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한방 명의 60년' 원로 한의사 손수명 박사
[김두호가 만난 人] '한방 명의 60년' 원로 한의사 손수명 박사
  • 김두호
  • 승인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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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준 선물 한의학’ 펴낸 손수명 한의사
- 60년 임상진료 비방공개 현대판 동의보감
60여년간 한의사의 길을 걸어온 한방명의 손수명 박사. 25살에 한의사가 된 그는 소위 '용한 한의사'로 성공한 의료인의 길을 걸어왔다. 학업에 대한 식지않은 열정으로 만학도의 길을 걸으며 50대에 미국 LA 사우스베일러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땄다. "나의 환자는 곧 가족이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그에겐 오래도록 가족처럼 정을 나누며 살아온 환자들이 많다. 그는 지역 노인회와 출산산모 돕기 후원활동에 앞장서고 또 주민들의 소망인 고등학교 설립 추진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치유 처방의 정보를 담은 '신이 준 선물 한의학'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60여 년을 두고 ‘한방 명의’(韓方 名醫)가 경험한 처방, 치료비방 및 환자들과 나눈 희로애락의 비화는 어떤 내용일까? 최근 <현대판 동의보감 임상사례집 – 신이 준 선물 한의학>을 펴낸 원로 한의사 손수명(1936∼ 동진한의원 원장) 박사가 출판계 화제의 인물로 시선을 받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건강정보가 소중한 시기에 한의사와 각종 난치병 환자는 물론 건강을 생각하는 일반 독자들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게 한 책이다.

24살 때 한의사가 된 손 박사는 서울 창신동 원주민이다. 태어나 살던 창신동 집을 동진한의원으로 개원한 뒤 일생동안 진료일 대다수 하루 평균 1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며 ‘용한 한의사’로 살아왔다. 그곳에서 50년을 보내고 경기 양평군 서종면 외가 동네에 오래전 준비해 둔 100만㎡ 규모 땅을 자연농원을 겸한 한방종합치유센터로 조성, 한의원을 옮겼다. 꿈꾸던 이상향을 찾아 추억의 마을로 이주한 것이다. 그곳에서 대물림 한의사가 된 장남 손승현(51) 씨가 합류해 함께 환자를 보고 있다.

1962년 경희대 한의과 졸업 후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10년 지나서 구안괘사(눈과 입이 비뚤어지는 증상), 안면신경마비의 한의학적 연구로 모교에서 석사, 1988년에는 미국 LA 사우스베일러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획득한 만학의 이면에는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룬 의지가 학업에 대한 열정을 식지 않게 했고 더불어 한의원 개업 초기부터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학업 기회가 늦어진 사연이 따른다.

신체장애의 결함을 떨쳐버리고 성공한 한의사의 길을 착실히 헤쳐 온 손 박사는 “나를 찾아온 환자는 나의 가족”이라는 남다른 인간미의 직업관을 가지고 있다. 불신이나 불만을 드러내는 환자들도 감동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는 진료로 오래도록 인연을 나누는 환자들이 많다. 근래에는 진료와 함께 건강강좌, 한의학 분야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지역 노인회와 출산산모 돕기 후원활동에 앞장서고 또 주민들의 소망인 고등학교 설립 추진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아내가 된 환자와 러브스토리

- ‘신이 준 선물 한의학’ 저서 서문에 서관석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김우식 전 연세대총장 등 명사들이 저자의 한의술을 예찬하고 있다. 전혜정 전 서울여대총장은 서문에 12년을 두고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침구치료를 받은 고백도 했다. 오래도록 인연을 나누어 온 환자는 대충 어느 정도인가?

"환자분 숫자를 헤아려볼 경황도 없이 살았다. 한의원 환자는 대개 치료 효험을 본 분들이 세월을 두고 찾아오신다. 그래서 한의사는 예부터 환자 입소문으로 새 환자를 많이 맞이한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환자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다 보니 새파란 20대 청년이 이토록 팔순이 되도록 세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오래도록 가족처럼 정을 나누며 살아온 환자들이 많다."

치료 중인 한의사 손수명 박사. 

