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리고픈 "검은 얼룩진 이름, 카라마조프"...뮤지컬 '카라마조프'
지워버리고픈 "검은 얼룩진 이름, 카라마조프"...뮤지컬 '카라마조프'
  • 주하영
  • 승인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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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부정한 수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소도시의 지주로 등장한다./사진=PRM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김소월 시인의 '초혼'은 이미 육체를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이를 다시 살려내고픈 간절한 소망을 담아 죽은 이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 아직 남아있는 마지막 말을 전하고픈 이는 부르는 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로 계속 비껴감에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하지만 모든 이의 죽음에 우리가 같은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내린 뮤지컬 '카라마조프'에서는 "모두가 죽이고 싶어 했고, 모두가 죽기를 바랬고, 모두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던" 악덕 지주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살해범을 밝히는 재판이 관객들 앞에 펼쳐졌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소설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카라마조프'는 '친부 살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죄와 벌, 선과 악, 신의 존재와 인간의 자유와 같은 심오한 고뇌가 담겨있는 1700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존속 살해 재판이 이루어지는 부분만을 옮겨 법정 추리극을 완성했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콘셉트 컷/사진=PRM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원작의 주인공이 셋째 아들 알렉세이로 설정되어 있고, 소설의 사건은 첫째 아들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탐욕과 부도덕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표도르의 '죽은 영혼'을 무대 위에 등장시켜 자신의 죽음 속 진실을 밝히려는 과정을 통해 삶 속에 자리한 거짓과 진실, 관계와 책임, 빛과 어둠과 같은 주제들을 효과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듀서 심재훈은 관객들이 '누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죽였는가'에 대해 추리하는 과정에서 인물간의 관계와 갈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되며,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망자 표도르는 소설과는 '또 다른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뮤지컬 '카라마조프'에는 "새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허연정 역시 원작이 주는 중압감을 언급하며,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창작진들에게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피력했다.

실제로 뮤지컬 '카라마조프'는 원작의 큰 틀을 이루는 줄거리는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상당부분 인물간의 관계설정이나 세부적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각색하여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원작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만인은 만인 앞에 죄인'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공동체 정신과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인간 존재, 소외와 같은 주제들은 그대로 노출되며, '모든 도덕의 폐허 위에 지상의 천국을 건설한다면 그것이 종말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생각과 현재 우리들의 삶에 대해 돌아보도록 만든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사진=PRM

극은 시체매매업, 고리대금업과 같은 부정한 수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소도시의 지주 표도르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지고, 자신의 육체로부터 빠져나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아들 드미트리의 재판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유령'으로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재판장에는 표도르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증인으로 출석해있고, 둘째 아들 이반은 형 드미트리를 변호하고 있다. 푸른 조명이 비추어져 이승의 존재가 아님이 표현되는 표도르는 잔뜩 흥분하여 "도대체 누가 나를 죽인거야?"라고 외쳐대지만 무대 위 인물 중 누구도 그를 보지 못한다.

육체를 떠나 '혼'으로 존재하는 표도르와 뒤쪽으로 앉아있는 증인들과 배심원들, 양 옆에 자리한 검사와 변호사로 구성된 무대는 관객들을 '재판관'이자 '참관자'의 위치에 놓이도록 만든다.

또한, 각기 불려나온 증인들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좁혀나가는 과정 속에서 표도르를 둘러싼 인물들의 숨겨진 관계와 진실, 갈등과 상처를 노출시키며 표도르의 삶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의 삶을 드러낸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사진=PRM

특정 사건을 바라보는 구조라 할 수 있는 '틀'은 중요하다. '틀'은 관점을 설정하고, 관점은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표도르로 하여금 사후 자신이 '왜 죽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 뮤지컬 '카라마조프'는 '누가 범인인가?'에서 '그들은 왜 그가 죽기를 바랬는가?'로 옮겨가도록 만든다.

아버지로서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사람, 돈만이 세상의 전부이며 심지어 신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욕망을 채우는 일만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 이외의 인간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는 사람, 표도르는 그 자체로 패륜과 악, 탐욕을 상징한다.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치지만 돈 3000루블에 자신의 영혼을 팔만큼 아버지를 가장 닮은 드미트리, 신조차 정의를 져버린 잔인한 세상에서 악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응징하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이반, 내 안에 있는 카라마조프의 피를 모두 갈아치우고픈 욕망 속에 어둠을 두려워하며 조시마 신부 곁에서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애쓰는 알렉세이, 벙어리 백치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아무리 씻어내도 얼룩진 아이"였기에 세상이 자신을 버렸듯 자신 역시 세상을 버렸다고 공언하는 스메르... 각기 다른 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같은 '카라마조프의 피'를 품고 있는 네 아들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저주하고, 아버지라는 족쇄로부터 벗어나길 바라지만 서로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사진=PRM

도스토옙스키가 바라보는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순된 존재이다. 인간의 내면에 암세포처럼 자리하고 있는 욕망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쾌락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고,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한 마음을 '검은 얼룩'으로 물들인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이기심은 소외를 낳고, 소외는 증오와 분노를 낳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외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도려낸 것만 같은 느낌"으로 정의한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이 불러오는 억울함과 분노는 타인을 향해 표출되며 범죄를 낳는다.

결국 모든 비극의 출발점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 놓여있다. 진실을 외면하고 방관하는 무책임과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무신경과 무관심, 모두가 연결된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무정함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사진=PRM

아버지의 정부인 그루샤를 되찾기 위해 동생이 거룩하게 여기는 조시마 신부의 사체를 탈취하는 일을 선뜻 받아들이는 드미트리,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고통 속에 허덕이도록 만드는 복수의 완성을 위해 드미트리를 이용하는 이반, 어둠의 소굴인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빛 속에 머물기 위해 형제들이 처한 어둠을 외면하는 알렉세이, 무엇보다 오로지 돈을 위해 주변 사람 모두를 도구로 사용하는 표도르의 이기심과 무신경, 무책임과 무정함은 결국 스메르의 손에 권총을 들려 표도르를 살해하도록 만든다.

스메르는 알렉세이를 향해 외친다.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마음을 찢는 사람, 없어져야 하잖아!...난 당신을 진실로부터 보호한 거예요. 진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한 일이예요!"

이제 질문은 표도르의 '지난 삶'을 겨냥한다. 관객들은 모두에게 없어져야 할 존재였던 그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죽음 뒤의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고 평가된다는 사실을 잊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을 염려하느라 현재 나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내가 어떤 존재로 기억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뒤로 미룬다. 사실상 현재의 삶에 중요한 질문은 '나의 죽음이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심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심판자인 자신이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며, 자신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그 범죄에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뮤지컬 '카라마조프' 공연 장면./사진=PRM

표도르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표도르 자신이다. '카라마조프'라는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던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검은 얼룩진 이름"으로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삶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관계로부터 탄생한 나의 삶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떤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에 책임이 없다 발을 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삶이 너의 삶과, 그 누군가의 삶과 얽혀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지우고픈 '검은 얼룩진 이름'이 아니라 설움에 겹도록 외쳐 부르는 '사랑하던 그 사람의 이름'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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