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소월(素月)시인 아들 김정호 씨
[그때 그 인터뷰] 소월(素月)시인 아들 김정호 씨
  • 김두호
  • 승인 200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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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머니와 대작하며 고독을 달랬어요”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1902∼1934)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김정호 씨를 인터뷰 한 것은 1981년 11월 이맘 때였다. 정부에서 소월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면서 서울에 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정호 씨는 서울 봉천동 달동네의 전셋집에서 살며 용산에 있는 기업체 빌딩의 경비원으로 재직 중인 가난한 서민이었다. 그가 기자와 만났을 때 쉰 살이었으니 건강히 살아 계셨다면 77세가 되지만, 몇 해 전 작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학교 공부를 시작해서 시(詩)라는 장르를 접하게 되면 처음 만나는 시인이 <진달래꽃>의 시인 소월이다. <산유화> <금잔디> <못잊어> <초혼> <먼 후일> <접동새> <달맞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언어를 민요적 운율로 노래처럼 담아낸 소월의 서정시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학생시절에 가장 많이 애송한 시들이다. ‘소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동경심으로 가슴이 설레는 것인데, 까마득한 시대의 인물로 생각했던 소월시인의 유일한 혈육이 서울에 있다는 소식은 신기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김정호 씨는 성품이 조용하고 온화해 보였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종 표정이나 감정의 동요없이 차분하게 묻는 말에 대한 대답만을 해주었다.



소월 선생의 아드님이 서울에 살고 계시다니, 다들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버지가 누구라고 소문낼 틈도 없이 먹고 살기에 바빴어요. 그래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서 어려울 때 도와주셨어요.


어떤 분들인데요?

아주 힘들게 살 때 내가 누구의 아들인 줄 아시게 된 서정주 구상 박종화 선생님들이 이효상 국회의장께 부탁을 해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지요. 국회 경비실에 취직이 되어 11년 동안은 그럭저럭 살았지만 아내가 결핵성관절염으로 쓰러져 치료비 때문에 퇴직금을 타려고 그만 두었어요.


고생이 많으셨군요.

건축 공사장 노동도 하고 연탄배달도 하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다 했어요. 도둑질 하고 남을 속이는 것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었지요.


소월시인의 몇째 아드님이신가요? 다른 가족 분은 어디 사세요?

내가 4남 2녀중 끝에서 둘째입니다. 모두 전쟁 때 내가 집을 떠나면서 헤어졌고 6.25전 남쪽으로 온 누이가 천안에서 사셨으나 별세하고 이곳 남쪽에는 이제 혼자뿐입니다.


언제 서울로 오셨습니까?

전쟁이 날 때 내 나이 19살이었지요. 여름에 인민군에 강제 입대해 그 해 10월 평안남도 양덕에서 유엔군에 귀순하면서 혈혈단신이 되었고 그 후 서울서 살게 되었어요. 젊을 때는 국군에 복무하기 위해 혈서지원까지 하고 지리산 공비 토벌군에서도 활동했어요.


북쪽 고향에는 아직도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겠군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형제가 많아서 살아 있을 겁니다.


어릴 때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버지가 살던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아버지의 외갓집 이웃 동네가 되는, 나의 외가이며 아버지의 처가 동네인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이사를 해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외가인 서산면 왕인동에서 출생해 본가인 남단동에서 자라셨지요. 아버지는 내 나이 세 살 때 별세하셨으니 내 어릴 때 아버지와의 기억은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것들이 전부입니다. 돌아가시기로 작정하신 아버지가 곽산에 있는 조상어른들의 산소를 찾아 제례를 올리고 떠나셨다고들 하지만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들려주지는 않았지요.(소월 시인은 서울에서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둘러본 뒤 시장에서 사온 다량의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진다)


소월 시인은 가족을 몹시 사랑했다는 이야기, 부부 금슬이 남달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14살 때 맞아들인 어머니는 미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무척 사랑했습니다. 어머니(남양 홍씨)가 한 살 연상이었는데 심성이 깊고 너그럽기가 바다 같은 분이셨습니다. 6남매를 낳고 돌보는 동안 아버지는 서울과 동경으로 유학생활과 작품 활동을 하시며 집을 비웠지만 조금도 불만 없이 자식들과 어른을 뒷바라지 하며 사셨어요. 한동안 고향 곽산에 사실 때는 어머니에게 술을 권하고 가르쳐 대작을 하시며 말벗으로 삼아 외로움을 푸셨다고 해요.



아버지의 고향 곽산은 정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고장이었다지요?

맞습니다. 봄이면 산이 온통 붉게 물들었어요. 그곳 능한산 남쪽 줄기 끝에 남산이 있고, 그 남산봉 냉정골에는 이름없는 폭포가 있습니다. 사시장철 주옥같은 물길이 사송강(泗松江)으로 흘러흘러 갔지요. 서해 바다도 멀지 않고 정주로 이어지는 철로변 산기슭은 모두 진달래가 곱게 물드는 산골이었지요.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아름다운 산천에 묻혀 성장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었던 아버지가 왜 서른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생존기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이긴 했지만 남긴 시마다 또 애절한 정서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 할아버지(소월의 부친 김성도)가 금을 캐는 광산도 하고 토지도 많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나 철도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정신이상자가 되면서 집안이 슬프게 변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였으니 성장하면서 성격이 좀 어두웠던 것 같아요.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자랄 때부터 친구가 별로 없었고 산 위에 있던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온 후 가장 마지막에 홀로서 내려왔다고 해요.



소월 시인은 그 자신의 가정환경도 우울했지만 시대적으로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시작활동을 하던 말년은 일제의 의해 모국어가 말살되던 수난기였다. 3.1운동으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한 소월은 1920년대부터 <창조>지 등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25년에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에는 동경대 상과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그해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8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가 고향 곽산으로 돌아가 사망한 지 5년 후 스승 김억에 의해 <소월시초>가 발간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가족이 있고 자신의 꿈을 키우던 고향 산천을 좋아해 자주 낙향했다. 1924년에는 조부의 광산일을 돕기도 했고 1926년 구성군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한 시기도 있었다.



지금 가족 분은 어떻게 되세요?

28살 때 결혼한 아내(염경자 / 당시 45세)와 스무 살, 스물 두 살 된 딸이 있습니다. 살고 있는 봉천동 집도 친구네 집이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서 사는데 큰 걱정은 없어요.


아버지를 대신해 훈장을 받으신 소감은 어떠세요?

어릴 때 우리 고향 동네에 살며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 분이 정자나무 밑에서 장기를 두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하더군요. 그냥 그립지요. 아버지 얼굴은 기억 안나지만... 살아 계신다면 일흔아홉이신데 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산소 앞에 가져가 올려드려야지요. 그냥 고향 생각밖에 나는 게 없네요. 어머니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김정호 씨의 아버지인 소월 시인은 1934년 12월에 떠나셨으니 2008년 12월로 74주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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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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