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美 흑인의 수난사 의 저자 정상환 변호사
[인터뷰]美 흑인의 수난사 의 저자 정상환 변호사
  • 김두호
  • 승인 20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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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쿤타킨테에서 흑인 대통령까지 美역사 바로알기

<검은 혁명>의 저자 정상환 변호사

【인터뷰365 김두호】미국의 역사는 노예시장이 있었던 흑백 인종차별과 함께 시작됐다.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백인이 앉는 버스 좌석에 흑인이 앉으면 체포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노예조상의 내력을 캔 작품이 <뿌리>(Roots)였고 그것이 영화 <쿤타킨테>로 옮겨지기도 했다.

지금은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는 나라가 미국이다. 2013년 말 타계했지만 이 시대 인류의 ‘위대한 영혼’으로 추앙받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흑백 차별사회에서 흑백 평등의 시대를 연 지도자였다. 특히 미국에서 백인 우위의 인종 차별이 흑백평등사회로 순화되기까지의 흑인 수난사를 정리한 <검은 혁명>이라는 책이 근래 국내 서점가에서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번역 서적이 아니다. 국내에서 간행된 이 책의 저자 정상환(50 사시 29회)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출신의 엘리트 법조인이다.

서울법대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다녔고 이어서 주미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3년간 워싱턴에서 공직을 수행하는 동안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흑인대통령의 내력에 관심을 둔 것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 <검은 혁명>의 부제도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쿤타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를 달았다. 미국의 첫 흑인 법무장관 에릭 홀더는 민주주의와 법치사회 국가의 모델이 되고 있는 미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흑인 노예제도와 흑백 차별시대의 역사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은 혁명>의 저자를 통해 미국의 그 장구한 흑백 차별문화의 히스토리를 함축해서 들었다.

초대 대통령도 노예 거느려

미국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심각했던 문제는 흑백 인종 갈등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로 접어들어 미국이 흑인 오바마 대통령을 등장시킨 일을 새삼 돌이켜 보면 세계인을 경악케 한 사건이었다.
2008년 미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 흑인사회에 회자되고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널리 유포된 문장이 있다. “로사가 앉았기 때문에 마틴이 걸었고, 마틴이 걸었기 때문에 버락이 달렸고, 버락이 달렸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날 것이다”라는 말이다.

마틴이라면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를 뜻하는가.
그렇다.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을 외치며 흑백차별 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던 마틴 목사에게 분노의 불씨를 던져준 인물이 1955년 12월 1일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 살던 로사 파크스라는 42세 흑인여자였다. 그녀는 시(市)의 조례와 관행을 무시하고 백인에게 앉은 자리를 비켜주라는 백인운전기사의 요구를 묵살했다가 고발되어 체포된 사건이 현대 흑인 민권 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버락은 아시는 바와 같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다.

‘우리 아이들은 날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은 흑인들의 절절한 소망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표현이다. 과연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으로 뿌리 깊은 흑백 차별의식과 불평등 문화가 해소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다 같은 인간인데 태어나면서 피부색이 흑백으로 구분된 것은 신의 뜻이겠지만 어느 나라든지 흑백의 인종사이에 보이지 않는 숙명의 선(線)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법률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또 사람들의 심리 근저까지 흑백 평등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고 본다. 이 발판을 딛고 장차 흑인 아이들이 그들의 꿈처럼 백인 아이들과 함께 당당하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역사는 노예제와 더불어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대통령 워싱턴도 워싱턴D.C. 부근의 사저에 수백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패트릭 헨리,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만든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모두 노예를 소유하고 살았다. 제퍼슨은 개인적으로 노예제를 반대했지만 현실적으로 폐지를 실현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건국 초기의 지도자들은 노예문제를 각 주에서 결정하도록 맡겼다.

