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에 담긴 활자들이 천지수의 몸과 기억과 희망을 만나 씨앗으로 응결되면, 화가는 그 작은 것을 캔버스에 심고 붓과 물감으로 키워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다. 독서를 통해 창조적 영감을 얻는 실험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책 읽는 천지수 화가의 ‘페인팅 북리뷰'는 그 대답 중 하나다. 스무 번째 책은 '사랑과 혁명'(김탁환 저/해냄)이다.
인터뷰365 천지수 칼럼니스트(/화가·서평가)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혁명이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 ‘사랑과 혁명’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어지는 그의 주문은 흔들림 없이 담대하다.
“흔한 사랑이 아니라 압도적인 사랑, 예측 가능한 혁명이 아니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혁명.”
김탁환 작가는 역사 소설가로 유명하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18세기 말 영조와 정조 시대를 그렸던 그에게 19세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늪처럼 앞에 놓였다고 한다.
‘사랑과 혁명’은 1827년 천주교를 탄압했던 정해박해의 이야기다. 곡성과 섬진강 일대에 자리한 공동체 ‘덕실 옹기촌’을 주된 배경으로 사랑과 혁명의 역사가 피어오른다. 작가는 섬진강 들녘으로 삶의 터를 옮겨 논밭을 일구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사랑과 혁명’을 집필했다.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던 감옥 자리 옥터 성지에 세워진 곡성성당의 종소리는 역사의 뚫린 구멍을 충실히 메워주기 위해 울렸을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다는 소설의 인물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마태오 복음서 5장 43~44절
‘사랑과 혁명’은 ‘일용할 양식’, ‘천당과 지옥’, ‘나만의 십자가’라는 소제목으로 원고지 5,500매 분량으로 총 3권을 이루는 대작이다. 1권의 맨 앞장에 있는 마태 복음서의 성경 구절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참 어려운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원수를 내 몸같이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적이라도 일어날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 메시지는 기적적인 사건과 함께 증명되기도 한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동네 거지로 생활하던 장구는 친구 들녘을 괴롭히던 봉식의 시신을 웅덩이에서 건져내면서 몸이 낫게 되는 기적을 겪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용기가 없어도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기적들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들녘은 7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다른 논보다 항상 두세 배 많은 나락을 거두었는데, 비결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신의 손길이 들녘의 논에게만큼은 특별하게 보살폈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기적을 경험하게 했다. 우리가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할 일은 많지 않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보면, 태어난 것도, 살아 있는 것도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원수의 시신을 건지는 것부터 벼라는 생명들을 칭찬하는 것까지 이웃사랑의 범위는 깊고도 넓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곱씹어 본다.
200년 전, 엄격한 신분제도의 조선에서 금하는 신(神)인 천주를 알게 되고, 양반과 천민이 형제자매가 되어 옹기촌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어떤 빛을 보았던 것일까?
나는 캔버스를 펴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서로 잡고 있어야 표현이 되는 화면을 만들고 싶어졌다. 거즈붕대를 소재로 맞잡은 손처럼 얼기설기 엮어서 나름의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옹기를 만들기 가장 좋고 ‘무지개흙’이라고 부르는 ‘오색토(五色土)’ 색깔을 표현해 본다. 무지개 흙의 특징은 다섯 색깔이 섞여야 하고, 살아 꿈틀대는 동물들이 내는 빛깔처럼 선명해야 한다. 꼭 이상적인 세상의 상징 같다.
오색을 구분하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빛이 있다. 함께 섞이면 더 커지는 빛! 작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히 필요한 것이 ‘사랑과 혁명’이라고 한다. 들녘이 벼 이삭들에게 건넨 칭찬 같은 사랑처럼, 자신의 빛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도 혁명의 시작일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사랑’의 첫 단계는 그렇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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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 칼럼니스트
화가이자 서평가. 대학에서 회화과를 졸업한 후 로마국립미술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3년 '지오반니 뻬리꼬네' 이탈리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2008년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건너가 세랭게티 국립공원 내 암석벽화 복원작업에 참여했다.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주이탈리아 로마 한인성당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책읽는 아틀리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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