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365 편집자주]
■ 먼지가 가라앉은 뒤 (루시 이스트호프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25)
삶은 우리를 종종 불안하게 만든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나쁜 소식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한다. 나 역시 혼자 잠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악몽에 놀라 깨어나는 밤이 적지 않았다. 괜찮다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등을 토닥여주던 손길은 부모에서 친구로, 연인으로, 상담사로 이어졌지만 마음 한편의 불안은 늘 남아 있었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들이 마음의 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난은 평온했던 삶에 태연히 들이닥친다. 루시 이스트호프 역시 여덟 살에 처음 재난 현장을 목격하고, 그때 들은 아버지의 “누구든 해결을 해야지”라는 간절한 외침을 잊지 못해 재난 복구 전문가가 되었다. 재난 전문가라고 해서 예기치 못한 비극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잠시나마 ‘재난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20년 넘게 현장을 지켜왔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가장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감싸는 “초대형 붕대”처럼 말이다.
9·11 테러부터 팬데믹까지 수많은 현장을 지나온 저자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재난 직후에는 그 상처가 언젠가 아물거나 잊히리라고 상상하기 어렵지만, “삶은 저 나름의 속도로 꿋꿋이 나아가고 우리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우리는 결국 다음을 바라볼 수 있다. 연이은 참사에 숨 고를 틈을 찾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위로를 건넨다.(이솔림/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연루됨 (조문영 지음, 글항아리, 2024)
중국인과 비중국인, 여성과 남성, 노인과 비노인, 정규직과 비정규직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혐오로 금을 긋는다. 더러워서, 병을 옮겨서, 폭력적이어서, 위험해서… 각종 편견을 뒤집어쓴 ‘이유’로 그어지는 금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영역은 점점 더 좁아져만 간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함께하지는 못하는 지금, 다가올 미래에 과연 나는 ‘우리’에 속할 수 있을까?
'연루됨'은 산산조각 나 삿대질하는 우리 사회의 면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분노와 혐오로 박살난 사회의 미세하고도 빽빽한 결들을 놓치지 않고 이 책에 수록했다. 인류학자로서 조문영은 쉬운 선택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금이 간 사회의 결들이 어떻게 연루되는지를 낱낱이 읽어냄으로써 세상의 결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밀도 있게 묘사해 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밀도 높은 기록 속에서 쉽게 서로를 밀어냈던 개인의 삶들이 다시 연결될 실낱같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제 세상은 끝장이라고 생각한 당신에게, '연루됨'을 권한다.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킨츠키 공예처럼, 우리 사회도 다시 이어 붙여져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따뜻한 믿음의 불씨를 품게 될 것이다.(황예린/출판마케터·문화비평가·비평연대)
■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후안옌 지음, 문현선 옮김, 윌북, 2025)
최소한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까지, 평생 몇 가지의 직업을 경험하게 될까. 물류센터 야간 상하차, 택배 배달, 주유소 직원, 만화 대본 원고 세탁… 20년 동안 무려 19가지 일을 거쳐 간 사람이 있다. 저자 후안옌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터로 향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실망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겪었다. 단지 화가 날 일이 아니었음에도 누군가에게 쌓여 있는 분노를 쏟아내기도 했다.
“나는 가축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채찍 아래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노동을 꾸미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어떤 순간에서는 내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결국 우리가 일과 삶 속에서 어떻게 주체성을 찾아야 할지 묻는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길 바란다면, 치열한 전쟁터 같은 일터 속에서도 삶의 품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건네고 싶다.(배희주/출판마케터·비평연대)
■ 잔소리 약국 (김혜선 지음, 도마뱀, 2025)
김혜선의 '잔소리 약국'은 최근 한국문학이 집중하는 ‘돌봄’, ‘여성의 일상’, ‘가족 관계’라는 세 축을 약국이라는 좁은 공간에 응축시킨 작품이다. 거창한 서사 대신 ‘일이 된 삶’과 ‘삶이 된 일’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정직하게 포착해내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돌봄'은 이 작품 속에서 희생이나 미담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약사인 어머니와 프리랜서인 딸이 함께 지내는 2년 11개월은, 누가 누구를 돌보는가를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시간'이다. 돌봄이란 역할의 문제가 아니라 거리의 기술이며, 이 책은 그 기술이 실패하고, 또 회복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여성의 일상’을 진부한 정서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약을 정리하고, 셔터를 올리고, 손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반복적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일상의 노동이 단지 생계의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의 시간을 구성하는 구조적 배경임을 보여준다. 약국은 곧 어머니의 세계이자, 딸이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타인의 삶이다.
모녀 간의 갈등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생활의 마찰’로 드러나며, 작가는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감상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습관과 말투 속에 축적된 세월이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잔소리 약국'이 갖는 문학적 위치는 이 지점에서 선명해진다. 이 책은 최근 문단에서 강조되는 돌봄 담론의 정조를 따르지만, 그중에서도 ‘돌봄의 실제적 노동’과 ‘여성의 일상’을 외면하지 않고 촘촘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사적 돌봄’이 아니라 ‘현장적 돌봄’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 작품의 중요한 차별점이다.
결국 '잔소리 약국'은 거대한 명제를 큰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의 삶을 오래 지탱해온 노동과 정서, 그것을 우리가 한동안 바라보지 않았던 풍경이었다는 것을, 아주 조용히 확인하게 만든다. 시종 소소한데, 예리하게 가슴을 베는 바로 그런 이야기다.(김성신/출판평론가, 비평연대 가디언즈)
■ 절창 (구병모 지음, 문학동네, 2025)
절창(切創). '칼이나 유리 조각 따위의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를 뜻한다. 이 책은 타인의 상처를 만지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의 작중 이름은 '아가씨'. '보스'라 불리는 이로부터 철통 호위를 받으며 교외의 저택에 갇혀 지낸다. 소설은 이 수상한 저택에 아가씨의 독서교육을 담당할 입주 튜터로 40대 여성 '나'가 들어오며 시작된다.
'나'는 소설의 화자로, 소설 내내 아가씨와 보스를 관찰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좇는다. 알 수 없지만 지독하게 얽힌 것이 분명해 보이는 둘.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는 '나'. 미스터리 스릴러로 시작됐던 책의 장르는 책장을 넘길수록 지리멸렬한 순애를 그리는 '사랑 이야기'이자, 책 그리고 사람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구병모식 '읽기론'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스 신화와 셰익스피어 등 수많은 고전이 소설에 콘텍스트로 깔려 있어, 고전을 좋아한다면 이 책의 깊이감에 한없이 충만해질 수도 있다.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읽기'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모순을 파헤친다.
"한 명의 사람을 한 권의 책 대하듯 다각도로 읽어야 인생이라는 이름의 위기를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감당할 수 있을 거란다. (…) 그러니 우리는 불이해 혹은 오해를 이해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고작이야."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읽었다" 말하는 일이 얼마나 허풍 같은 일인지 깨닫게 된다.
불이해와 오해가 관계의 다른 이름이라면, 사랑은 무엇일까.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남긴다. 오해가 관계에 무수한 절창을 내도 그 가닿을 수 없는 이해 쪽으로 눈 감고 전진해 보는 일이 사랑일까? 소설이 남기는 질문에 나만의 대답을 오래 생각해 봐야겠다. 그래야 이 책을 진짜 "읽었다" 말할 수 있을 듯하다.(김상화/출판편집자·비평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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