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의 한국영화 진기록 100년] 본명과 예명,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한 영화감독 (92)
[정종화의 한국영화 진기록 100년] 본명과 예명,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한 영화감독 (92)
  • 정종화 영화연구가
  • 승인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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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권영계에서 권녕향-권녕순으로 변신한 1960년 '흙'의 명감독
- 북한 인민군에서 탈출해 국군으로 복무한 반공 영화의 대가 설태호 감독
- 가수 이미자를 탄생시킨 '동백아가씨'의 김기 감독
- 불가능 없는 다재다능한 '바람의 아들'의 고응호 감독
권녕순 감독(사진 왼쪽)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흙'(1960) 장면. 본명 권영계로 활동하던 그는 권녕향으로 개명했다가 다시 권녕순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터뷰365 정종화 영화연구가 = 영화감독 중 본명 이외에도 예명으로 활동한 이들이 있는데, 두 번이나 이름을 개명한 권녕순 감독(본명 권영계)이 대표적이다. 권 감독은 영화계에서 두주불사로 정평이 나있지만,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오로지 영화 콘티에만 집착하는 호방한 성품이었다. 필자와 동향인 안동 출신 감독이기도 하다.   

1923년생으로 일본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실력으로 당대 영화인의 '리딩 히터'로도 활약했다. 본명 권영계로 활동하던 그는 해방 후 1949년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의 연출부 기록을 담당하며 감독으로의 꿈을 키웠다. 6·25 전쟁으로 3년 간의 공백을 깨고 1956년 역사극 '옥단춘'으로 정식 메가폰을 잡은 그는 '나는 너를 싫어한다'와 '오해마세요'에서는 권녕향으로 개명했다.

권녕순 감독의 영화 '오부자'

이후 1958년에 또다시 권녕순으로 개명한 그는 희극 영화 '5부자'로 대박을 친 데 이어, 6.25전쟁으로 이산 가족이 된 문정숙-전계현 모녀의 눈물의 상봉을 그린 '가는 봄 오는 봄'으로 빅히트를 치면서 신상옥 감독, 홍성기 감독과 함께 '삼두마차'로 군림했다.

특히 1960년 춘원 이광수의 '흙'을 감독해 문학과 영화를 접목시킨 선구자로, 박경리 원작 '표류도'를 비롯해 1962년 초호화 대작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75년 광복30주년 기념작 '태백산맥' 등 50편을 남기고 식도암으로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기 감독(사진 왼쪽)의 '동백아가씨'(1964). 김기 감독은 한때 김기현으로 개명해 활동했다. 

영화계에서 함경도 출신의 '무골호인(無骨好人)' 김기 감독 역시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김 감독은 1964년 데뷔작 '동백아가씨'에서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감독이 되기까지 오로지 이봉래 감독 휘하에서 '행복의 조건', '견습부부', '새댁'등 13편의 조감독을 거쳐 스승 이봉래 감독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동백아가씨'의 메가폰을 들었다. 처음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는 '개나리처녀'와 '눈물의 연평도'를 부른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기로 했으나, 계약금 문제로 백영호 작곡가가 당시 무명의(?) 이미자를 추천하게 되면서 마치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김 감독은 1965년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남매' 등 13편을 내놓은 후 1969년 돌연 김기현으로 개명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하명중과 문희를 공연시킨 '울지도 못합니다'와 '천사야 옷을 입어라'를 연출한 그는 다시 본명인 '김기'로 돌아와 30편을 만들었다. 특히 1973년엔 최고의 인기 TV극 '여로'와 '속 여로'로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설태호 감독(사진 왼쪽)의 '신화를 남긴 해병'. 6·25전쟁 당시 홀홀단신 남하한 설 감독은 북한의 가족들에 피해가 될까 본명을 버리고 '설봉'이란 예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설태호 감독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청진의과대학 재학 시절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으로 징집됐다 탈출해 후퇴하는 국군과 함께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수송선을 타고 남하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58년 송국 감독의 '첫사랑'의 시나리오를 쓴 것을 계기로 '종각'의 양주남 감독과 '비련의 섬'의 정창화 감독을 만나 연출 분야에서 일을 했다.  

드디어 1963년 이만희 감독과 연결이 된 그는 전쟁 영화의 수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조연출로 반공 영화를 터득하게 된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될까 본명을 버리고 '설봉'이란 예명으로 바꾼 그는 이만희 감독과 공동으로 'YMS 504의 수병'을 내놓았다.

반공 영화 '살아야 할 땅은 어디냐'로 데뷔한 설 감독은 '신화를 남긴 해병'을 스타트로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을 내놓고 다시금 본명 설태호란 이름으로 '용팔이 시리즈'인 '운전수 용팔이', '신입사원 용팔이', '위기일발 용팔이'와 '원산공작', '케논청진공작', '도솔산 최후의 날' 등 31편을 내놓았다.

고응호 감독(사진 왼쪽), 영화 '바람의 아들' 포스터. 고 감독은 '고호'란 예명으로 데뷔한 후 여러번 이름을 바꾸다 고응호란 이름으로 정착했다. 

고응호 감독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여과 없이 척척해내는 불가능 없는 재주꾼이었다. 고 감독은 은사 최인현 감독 연출부에서 1968년 이상의 '날개'를 비롯해 '태조왕건',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 '세종대왕' 등 20편을 조연출하고 1978년 '고호'란 예명으로 데뷔했다. 이후 고승호, 고만호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다가 1982년 장미희 박원숙 김형자가 출연한 '꿀맛' 당시 사용한 고응호란 예명으로 정착했다.

오랫동안 감독 협회와 대종상 사무국에서 빈틈없는 사무 실력도 보인 그는 '불새의 늪', '바람의 아들', '청춘시대'등 20여 편의 연출을 담당했다. 현재는 한국 영화의 자료와 영화를 볼 수 있는 동대문구  답십리 영화 촬영소 전시관 책임자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정종화 영화연구가

60여 년간 한국영화와 국내 상영된 외국영화 관련 작품 및 인물자료를 최다 보유한 독보적인 영화자료 수집가이면서 영화연구가 겸 영화칼럼니스트.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부터 제작된 영화의 제작배경과 배우와 감독 등 인물들의 활동이력에 해박해 ‘걸어 다니는 영화 백과사전’이라는 별칭이 따름. 인터넷과 영상자료 문화가 없던 시절부터 모은 포스터와 사진, 인쇄물 등 보유한 자료 8만여 점을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투’가 상영된 단성사에 설립중인 영화 역사관에 전시,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일인 2019년 10월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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