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365칼럼] 돈연스님과 경전읽기모임 그리고 석보상절
[정진원 365칼럼] 돈연스님과 경전읽기모임 그리고 석보상절
  • 정진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불교 입문 첫 스승, 진속불이(眞俗不二) 소성거사와 여래·문수·보현
돈연스님(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도반들
돈연스님(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도반들/사진=유족 제공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나에게 영원한 선지식 돈연스님이 떠나셨다. 입적도 원적도 별세도 아니고 부고한 줄 없이 그저 돌아가셨다. 2023년 9월 11일 그날의 장면을 잊지 못한다.

무려 열두군데 출판사를 전전하며 퇴짜를 맞는 간난신고 끝에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를 겨우 출간한 날이었다. 책을 받자마자 추천사를 써주신 통도사 성파종정스님께 먼저 갖다 드리고 금일봉을 받아 막 산문을 나선 찰나였다.

누군가 돈연스님 소식을 묻는 전화가 동행에게 걸려왔다. 호명이 들리자마자 돌아가셨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경전읽기모임’ 도반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순간 하늘이 빙빙 돌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대로 한 복판에서 울음이 쏟아졌다. 오늘 발인이 끝났다고 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스님 소식을 검색했으나 세상은 감감하였다. 세상인심의 무상함이여.

한때 법정스님을 이을 문장가 스님으로 촉망받고 경전 번역에 대한 의지가 투철하던 스님. 학식과 통찰력이 대단해 ‘경전읽기모임’과 ‘경전연구소’를 이끌며 교수들의 스승이었던 스님. 호연지기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1980년대 송광사 스님으로 있을 때 광주항쟁을 목도하고 1년 동안 부처님의 나라 인도를 부처처럼 맨발로 순례하던 대장부 돈연스님.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민중불교연대에 참여했던 스님. 산문 안과 밖이 무엇이 다르냐며 그 마음 그대로 환속식을 거행하고 강원도 화전민들과 함께 잘 살 콩 농사를 짓고 드디어 여래·문수·보현의 아버지가 되신 분.

경전 읽기 모임과 경전 번역 발원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대학원 박사과정이던 1988년이었다. 불교 까막눈 학생이 ‘석보상절’의 내용을 알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삼청동 법련사 게시판에 ‘경전읽기모임’ 회원 모집 글이 있었다. 법련사에서 멀지 않은 사간동 한옥집에서 한 5년간 경전 읽기 모임을 하였다. 지금은 ‘스미스가 좋아하는 한옥’이 되어 버린 그 집에서 나는 스님께 아함경과 한글 대장경 법화경을 처음 배웠다. 초기 불교의 내용도 신선했지만 구성진 육자배기 가락의 법화경 염송은 더욱 좋았다. 매월 ‘깨달음’이라는 잡지를 내는 알찬 모임이었다.

어느 날 강의 중에 돈연스님은 은사스님의 유언을 말씀하셨다. 송광사 성공스님께서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남기며 한 유언이 ‘이 세상 모든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산해보니 앞으로 다섯 생이 필요하겠더란다. 그렇게 더 태어나 그 일을 할 거라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이미 그 한옥에는 ‘경전연구소’도 같이 있어 최봉수 선생과 전재성 선생이 연구원으로 번역을 하고 있었다.

불교 무식자요 초심자였던 나는 크게 놀랐다. 세상에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다섯 생을 다시 태어나 번역을 하겠다는 사람을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 큰 사람을 처음 본 순간이었고 그 이후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도 그 모습은 지워진 적이 없다.

스님과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의지에 감동하게 되었고 나는 결심하게 되었다. 다섯 생을 태어나 혼자 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스님의 다섯 생에서 한 10년 정도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발심도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는 석가모니 족보만 알면 미련 없이 떠나려 했던 불교 공부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경전읽기모임’을 거쳐 개운사 ‘중앙승가대 불전국역원’ 연수 2년, 연구 2년 과정을 마쳤다. ‘봉선사 불경서당에’서 십수 년 월운스님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본격적으로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들어가 1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국 나는 돈연스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원력으로 시작된 한 명의 교화 중생이었다.

강원도 정선 임계면 가목리 보현정사와 메주와 첼리스트

씨뿌리는 농부 돈연스님/사진=유족 제공

스님은 경전을 강의하며 90년대 초부터 집중적으로 강원도 정선에 ‘보현정사’를 짓고 콩 농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1년에 두어 번씩 우리 모임을 소집해 파종과 김매기 울력을 시키고 여름과 겨울에는 송광사 수련회 버금가는 보현정사 수련회도 하였다. 지금도 오지에 속할 그 마을은 화전민 노보살이 자신의 집을 희사한 것인데 스님께 임종과 장례를 부탁하며 남기신 것이라 한다. 너무나 가난한 그 마을을 잘 살게 하겠다는 스님의 원력은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 높이 커져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산문 안이나 밖이나 무엇이 다른가’ 진속불이(眞俗不二)를 결행, 첼리스트 도완녀 선생과 결혼하였다. 당시 스님을 아끼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말리고 말리다 실망하여 떠나갔다. 경전읽기 모임도 그렇게 끝이 났다.

1993년 여전히 불교 초심자인 나는 스님의 큰 도량과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잘 살겠다는 포부에는 공감했지만 정작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환속식 겸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어서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다.

스님과 첼리스트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날개를 달고 된장 사업체 ‘메주와 첼리스트’를 만들어 번성하였다. 두 사람의 이력과 파격적인 결혼이 더해져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탄탄대로를 걸었다.

