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정'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연극 '아트'
우리가 '우정'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연극 '아트'
  • 주하영
  • 승인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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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 풍경]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연극 '아트(ART)'
연극 '아트' 주역들. 엄기준, 최재웅, 최영준, 김재범, 박은석, 정상훈, 박정복, 장격수, 김지철 등 초호화 배우들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서로의 영혼을 격려하고 존재의 깊이를 나누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우정’으로 유명한 ‘몽테뉴’와 ‘라 보에시’.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 완성의 극치는 우정”이며, “인간의 자유의사가 만들어 낸 관계 중 ‘우정’만큼 합당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친구 라 보에시를 잃은 후 평생 동안 그와의 우정을 그리워했던 몽테뉴는 그와의 ‘우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누가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그였고 그것이 나였기 때문이다’라고 밖에 달리 대답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공동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여러 관계를 통해 ‘교제’를 나누고 삶 속에서 ‘애정’을 쌓아나간다.

몽테뉴는 인간이 맺는 관계를 부자관계, 형제관계, 연애관계, 우정관계로 나누며 핏줄로 연결된 ‘가족’ 관계와 격렬한 욕망에 의해 이끌리는 ‘연애’ 관계를 제외하면, 인간이 맺는 관계 중 가장 ‘따스한 관계’는 분명 ‘우정’ 관계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친구 간의 분쟁은 왜 생기는 것이며, ‘우정’은 왜 깨지는 것일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들 간에 분쟁이 생기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생각한 친애 관계가 실제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친애 관계는 서로의 변화로 인해 소원해질 수 있으며, 서로가 다른 ‘기대’를 품을 경우 깨질 수 있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같은 것에 공감하지 않고 같은 것에 기쁨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들이 함께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 '아트' 콘셉트 컷. 배우 박은석, 엄기준, 박정복/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는 “해외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프랑스 연극”이라 평가받는 야스미나 레자의 1994년 작품 ‘아트(ART)‘가 공연 중이다.

지난 겨울공연에 이어 다시 선보이는 연극 ‘아트‘는 15년간 우정 관계를 지켜온 세 사람이 “하얀 바탕에 하얀 줄이 그려진 그림”과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 ‘심오한 것’을 파고드는 극작가로 알려진 야스미나 레자는 2015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극 스타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소함은 심오함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다. 인간 삶의 드라마는 커다란 비극적 사건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레 발생하는 비극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삶은 작고 디테일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사소하고 소소한 사건들이 존재의 투쟁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현대인의 마모된 삶’을 드러내기 위해 생활 속에 발생하는 ‘별 것 아닌 문제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비이성적인 행동과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자신 또한 상처 입도록 만드는지를 추적한다.

어느 날, 친구 세르주가 화랑에서 2억을 주고 구매한 ‘그림’은 마크의 심경을 건드린다. 그는‘하얀 바탕에 하얀 줄이 그려진’ 그림을 유명 화가의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세르주를 이해할 수가 없다.

마크는 비아냥거림과 비웃음 섞인 농담으로 세르주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크의 거슬리는 태도에 세르주는 오만함과 시니컬함으로 반응한다. 세르주의 잘난 척과 가식을 참을 수 없는 마크는 공격적으로 변하고, 세르주는 마크를 자극할 말들을 점점 더 서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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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트' 공연 장면. 배우 박은석, 김지철, 최영준/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결국 두 사람은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 이반을 사이에 두고 영역 싸움을 벌인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반을 향해 온갖 비난과 불만을 쏟아내는 두 사람을 참다못해 이반이 소리친다.

“오랜 친구 사이에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 그 모양이냐?...너희 둘 다 너무 추해. 나와 이본느 같다. 세상에서 가장 병적인 관계!”

이반은 마크와 세르주의 관계가 자신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새엄마 이본느와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가까워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엮여있는 매우 ‘불편한 관계’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15년 동안 우정을, 아니 ‘교제’를 이어온 친구이다. 두 사람은 왜 서로를 증오하고 공격하면서까지 만남을 지속해온 것일까? 그리고 애초에 ‘하얀 그림’은 왜 문제가 된 것일까?

야스미나 레자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연극 ‘아트‘가 “우정이 깨지는 것을 다루는, 관계의 파열을 그린 ‘비극’”임을 강조한다. 그녀는 ‘웃음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관객들이 웃는 방식이 연극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왼쪽 위부터 엄기준, 최재웅, 최영준, 김재범, 박은석, 정상훈, 박정복, 장격수, 김지철
연극 '아트' 주역들. 왼쪽 위부터 엄기준, 최재웅, 최영준, 김재범, 박은석, 정상훈, 박정복, 장격수, 김지철/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분명 연극 ‘아트‘는 재미있다. ‘하얀 판때기’라 불리는 그림을 둘러싼 세 사람의 좌충우돌과 별 것 아닌 일이 점점 더 큰 갈등을 불러오는 방식은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사건은 소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고, 무대 위 인물을 향해 공감과 비난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구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의 기능도 발휘한다.

