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60년을 무대에 서 온 박정자 대배우의 八旬(팔순) 셀레브레이션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60년을 무대에 서 온 박정자 대배우의 八旬(팔순) 셀레브레이션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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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와 열정에 관객 기립 박수
- 윤석화 연출의 동화 같은 웰메이드 연극 '해롤드와 모드'
팔순 기념 연극 '해롤드와 모드' 커튼콜 무대에 선 대배우 박정자. 한 평생을 무대와 함께한 팔순의 노배우를 향해 관객들은 뜨거운 환성과 기립 박수를 보냈다./사진=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올해 80세의 배우 박정자는 관객과 언론에 한 약속을 지켰다.

“여든살이 되는 생일까지 이 작품을 매년 공연하고 싶다”던 10여년 전 60대 때에 한 약속을 싱그런 5월에 황홀한 무대로 펼친 것이다.

서울 강남의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5월 1일 개막, 23일까지 공연하는 콜린 하긴스 작, 윤석화 연출의 연극 '해롤드와 모드'는 배우 박정자의 팔순 기념 무대로, 2일 초청공연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배우 박정자를 위한 축수연(祝壽宴)이었다.

팔순 기념 무대에 문화계 샐럽들 기립 박수

영상과 조명과 소품으로 꾸민 무대는 동화처럼 환상적인데다 70년대 귀에 익은 팝송 넘버들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객석에는 전직 장차관, 국회의원, 기관장, 문화예술 단체장, 연극인, 문인, 무용인, 음악인, 미술인, 언론인 등이 초청되어 ‘기념비적 무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코로나 이후 최대 규모의 문화계 샐럽들이 모였다.

신영균, 이순재, 오현경, 백수련, 강부자, 최불암, 안성기, 김동호, 김용원, 김종규, 장사익, 양희은, 노경식, 이근배, 전무송, 이승옥, 오영수, 권병길, 손진책, 윤호진, 한태숙, 정동환, 손봉숙, 오지철, 양희은, 양희경, 유태균, 김성노, 이호성, 유희성, 윤중강...(존칭 생략, 필자가 인사했거나 본 분들)

사진=신시컴퍼니
연극 '해롤드와 모드'./사진=신시컴퍼니

나비처럼 가벼운 팔순 배우의 중저음 매력과 사랑스런 연기

자살을 꿈꾸는 19세의 청년 해롤드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80세 모드를 만나면서 사랑을 느끼고 진정한 삶을 배워나간다는 하긴스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졌는데, 국내에서는 1987년 '19 그리고 80'이란 타이틀에 김혜자 김주승 주연으로 초연됐다.

박정자는 2003년 이 작품에서 모드로 첫 출연한 후 2004, 2006, 2008, 2012, 2015년까지 여섯 차례 공연했고, 이번이 일곱 번 째니 ‘박정자 시그니처 공연’이라 할 만하다.

사진=신시컴퍼니
연극 '해롤드와 모드'./사진=신시컴퍼니

장수시대라지만 80세의 배우가 2시간 넘는 초청무대에서 손자뻘 배우(해롤드 역 임준혁)와 호흡을 맞춰 긴 대사를 소화하고, 높다란 나무 등걸에 올라가고, 춤까지 춘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박정자 배우는 대사의 긴장과 이완을 바이올린 현을 짚듯 정확히 해내면서 운율을 맞추고 동작과 장면마다 계산된 동선으로 공간 아우라를 조성했고, 한 폭의 회화처럼 멋진 미장셴을 만들어냈다. 골프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힘 뺀 연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장인(匠人)다운 풍모로 ‘노련미와 젊음의 파워'를 발산했다.

필자는 무대 위의 박정자 배우에게서 나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어느 한 구석 늙은 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유머스럽고 유쾌한 할머니’였다.

사회적응을 못해온 19세 청년이 80 할머니를 만나 인생은 살만하다는 걸 깨우치는 이 연극에서 핵심은 19세 헤롤드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을만큼 모드가 매력있느냐다.

그런데 실제 나이 80의 박정자는 소녀처럼 감성 연기를 펼치다가, 사랑스런 연인으로 속삭이다가, 달관한 어른의 여유와 관록으로 명대사를 발하면서 인간적 매력을 발산했다. 중저음으로 대사를 연주하며 몸으로 말하는 박정자 배우의 프로페셔널의 경지를 대하는 것 같아 행복하면서도 숙연해졌다. 이 여세라면 구순까지도 기대해 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사랑 못 할 것은 무엇인가?

박정자 배우를 위한 이번 무대에는 해롤드 역으로 오승훈 임주혁이 번갈아 나오고, 홍지영, 오세준, 최명경, 이경미 등이 출연한다. 이들은 해롤드와 모드 주변에서 이야기를 받치는 개성적인 연기를 펼치지만, 관객들은 2인극 같은 느낌을 받는다. 때로 해롤드도 안보이고 박정자가 연기하는 모드의 모노드라마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청년의 인생을 바꾸는 모드의 캐릭터가 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중 모드는 명랑, 쾌활한 성격에 낙관과 긍정의 가치관을 지녔으며 긴 세월 세계를 누비며 겪은 인생의 경륜이 몸에 배어있다. 80세의 할머니지만 사랑스럽고 그의 말과 행동에 신뢰가 묻어나는 이유다.