- 지금은 세계인류가 신종 바이러스 감염괴질의 창궐로 두려움의 터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한방 의료계는 비교적 조용하게 극복해 가는 것 같다.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으니 예외가 될 수 없다. IMF 때도 모두가 어려웠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오면 환자들이 많아 어려운 걸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고 나만 괜찮다고 경솔하게 대답한 것을 후회하며 살았다. 지금 모든 분야가 어렵고 모든 사람들이 힘들다. 나는 어려울 때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시집살이가 죽도록 힘들 때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 마음을 고쳐 잡았다고 하신 말씀이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오래전 사별했다. 그녀는 난치병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밝은 얼굴로 떠났다. 평온하게 맞이하는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작별이다. 아내의 가는 길을 막지 못하면서부터 교회를 찾게 되었다. 생전에 아내 앞에서 힘들면 스피노자가 남긴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다짐하곤 했다. 인간의 과학이나 의술이 부족함을 느낄 때가 지금 같다. 그저 성경에도 있지만 모두 지나갈 것이다."

- 별세하신 부인의 난치병이란 어떤 병인가? 남편이 용한 한의사인데...

"30년 전이다.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위축성측색경화증(ALS)이었다. 근육이 위축, 운동신경이 파괴되는 질환이다. 병명이 밝혀지고 3년 시한부로 진단이 났지만 10여 년을 더 살았다. 아내와 인연이 되기까지는 드라마 같은 사연이 있다."

- 저서에서는 러브스토리를 비공개로 돌렸다.

"총각 한의사로 인기가 있던 시절에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 환자가 아니라 딸을 둔 부모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때 의식불명이 된 응급환자 발생 신고를 받고 달려간 집의 환자가 다소곳한 용모의 처녀였다. 그녀는 나의 침술치료로 깨어난 뒤 꾸준히 치료를 받았다. 그런 과정에 마음씨 착하고 차분한 매력의 여자라는 점을 알고 내가 먼저 청혼을 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멀쩡한 사람도 많은데 왜 환자와 결혼하느냐고 반대했지만, 설득을 시켜 아내로 맞이했다."

치료 불가능의 난치병은 없다

- 손 박사의 저서는 난치병의 학술적인 이론이나 원인 분석보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질병에 따라 치유 처방의 정보가 될 수 있도록 경험담을 모아 공개했다. 대체로 위중한 병은 의사와 환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치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 군데군데 강조되고 있다. 그게 한방 의료의 특징 같기도 하다.

"맞다. 자르고 제거하고 이어주고 약물, 방사선 등으로 신속성 있게 치유하는 서양의학에 비해 환자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 처방약제와 침술 중심으로 치료하는 한의학은 차이가 있다. 대체로 많은 병은 음식섭취나 신체활동의 관리 잘못으로 예고 없이 발병하는 급성 질환이 아니면 조금씩 증세가 발전해온 만성질환이 많다. 흔한 난치병 중에 중풍, 당뇨병, 암, 결핵성척추염, 퇴행성관절염, 알코올중독, 경피증과 관련된 임상사례를 책 앞머리에 소개했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일화는 역시 중풍 쪽에 많다.

중풍은 한방의 치료처방도 다양하고 전래된 민간요법도 많다. 예를 들면 한의대 시절 외가 쪽 어른이 중풍으로 고생 중에 독성이 있는 야생초 초오를 달여 먹고 완쾌된 것을 보았다. 실제 초오 20g 정도를 북어 한두 마리의 배에 넣고 실로 동여맨 후 약탕기에 달인 뒤 식은 상태로 조금씩 복용하면 효과가 있지만, 초오를 쓸 때는 한의사와 상의를 해야 한다.

한방의 치료 처방은 동의보감 등 전래 한의서가 교본이지만 한의사의 임상경험이나 발견, 연구, 분석, 판단에 따라 치료방법도 다를 수 있고 차이가 있다. 목적은 오르지 치유에 있다. 의사의 의술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환자의 적극적인 치료 의지가 기적을 낳기도 한다."

진료 중인 한의사 손수명 박사./사진=손수명 제공

- 한방 치료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침술과 관련된 치료 일화들을 많이 들었다.

"많은 환자 중에는 의사를 마음 편하게 하는 분도 있지만, 빚 독촉하듯이 보채고 불안하게 하는 환자도 있다. 어느 해 당뇨병과 중풍 합병 증세로 발에 괴사병이 나타나 침 치료를 받으러 온 노 환자가 있었다. 이미 엄지발가락이 괴사되어 절단한 처지에 다른 두 발가락도 새까맣게 썩어가 절단을 앞두고 있었다. 병원에서 다리까지 절단할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받은 그 환자는 간곡하게 침구치료를 요구했다.

