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윤백남의 '운명'...김낙형 연출로 맛깔스럽게 포장한 현대판 신파극
[리뷰] 윤백남의 '운명'...김낙형 연출로 맛깔스럽게 포장한 현대판 신파극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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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운명',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사진 결혼 모티브..100년 전 박제된 희곡에 숨 불어넣어
[국립극단]운명_홍보사진_04_좌측부터 박메리役(양서빈), 이수옥役(홍아론)
연극 '운명' 콘셉트 컷. 왼쪽부터 박메리 역의 배우 양서빈, 이수옥 역의 배우 홍아론/사진=국립극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근 1세기 전 신파극을 오늘의 관객들이 즐길 수 있게 잘 되살린 무대가 있다.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아홉번째로 제작한 윤백남(1888∼1954)극작가의 '운명'(9월 7~29일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신파극 같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탄탄하고 재밌다.

1924년에 발표되고 공연된 이 희곡은 문체도 구투지만 사건 전개에 치중해 배경 묘사는 대사로 스치듯 지나가 요즘 관객들은 이해가 쉽지 않았다.

이 박제된 희곡에 숨을 불어넣고 관객들이 먹기 좋은 밥상으로 차려낸 셰프는 김낙형 연출가다. 2008년 '맥베드'로 주목받은 그는 자신이 쓰고 연출한 '나부들'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연극 '운명' 공연 장면

'운명'은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사진결혼을 모티브로 쓰여 져 요즘 세대들에게는 역사적 배경 자체가 생소하다.

김낙형 연출은 희곡의 단락을 나누고, 당시의 역사적 저변과 사진결혼의 실상을 보여주는 추가 장면과 영상, 마임 등으로 관객들의 이해를 도왔다. 예를 들면 극 초반에 이주민 아낙과 남자들이 사탕수수 밭에서 노역하는 장면을 마임과 영상으로 보여줘 관객들에게 하와이 이민 초기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라스트에도 정지된 동작으로 이같은 마임과 영상으로 주민들의 삶을 각인시켰다.

현대판 신파극을 만드는데 스탭들의 노력도 큰 몫을 했다. 이민자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듯 바닥에 흙을 깐 오픈 무대(손성환), 철사로 엮어 속이 빈 소품(박현미)들을 땅 속에 묻은 아이디어도 색달랐다. 영상(신성환)도 극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꼭 필요한 부분에만 비쳤다. 그림자를 활용한 조명(주성근), 천둥소리와 교회 종소리로 분위기를 살린 음향(유옥선)도 적절히 제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도움도 작용했지만 김낙형 연출은 배우들의 역량을 끌어내어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었고, 배우들의 어투나 동작으로 익살과 풍자를 표출해 유치하기 쉬운 신파극을 맛깔스럽게 포장했다.

연극 '운명' 콘셉트 컷. 왼쪽부터 양길삼 역의 배우 이종무, 박메리 역의 배우 양서빈, 이수옥 역의 배우 홍아론/사진=국립극단

출연진 7명은 모두 국립극단 2018년 시즌단원들로 연기 호흡이 잘 맞아 초반과 후반에는 무대를 꽉 채운 양감을 보여주었다.

인근 여인 역의 이수미, 주인영이 해학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극 초반에 관객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주역을 맡은 메리 역 양서빈과 이수옥 역 홍아론은 한문 투의 단어로 이루어진 신파조 어투와 과장된 동작을 연기해야 하는 어려운 배역이었지만, 또박또박한 대사 전달과 진정성 있는 연기로 관객의 호응을 얻어냈다.

메리 남편 역 이종무, 이웃 역 박경주, 교회 일하는 박가량도 극의 이야기를 잘 풀어내면서 양념 같은 연기로 극에 힘을 불어 넣었다.

연극 '운명'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 홍아론과 양서빈/사진=정중헌

이 극의 포인트는 제목 그대로 ‘운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재적소에 그 의미를 실어내는데 있다고 본다. 신여성 메리가 하와이에 갈 수 밖에 없는 운명, 현지 생활에 적응 못하다가 예 애인을 만나 자아를 찾는 운명, 그 과정에서 남편을 깔로 찌르게 되는 운명, 미국 유학길에 하와이에 들렀다가 메리를 책임져야 하는 이수옥의 운명 등을 그냥 팔자가 아니라 당위성 있게 그려낸 점이 작품의 미덕이다.

이민사는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와 다큐로도 다뤄졌지만 영화 '월하의 맹세'의 감독이자 소설가, 극작가로도 활동한 윤백남의 초기 희곡을 요즘의 무대술로 재조명해 젊은 관객들에게 보여준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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