연극이 “사회를 비추는 날카로운 반영”으로서 인간 본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스미나 레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본성은 추하다.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매일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수정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멍울진 영혼들과 위축된 마음, 시들어가는 육체”로 인해 어느 순간 ‘괴물’로 변해버릴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아트‘는 관객들이 자신들의 내면 어딘가에 숨 쉬고 있을지 모를 ‘추악함’을 찾아 ‘괴물’이 되지 않도록 단련할 수 있는 극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연극 ‘아트‘는 ‘우정’이 어떠해야 한다는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관계’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 수용, 거부와 같은 문제들을 노출함으로써 관객들이 스스로 ‘우정’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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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트' 공연 장면. 배우 엄기준, 정상훈, 장격수/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연극 ‘아트‘에는 현대인의 삶에 찾아온 소외와 스트레스, 존재 그 자체로 수용되지 못하는 관계에서 느끼는 좌절과 분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이 가득하다.

우리가 삶에서 친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르주가 바란 것은 그가 ‘하얀 판때기’로 보이는 그림을 2억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구매하는 바보짓을 했다 할지라도 그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이해하려는 친구의 ‘노력’이었다.

마크가 바란 것은 친구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던지는 자신의 독설이 ‘충고’임을 이해하고 수정하는 친구의 무조건적인 ‘수용’이었다.

이반이 바란 것은 그의 복잡한 가족 관계가 아무리 스트레스를 준다 할지라도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그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로’와 ‘안식’이었다. 세 사람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을 바라지만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들은 모두 친구가 자신을 보듬어 주기를, 자신의 어리석은 행위와 오만함, 우유부단함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마크는 변해가는 세르주를 되찾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에게 우월감을 선물하며,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었던 과거의 세르주를 원한다. 그가 상실한 것은 ‘친구’가 아니라 스스로 대단하다 여겼던 ‘과거의 자신’임에도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존감과 확신을 세르주를 통해 되찾기를 바란다.

그는 세르주가 앞서 나가는 것이,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버리는 것이 싫다. 그래서 그는 세르주를 공격한다. 그를 무릎 꿇게 만들고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싶다.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확신을 되찾고 싶다.

세르주는 마크의 ‘의도’를 느낀다. 그는 마크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는 마크가 유머를 가장한 채 자신의 취향을 무시하고 자신을 비웃으며 자신의 성공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갤러리에서 그림을 구매하는 능력으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평가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피상적인 삶에 지쳐있다. 그는 자신이 파산할 지경임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매한 ‘하얀 그림’을 마크가 그냥 지나쳐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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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트' 공연 장면. 배우 최재웅, 김재범, 박정복/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그는 마크가 자신의 삶을 꼬집어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거짓된 ‘허상’과 같은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자신을 지켜주기를, 모든 불편함을 감싸주고 모르는 척 눈 감아 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 관계에서 혼란스러운 충돌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 친구라는 이유로 상대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확신, 내가 아직 그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자신감, 그와 나 사이에 우월한 고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할 때 우리는 친구의 진정한 의미를 잊는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이해, 적극적인 배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위로, 안식과 인내... 이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면 사실상 우리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필요치 않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두 사람은 이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반은 두 사람이 왜 서로를 강제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친구란 자신의 모든 속내와 고민을 털어놓고, 어떤 바람이나 요구, 기대치에 구속되지 않은 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새엄마와 아버지, 친모와 약혼녀 사이에서 끊임없이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에 동조하고 자신을 움직여야 하는 이반으로서는 그저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의논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할 뿐이다.

자크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학‘에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라는 말이 타자를 진정으로 대면하고 포용하지 못한 채 홀로 남겨진 슬픔의 상황을 대변한 것이라면, 마크와 세르주, 이반은 ‘하얀 판때기’로 보이는 그림을 통해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부름에 새롭게 응답한다.

연극 '아트' 콘셉트 컷. 배우 김지철, 최재웅, 김재범/사진=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세르주는 마크와의 관계가 여전히 중요함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하얀 그림’을 희생한다. 그는 마크의 손에 ‘지워지지 않는 펜’을 쥐어주며 ‘하얀 판때기’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한다. 그의 ‘호의’는 “친애의 시초”가 된다.

마크는 자신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세르주를 바라보기 위한 노력에 돌입하고, 이반은 ‘체험기간’을 통해 자신들의 관계를 재정립하기로 한 두 사람을 당분간 지켜보기로 한다.

세르주는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관계’를 풀어낼 요량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청한 자신의 속내에 사실은 ‘거짓된 속임수’가 있었음을 관객들에게 고백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정’은 희망적이다.

친구는 함께 하거나 함께 하지 않는 존재이지, 소유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호혜로운 관계, 핏줄도 욕망도 아닌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리는 관계인 ‘친구’는 가장 좋은 거울이며, 가장 훌륭한 가림막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친구는 ‘선택할 수 있는 관계’이다.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거나 인내하거나 인내하지 않거나 만나거나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친구란 관계는 가장 가깝고 끈끈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멀고 느슨할 수 있는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베풀어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친구에게서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친구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다른 관계가 줄 수 없는 이해와 사랑, 격려와 지지, 그리고 따뜻한 미소와 수용, 인내가 아닐까?

세 친구들이 쏟아내는 감정의 밑바닥을 통해 자신의 ‘우정’을 점검하고 싶다면 연극 ‘아트‘를 통해 확인해봄이 어떨까? 11월 4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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