연극에서 두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해롤드와 모드가 큰 나무에 올라 앉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장면과 모드가 떠날 때를 정하고 삶을 접는 마지막 장면이다.

모드의 대사도 귓가에 맴돈다. 필자가 시니어라서 더 강한 울림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죽는게 그렇게 이상해? 그냥 삶으로부터 크게 한 발 내딛는 일이야.”

“세상엔 더 이상 담이 필요 없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리를 더 많이 만드는 거야.”

'해롤드와 모드'에는 두 나무가 등장한다. 잎이 시들어가는 나무와 수백년은 견뎠을 거목이다. 모드는 시들어 가는 나무를 옮겨 심어 새순이 돋게 한다. 거목 또한 희망을 상징한다.

사진=신시컴퍼니

해롤드와 모드가 나누는 다음의 대화는 이 작품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헤롤드 : 전 당신이 우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어요. 생각도 못했어요. 항상 행복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드 : 넌 아직 어려. 이런 것들이 주는 감회를 알기엔... 그래, 난 울어.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낙조라든가 갈매기를 보고...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이 두 가지 만이 인간이 가진 특성이야.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거야.

20세에 데뷔해 60년 무대 인생을 살아온 노배우의 팔순 기념 무대는 삶의 가치를 되새김질 해주는 한 편의 동화이자 시니어들에겐 청량제 같은 작품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도 멋지지만 ‘80세 열정의 박정자’를 무대 현장에서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흐믓한 일인가.

관객에게 감사하며 눈물 보인 대배우 박정자

박정자 대배우는 코로나 와중에 자신의 기념공연을 보러와 준 관객들에게 감사를 전하면서 울먹였다./사진=정중헌

필자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원로이자 예술원 회원인 박정자 배우를 반세기 넘게 취재도 하며 곁에서 보아왔다. 오래 전 해외여행에서 '해롤드와 모드'의 모드 같은 박정자의 감수성과 자유로운 영혼의 진면목을 본 적도 있다. 연극인들과 함께 한 페루의 마추피추 여행에서 그는 인디오가 만든 인형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소녀 같은 감성을 드러냈다.

그는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상도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키 큰 세여자', 그리고 지난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노래처럼 말해줘'에 크게 공감했다. 유머와 재치뿐 아니라 노래 솜씨도 일품이고 즉흥 이벤트도 독보적이다.

61세 때인가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해마다 공연하고 여든에 모드처럼 끝낼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라며 팔순 공연을 약속했다. 그리고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이 작품과 모드 캐릭터에서 떠나겠다고 했다.

18년간 아들 손자뻘 배우들(이종혁, 윤태웅, 김영민, 강하늘)과 여섯 번 동명 무대에 섰던 박정자 배우는 올해 후배 윤석화 배우 연출로 대단원의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박정자 배우는 “80이 꽤 먼 줄 알았는데 어느덧 여기 와있다. 끝날 때는 사뿐하게, 가볍게 끝내고 싶다. 한 배우가 극 중 나이 80을 향해 왔으니 잘 왔다고 생각한다. 약속한 이 나이까지 설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프로그램북에 그는 아름다운 말을 남겼다.

“모드는 제 삶의 롤모델이기도 해요. 영혼부터 그 모든게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기의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용기까지 있는 인물이라 ‘모드’를 만날 때마다 늘 좋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해요. 늘 모드의 삶을 배우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며 지내왔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80세를 향해 온 지금까지 배우로서 무대에 서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스스로 잘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관객들 마음 속에 ‘그 배우의 무대가 참 좋았다’라는 인상이 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초청 공연 커튼콜은 환성에 기립 박수까지 뜨거웠다. 존경과 사랑, 감탄과 감동의 기류가 회오리쳤다.

박정자 대배우는 코로나 와중에 자신의 기념공연을 보러와 준 관객들에게 감사를 전하면서 울먹였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윤석화의 수공예품 같은 정성스런 무대와 따뜻한 연출

이번 박정자 팔순 기념 연극 '해롤드와 모드'는 역대 가장 공들인 웰메이드 공연이었다.

후배 배우 윤석화가 수공예품을 빚어내듯 정성스레 꾸민 무대는 영상과 미술 세트, 아기자기한 소품이 어울려 판타스틱한 동화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했다. 무선마이크를 쓴 점, 단조로운 동선 등이 밟히기도 했지만 박정자의 빛나는 연기와 함께 근래 보기 드문 황홀한 무대로 손색이 없었다.

윤석화 연출은 “10년 전 이 공연의 마지막 연출은 네가 맡아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오래된 동료인 박정자 선생님을 위해 내가 쓰임이 있다면 꼭 참여하고 싶었다. 컬트 연극이자 부조리 연극으로서 작품의 개성을 미니멀한 무대에 담아내고 싶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드를 박정자라는 배우를 통해 보여드리고 싶다”고 프로그램 북에 밝혔다.

여물어 경지에 오른 시니어들의 빛나는 예술혼

74세 윤여정이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할머니 역으로 한국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영화의 쾌거이자 시니어들의 인간승리였다.

최근 76세의 배우 박인환은 TV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늦깍이로 발레에 도전하는 고난도 연기를 펼쳐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80세의 큰 배우 박정자는 80순 공연에서 늙음을 찾아볼 수 없는 명연을 펼쳤다. 각자의 분야에서 오랜 연륜을 쌓아 여물어 경지에 오른 시니어들의 빛나는 예술혼에 필자도 박수를 보낸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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