸했다.

주인은 금방 눈이 커지며 월화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 특실을 선약한 남자? 벌써 와 있지..”

“안내해요.”

“삼층이야! 따라 와!”

계속 반말로 앞장을 선다. 홀 중앙에 붉은 색으로 칠해진 호화스런 계단을 오르자 복도가 나왔고 그 복도를 오르자 또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을 오르니 붉은 홍등으로만 불을 밝혀 놓았다. 삐쩍 마른 장쾌는 월화가 따라 오든 말든, 복도 끝 마지막 객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한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는지 장쾌는 객실 문을 열고 월화를 돌아보며

“이 방이야. 어서 들어 가!”

제 딴엔 정중히 말하고는 월화를 스쳐 다시 복도를 돌아 나가 버린다.

월화는 반쯤 열려진 객실 문안으로 들어섰다. 방안 역시 온통 붉은 빛이다.

돌연 붉은 홍등 사이에서 낮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레디 액션!”

틀림없는 그 남자이다. 기생을 살 돈이 없다며 자신 없이 우물거리던 남자.

오늘은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자신감에 차 있다.

사흘 전, <명월관> 일실에서 이 남자를 처음 만났다. 그 방은 다른 방들처럼 기녀들의 허리춤이나 끼고 앉아 그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달디 단 술맛을 즐기며 음담패설이나 하며 시시덕거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고 벌써 꽤 담론의 시간이 지난 듯 온통 영화이야기로 화제를 몰아가고 있다. 한 사내가 입에 거품을 문다.

“작금의 조선 영화계를 볼 것 같으면 김영환이라는 감독이 만든 <세 걸인>이라는 영화는 감독의 연출력은 하나도 보이지도 않고, 출연 배우의 연기도 통 시들한 게 참 형편 무인지경의 영화더군. 그런 걸 활동사진이라고 박아 놓고 입장료를 받다니... 허긴 변사 출신이 감독을 하니 오죽 하겠나? 내 다시는 조선 영화는 보면 성을 갈겠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받아서

“난 그래도 재밌기만 하더구먼. 자네 황운 감독의 <낙원을 찾는 무리들>이라는 영화 봤나? 일본 놈들에게 저항하는 허무주의가 깊게 깔려 있고, 특히 전옥이라는 소녀의 연기가 아주 일품이라네.”

“예쁘기로 따지면 <사나이>에 나온 유신방이 제일이지.”

“유신방, 그녀는 기생 오향선이라며?”

“나운규가 인천기방에 술 마시러 갔다가 발굴 했다네.”

“나운규! 그 오입쟁이가 기생첩을 얻은 거나 다름이 없겠구먼.”

“어디 기생출신의 여배우가 유신방 뿐이던가? 석금성, 안연홍, 김난주, 김난옥, 자매까지 모두가 기생 출신이 아니던가?”

당시 기생들의 영화 출연은 다반사로 이루어 졌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배우를 하려면 먼저 기생이 되어 얼굴을 알리는 것이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생 출신이라는 걸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그 출신을 알렸다.

그만큼 기생이란 직업이 미색과 재능을 지닌 여자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등용문이었고기생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인정한 그런 시대이었다.

기생 이야기가 나오자 한 기생이 호들갑을 떨며 나선다.

“호호..그럼 우리도 잘하면 활동사진 배우가 될 수 있겠네요?”

“이년아! 기생도 기생 나름이지, 그 박색에 언감생심 무슨 배우냐?”

“아이... 어떤 손님이 제 얼굴이 불란서 배우 로..로 미엘 쥬..베 닮았다던데?”

이 기생은 어렵게 겨우 배우 이름을 기억해 내자

“허.. 이년이 무식이 경지를 떠는구만. 이년아, 로미엘 쥬베는 여배우가 아니고

주먹코에 근육질 남배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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