나는 환부상태로 보아 침의 효력이 미칠 수 없고 오히려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환자는 단호하게 결과에 항의하지 않을 테니 시원하게 침을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고집에 굴복한 나는 침술치료를 시작했다. 괴사 부위에 시침하고 반대편 족삼리혈과 예풍혈에 유침을 하였다. 신기하게도 며칠 만에 발가락 피부색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해 마침내 완치의 결과를 나타냈다."

한의사 손수명 박사와 아버지에 이어 한의사가 된 장남 손승현씨./사진=손수명 제공
한의사 손수명 박사와 아버지에 이어 한의사가 된 장남 손승현씨./사진=손수명 제공

- 치유 일화 중 아드님이 응급환자가 되었을 때 응급 처치한 이야기도 남다르다.

"유학 후 귀국해 직장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 회사 목욕탕에서 머리를 크게 다쳐 지주막하 출혈로 의식을 잃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사고가 있었다. 달려가 보니 고통으로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당시 의약분업 농성으로 병원 응급실이 마비상태였다.

나는 한의사 아버지임을 밝히고 심한 두통환자나 뇌출혈로 위급한 환자 치료에 효과를 본 침술을 시도했다. 코의 중격에 사혈하는 침술로 고통을 진정시켜 의식을 되찾게 했다. 이어서 웅담 사향 우황 각 1품씩 물에 개어 복용케 하고 당귀수산에 청상견통탕을 합방한 첩약을 달여 기운을 되찾게 했다."

- 중풍에는 오리고기가 좋다는 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소상하게 밝혔다.

"중풍환자를 비롯해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오리고기가 좋다는 소문의 진위를 많이 물어온다. 한의서에도 오리고기는 찬 성질의 식품이지만 허약한 것을 보하고, 놀람을 가라앉히며 열로 팽만함을 소멸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오리 중에도 효과 면에서 집오리보다 물고기를 먹는 강오리가 좋다고 생각한다."

- 한의사의 길을 택하게 된 손 박사의 과거로 화제를 돌려보자. 소아마비를 겪은 뒤 거동이 불편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한 분야의 인정받는 의료인으로 성공한 입지전을 듣고 싶다.

"나는 한의사로 불편함을 모르고 활동해 왔다. 환자를 진료할 때 이동 폭이 크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동대문구 창신동은 불량끼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가끔 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만일 내 몸이 온전했다면 불량서클에 들어가 건달이 되었을 것이고 또 한의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신체적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엉뚱한 좌절의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말을 자주 한다."

- 한의원으로 간판을 달고 50여 년을 살게 된 창신동 집의 유래는?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군 호평동에서 농사일을 하셨다. 창신동은 고모님이 사셨는데 아버님이 등창으로 고생하며 치료차 서울 창신동을 오가시다가 이사를 오셨다. 속이 깊고 사랑이 깊은 어머님은 이곳에서 6남매를 낳으셨다. 남들이 자식 많다고 하거나 자식들까지 “또 엄마 배부르다”고 하면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시며 당혹한 표정으로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곤 하셨다."

- 한의학 전공은 스스로의 선택인가?

"나는 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것을 알았지 청소년기 젊은 시절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세월이었다. 심하진 않지만 달릴 수 없는 장애자의 설움들이 젊은 나의 꿈을 흔들어 놓았다. 내 이름이 원래 손정석인데 지나가는 스님이 병골팔자라 오래 살게 하려면 ‘수명’으로 바꾸라고 해서 어른들이 개명을 시켰다.

고3 때 조용히 산촌에서 사는 농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고 어머님은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한마디만 하셨다. 그럴 때 지역 유지인 동장 어른이 한의대를 권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1차 시험을 명문대 농대를 쳤다가 떨어진 뒤였다."

약보다 먼저 사랑이 명의(名醫)를 만든다

- ‘나의 환자는 곧 나의 가족이다’라는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는데.

"넉넉하게 사는 환자도 만나지만 병들고 가난해서 힘들게 사는 환자도 많다. 나는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라는 생각보다 몸이 아픈 환자에게 건강의 꿈을 심어주고, 외롭고 힘든 마음을 위로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처방을 소중하게 생각해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려고 노력해왔다. 천사가 될 수 없지만 그런 태도로 환자를 대하면 신뢰가 통하면서 금방 친해진다.

환자들은 잘 모르는 의사들에 대한 불신감이 잠재되어 있어서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쉽게 무시를 하게 된다. 한방치료는 인내심이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포기할 무렵에 효험을 본 환자도 많다."