아름다운 화양연화 시절 가족사진/사진=유족 제공

2003년 즈음인가 그로부터 10년 후 정선에 다시 갔다. 그동안 나도 결혼을 해 딸을 하나 낳고 스님도 ‘여래, 문수, 보현’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장독 항아리 테마파크’가 된 그곳에 여행을 갔다. 도선생과 함께 쑥을 뜯으며 그동안 고생 끝에 자리 잡은 낙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어울려 뛰어놀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화양연화 시절이었다.

스님은 그때도 된장 사업 수익으로 일구어나갈 경전연구 이야기를 하셨다. 이 모든 일이 경전연구를 위한 토대사업이었던 것이다. 나도 언제가 그 일원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였지만 함께 일할 시절 인연은 닿지 않았다. 이후 2008년에는 경전연구소(소장 돈연스님) 이름으로 ‘세계경전 번역 실태 및 체계에 관한 연구’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기사도 있다.

성주괴공의 시절인연과 소성거사의 삶

2004년이후 나의 인생도 격랑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작고, 나의 병고, 헝가리대학 교수 이직 등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스님도 사업이 경기도 연천으로 확장되고 홈쇼핑까지 섭렵하는 등 대박 일색 소식에서 어느 날 사업을 접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부인 도완녀 선생이 무속인이 되고 그 큰 사업이 실패한데다 설상가상 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무엇이든 이루어졌으면 허물어지는 것이 인생사이다. 인간의 생로병사, 시간의 성주괴공이 다 그러하듯이.

경전읽기모임 중 가족처럼 지내던 박명자 보살님과 홍화식 보살님은 이후로도 스님과 왕래를 한다며 나에게 간간이 소식을 전해주셨다.

2019년 어느 날 그들이 스님과 통화를 연결해주었다. 오랜 병고로 어눌해진 발음을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어느 순간 전력을 다해 또렷한 발음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책 많이 써’ 나도 전화 너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스님은 그간의 철인처럼 일인다역을 하다가 당뇨와 고혈압, 심장병 등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고 발음도 어눌해지셨다 한다.

이 글을 쓰느라 2014년 티비에 방영된 스님 모습을 보니 왼쪽이 불편했지만 새로운 사업구상도 하고 말씀도 분명하셨다. 당시 방송에서 요즘에 유행하는 절인 배추 사업을 10년 전에 남도에서 하려고 하셨다. 세상에는 가끔 이상 시인의 ‘오감도’처럼 보통사람들 머리 위에서 조감하는 천재들이 나타나는데 스님이 그러하셨다.

씀씀이도 배포도 다섯생 경전 번역의 큰 그림까지도 남달랐던 스님.

어느덧 나도 불교계에서 절밥 얻어 먹은 지 서른다섯 해쯤 되어간다. 서정주는 ‘자화상’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도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스님의 모습이다.

내가 인복이 많고 스승 복이 많아 존경하는 스님들도 많이 만났지만 개중에는 막행막식하며 원효를 사칭하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겉으로는 고매한 척 뒤로는 은처와 자식을 둔 경우도 종종 들었고 환속 후 불교 언저리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사실 어느 면에서는 찌질해 보이지만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컨대 돈연스님처럼 당당히 환속식을 거행하고 승려였을 때나 속인이었을 때나 한결같은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준 이는 본 적이 없다.

아무도 빨리어에 관심 없을 때 빨리어경전을 번역하고 강원도에서 농사를 지을 때도 대대로 가난한 화전민 이웃과 함께 잘 살겠다는 원력을 실천하였다. 부인 또한 궁극의 목적인 경전연구를 계속하라고 열심히 된장독에서 첼로를 켜고 판매를 하면서 무속인이 되어서도 스님을 마지막까지 보필하였다. 말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어린이대장경’을 만드는 노력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우리 시대 승속에 얽매이지 않고 떳떳하게 스님 노릇, 떳떳하게 가장 노릇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꼽으라면 나는 돈연스님뿐이라 대답하겠다. 무려 ‘여래 문수 보현’ 불보살을 위하여 사셨다. 원효만 설총을 낳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스님을 우리 시대 소성(小性)거사라 부른다. 원효가 환속하고 자칭한 그 이름. 작디작아 더욱 크나큰 그 이름.

환속을 하자 스님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스님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옷도 벗으라 했다, 스님은 진속(眞俗) 불이(不二)를 실천하며 환속 후에도 한동안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고 계셨다. 출가했을 때나 환속했을 때나 다르지 않았다. 세상인심은 민낯을 보였지만 스님의 그릇 크기만 더욱 빛났다.

경전읽기 모임의 한 열매

스님 경전 번역의 뜻은 뜻밖에도 빨리어도 산스크리트도 아닌 훈민정음 불경을 번역 중인 바로 나에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님 떠나신 날, 내 인생 마지막 책이 될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가 출간된 것은 무엇인가 의미심장하다. 내가 출간한 훈민정음 불경 책으로는 세 번째이지만 이 책의 원본 ‘석보상절 제3권’은 훈민정음 반포 후 우리에게 남겨진 첫 번째 불교 경전 책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문 불경은 물론 산스크리트, 빨리어, 티벳어, 만주어 불경 등 많은 번역과 연구자들이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스님의 원력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 공부하거나 번역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들이 되었다. 그들이 낸 연구성과를 통해 스님의 서원은 성취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섯생을 다시 오셔도 좋고 스님이 뿌린 씨앗이 다섯생으로 퍼져나가도 좋을 일. 스님은 오셨으나 오고감이 없으렷다.

정진원 칼럼니스트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 K Classic 콘텐츠연구소 소장. 튀르키예(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와 헝가리 ELTE대학교에서 한국학과 교수, 서울대 규장각과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여 년간 해외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로 홍익대 문학박사를 받은 국어학자이자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현재 월인석보와 삼국유사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내와 유럽을 중심으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대장경의 길을 열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6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엔디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