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김경익의 극작과 연극적 상상력 돋보인 연극 '간송 전형필'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김경익의 극작과 연극적 상상력 돋보인 연극 '간송 전형필'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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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 문화재 반출 막은 간송의 일대기 담아...타이틀롤 나경민의 연기· 출연진 앙상블 인상 깊어
김경익 작 연출의 ‘간송 전형필’. 대한민국 연극제 서울예선 마지막 작품으로 공연됐다.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을 생생하게 무대에 살려낸 역작이 지난 19일 대학로 한성아트홀에서 단 1회 공연됐지만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연극제 서울예선 마지막 작품인 김경익 작 연출의 ‘간송 전형필’. 전기(傳記) 연극은 재미없다는 통념을 깨고 숨죽이는 긴장과 극적 체험을 안겨주었다. 문화재를 다룬 공연인데도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 것에 대한 자존감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배우이기도 한 김경익이 간송 일대기를 연극으로 공연한다고 했을 때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을 어떻게 그려낼지 걱정하면서도 내심 기대가 컸다. 왜냐하면 자료가 방대하고 극적인 소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자 시절 간송미술관 전시를 취재했고, 국보와 보물 등 진귀한 소장품들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특별 전시되었을 당시 샐럽인터뷰를 하면서 전기도 읽고 에피소드도 많이 접했다.

간송은 귀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일본에 유출된 국보급 골동 서화들을 되찾아 온 선각자로 유명하지만,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하여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유산들이 엄청나다. 수집에 얽힌 에피소드며, 전쟁의 와중에도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을 어떻게 무대에 그려낼 것인가? 한 화가를 조명하는 연극에 뜻을 둔 필자에게 김경익의 ‘간송 전형필’은 귀중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인데 무대에 오른 ‘간송 전형필’은 기대 그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었고, 연극이 왜 존재하는지 그 독자성과 효용을 새삼 느끼게 했다.

김경익 작 연출의 ‘간송 전형필’ 출연진./사진=정중헌

간송 전형필을 오늘에 살려낸 주인공은 희곡을 쓰고 연출한 김경익이며,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나경민이었다. 김경익은 연극적 상상력과 기지로 박제된 인물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간송을 연기한 나경민은 살아있는 눈빛과 신념에 찬 어조의 화술, 그리고 진정성이 깃든 연기로 간송의 의지와 정신을 관객들에게 전했다. 근래에 무대에서 본 배우 중 간송 캐릭터를 해낸 나경민은 연기, 화술, 아우라를 갖춘 유망한 연기자였다. 그의 연기는 진솔하면서도 진한 체취가 묻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연극의 장점은 만인에게 알려진 인물을 연극적 방식으로 살려낸데 있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전기 연극이나 드라마가 인물 소개에 치우치거나 공적 나열로 그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경익도 연출의 글에서 ‘전기 연극’에 대한 고충이 컸음을 토로했다.

“일대기를 함부로 손댈 수도 없었고, 단조로운 에피소드식 극 전개를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결론은 ‘각 장면의 특색’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영상미, 앙상블의 에너지, 독백을 통한 사유의 공간, 움직임의 변별력, 인물 간 대사의 완급 조절, 변화무쌍한 극 진행, 그리고 귀천(歸天) 장면으로 관객들의 정서 속으로 다가가길 원했다.”

연극은 시작부터 필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간송의 대표 소장품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동영상으로 극화한 것이다. 역시 열쇠는 영상이었다. 학이 날아 움직이는 화면으로 미의 진수를 드러내면서 그 가치를 느끼는 간송의 기막힌 독백이 펼쳐지는 형식은 새로운 건 아니지만 가슴 깊숙이 와닿았다.

김경익 희곡의 대사는 여러 캐릭터에 의해 실감 나게 구현되었다. 오세창을 연기한 유태균 배우의 연기는 예술의 가치와 문화재 수집의 귀감이 될만큼 무게도 있고 설득력도 지녔다.

무대 전면에 샤막을 내려 재현한 ‘몽유도원도‘ 3D 재현은 의도는 좋았지만 압도하지는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과 ‘미인도’를 3D로 보여준 영상과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한 조선 여인상의 결합은 실감을 배가시켰다. 특히 일본에 유출된 ‘혜원전신첩’을 되찾아 오는 장면에서 그림 속 여성들을 조선의 딸들이라며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설정은 이 연극의 백미였다.

김경익 작 연출의 ‘간송 전형필’출연진./사진=정중헌

이쯤에서 김경익의 연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주인공 나경민의 좌우에 신보(신수현)와 이순황(제희찬)을 두어 감초 역할을 하게 했다. 이들은 당시 기와집 몇십 채의 거금을 2021년 가치로 환산하는 대사 하나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게 하는 등 극의 동력 역할을 해냈다.

무라카미(이정성), 김태준(남상백), 스즈키(서승인), 마사코(이명희), 게스비(권남희), 어머니(도영희) 등이 맛깔나는 개성 연기로 단조로움을 탈피한 시도도 돋보였다. 또한 추사와 세종 장면은 극중극과 영상으로 비중 있게 다뤘으며, 긴 대사로 작의를 표출시켰다.

그런데 뒷심이 좀 부족했다. 중반까지 연출 의도대로 잘 흘러가던 연극이 추사 김정희와 새종 vs 최만리 장면이 길게 확대되면서 간송이 무대 밖 객석에서 앉아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은 필자가 보기에 자연스럽지 못했다. 극의 흐름을 깼을 뿐 아니라 간송 전형필에서 작가의 애국심으로 중심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세종 역 김승기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깊은 뜻을 진정성 배인 대사로 잘 풀어냈고, 최만리 역 이기석과 김정희 역 김왕수도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소화해 냈지만, 추사 부문은 극 전체로 볼 때 조화가 덜 이뤄진 느낌을 주었다.

스태프들의 역할도 돋보였다. 원일의 음악, 신재희의 영상과 조명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빛을 발했다. 여기에 코러스와 사물놀이팀, 소리꾼 강선숙이 리드하는 노래와 사설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풍물패와 코러스들은 사설미술관 보화각 개관 장면과 세종 대목에서 앙상블의 시너지를 보여주었다. 

아쉬운 점은 크라이맥스가 약하다는 것이다. 해례본 발견은 필자에게 가장 벅찬 순간이었는데, 세종의 위민론으로 상상이 너무 비약되어 최고의 정점을 찍지 못한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터지는 사건들이 영상으로 처리되더니 갑자기 전형필의 귀천(歸天) 장면으로 막을 내려 벅찼던 재미가 반감되는 느낌이 들었다. 귀천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하려한 연출의 의도는 좋았으나 관객들의 정서 속으로 파고들기에는 분위기가 무르익지 못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어려운 주제를 연극으로 잘 구현했고, 다양한 볼 거리가 있었으며, 연기자들의 개인기와 출연진들의 앙상블이 어우러져 신선감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1회 공연으로 그칠 수 있는 경연에 서울 4개 구의 30명 가까운 배우들이 이만한 무대를 이뤄냈다는 것은 경쟁을 떠나 박수쳐 줄 만하다.

‘간송 전형필‘은 기회가 되면 후반부를 다듬어 더 나은 환경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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