-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너무 많다. 긴 세월을 두고 집안 가족의 주치의 노릇에 사업에 실패한 집안 살림살이까지 돌봐달라는 분도 있다. 연세가 많은 여성 환자 한 분은 불임치료를 해준 인연으로 시작해 가정불화, 집세도 못 내는 가난, 가족들의 난치 질병 치료를 끊임없이 호소해와 보호자처럼 도와드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원장님 살려 주세요”라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안면 경련증, 수전증, 틱장애, 체머리 같은 질환은 의사나 환자가 다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치료해야 한다. 어느 해 여러 병원에서 치료하던 구안와사증 여성 환자분이 찾아왔다. 안면경련증까지 합병된 그분은 완벽주의의 까다로운 환자라 침과 약제로 금방 만족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다행히 초기에는 좋아졌다는 느낌을 보여주다가 예상했던 대로 쉽게 완치가 되지 않게 되자 내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도 서로가 용케 견디며 해를 두고 치료한 결과 어느 날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건강이 회복되었다."

원로 한의사 손수명 박사./사진=인터뷰365

- 환자로부터 병이 완쾌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기억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일화라면?

"어느 날 낯익은 할머니 환자가 황급히 찾아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세 살짜리 손자가 모 종합병원에 입원해 3일째 의식불명이니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자신의 병도 내가 고쳐주었고 세상에서 제일 믿는 의사라면서 함께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듯 숨을 몰아쉬며 동행을 애원했다. 병원 중환자실로 가보니 아이는 숨만 쉴 뿐 의식이 전혀 없었다.

나는 비상 처방 약재로 오래전에 보관해 둔 바둑알만한 진짜 웅담의 일부를 긁어내어 물에 풀어 입안에 넣도록 했다. 그것을 마시고 얼마 후 몸이 요동치는 발작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되찾았다고 할머니가 흥분한 목소리를 전해왔다. 그런데 기운이 없어 몸을 움직이지를 못하니 또 어쩌면 좋겠냐고 치료를 요청해 왔다. 나는 3일쯤 지나면 회복이 될 거라고 말했는데 다행히 3일 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면서 사후 처방약제를 지어준 적이 있다.

그 할머니 가족과 나는 집안 가족처럼 오래도록 가깝게 지냈는데 한동안 소식이 뜸해져 걱정을 했더니 여동생 되는 분이 치료를 받으려 왔다가 언니가 혼자 절에 갔다가 심장마비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집안 가족이 떠난 듯이 허전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 대다수 가난하게 살던 시절은 치료비가 없어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 무렵은 의원이나 한의원 의사들의 미담도 많았다.

"그 시절 경기를 일으킨 환자, 급체 환자, 중풍환자 등 응급환자가 많아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 의료보험도 없던 때라 큰 병원은 문턱이 높아 심야에 한의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을 노크하다가 급하면 발로 차는 환자도 있었고 가족이 몰려와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특히 창신동 이웃 숭인동 산비탈은 판자촌 달동네였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영월 쪽을 바라보며 기도했다는 전설의 산동네는 가난한 환자들의 마을이었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나는 죽을힘을 다해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왕진을 다녔다. 약을 지어주고 치료를 하고 나면 치료비가 없는 환자도 많았다."

- 60여 년의 한방 치료의술을 통해 한의사로 체험하고 발견하고 느낀 일 가운데 특별히 밝히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의사로서의 시선으로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면 사방에 치료 방법들이 널려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부터도 효과적인 치유 방법이 나올 수 있고 스쳐가는 소문에도 학술이나 의서에 없는 비방이 있다. 어릴 때 할머니의 전래 요법이 난치병에 효험을 주기도 한다. 한번은 자주 오는 환자 한 분이 두드러기에 잘 듣는다며 어성초라는 풀 몇 포기를 들고 왔다. 생선 비린내가 나는 특이한 잡초다. 시험 삼아 기본 처방에 첨가해 조금씩 써본 결과 뜻밖에도 효과가 나타났다. 지금도 두드러기 처방에 활용하고 있다."

- 건강이 여의치 않은 환자들에게 한방 명의가 주고 싶은 한마디는?

"몸은 정신의 통제를 받는다. 강건한 마음은 강건한 육체를 만든다. 병이 있다고 고민하고 불안에 빠지면 증세는 오히려 악화된다. 지금 세상에 희귀한 몇 가지 질병 외에는 모두 고칠 수 있는 병이다. 병이 생기면 퇴치하고 반드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부터 가지고 편안하게 진료의사와 치유를 향한 호흡을 맞추어가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하고 싶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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