노예시장이 번창했을 때인 19세기 미국의 노예 숫자는 어느 정도나 되었는가.
1790년에 실시된 최초의 연방인구 조사에서 노예의 숫자는 69만7,897명이었다. 20년 후인 1810년에는 그 보다 70%가 증가한 119만1,354명, 1860년에는 3배가 증가한 395만3,760명이었다. 특히 노예시장이 번창한 남부지역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한 시기가 19세기 초로 알고 있다.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노예무역이 금지되면 노예제도도 서서히 소멸될 것으로 보고 1787년 ‘노스웨스트 칙령’을 내려 노예무역을 20년간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1808년 마침내 대서양 노예무역이 금지됐지만 금지를 앞두고 엄청난 흑인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와 노예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지역에 따라 노예제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 당시 노예제에 대한 지역별 규제와 의식의 차이를 비교해 달라.
1777년 버몬트 주가 최초로 주 헌법에 노예제를 금지했다. 그로부터 25년간 델라웨어 강 이북의 모든 주가 노예제를 금지시켰다. 1780년에 펜실베이니아 주, 1783년에 매사추세츠 주와 뉴햄프셔 주, 1784년에 코네티컷 주와 로드아일랜드 주, 1799년에 뉴욕 주, 1804년에 뉴저지 주가 노예제를 금지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북부의 모든 주들이 노예해방을 법률로 통과 시켰다.

정 변호사는 공직을 떠난 뒤 새장을 나온 새처럼 자유를 느끼면서 한편은 세상이 너무 넓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남부의 노예제가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남부의 노예제도는 목화산업 발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후조건에 맞는 남부의 대대적인 목화산업을 이끌어 가는 노동력이 노예들이었다. 목화농업이 융성해질수록 노예제의 필요성도 그만큼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제 폐지로 북부지역의 흑인들이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인 아이들을 공립학교에서 받아주지 않거나 어른들은 몇 개 주를 제외하고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해방은 되었지만 자유 흑인들에 대한 불평등 사회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흑인들은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난 북부 흑인사회를 동경하며 험난한 탈출극을 벌이며 숱한 피의 역사를 기록했다. 자유를 찾아 탈출 중에 추적을 당한 이야기, 숨을 곳이 없는 노예 도망자를 숨겨준 천사 같은 백인 이야기, 추적을 피해 멀리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떠난 흑인 이야기 등 노예들이 남긴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과거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해리엇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소개되기도 했다. 노예의 슬픔을 소재로 다루어 19세기 중반 노예시대에 큰 반향을 남겼다는 책이다.
노예들이 노예제 폐지지역으로 도망을 가도 붙잡아서 주인에게 돌려보내야지 도와주거나 감추어주면 그 사람도 처벌한다는 ‘도망노예법’에 분노를 느낀 스토부인이 1852년에 쓴 책이었다. 자유를 찾아 도망하는 노예의 아픔을 그려낸 이 책을 두고 남부인들은 책 판매를 금지시킬 정도로 화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유럽까지 화제에 올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예제 폐지에 동참하는 공감대를 불러 모으게 했다. 나중에 링컨 대통령이 스토부인을 만나 “당신이 이 엄청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성이군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보면 노예제 찬반의 논쟁에 불을 질러 남북전쟁까지 일어나게 만든 또 하나의 불씨가 된 책으로 볼 수도 있다.

남북 전쟁을 일으키게 한 살벌했던 노예제 찬반 논쟁의 충돌 사례들이 그밖에도 많았던 것 같다.
의회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 하나를 예로 들어보겠다. 1856년 5월 2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프레스턴 브룩스 하원의원이 노예제에 반대하던 찰스 섬너 상원의원을 상원회의장에서 들고 있던 금장식 지팡이로 사정없이 내리쳐 머리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동료의원이 권총을 뽑아들고 다른 의원들의 개입을 저지해 집단 폭력사태는 없었으나 피해자 섬너 의원은 그 후 3년간 심한 부상 치료를 받았다.

그 무렵 노예지지자와 폐지론자의 집단적인 유혈 충돌도 쉬지 않고 발생했다. 1859년 노예해방을 외치며 흑백 동조자를 이끌고 연방군과 대적하다가 처형단한 존 브라운 사건은 남북전쟁으로 가는 마지막 도화선이 됐다. 그에 대한 평가가 당시 남북의 극단적인 대립 양상을 잘 드러냈다. 북부인들에게는 순교자이며 영웅 대접을 받았고 남부인들에게는 흑인을 부추겨 주인을 살해하라고 선동한 악한이며 살인범으로 지탄을 받았다.

저서 <검은 혁명>에는 링컨시대로 넘어가기 전, ‘드레드 스콧 대(對) 샌퍼드의 대결’과 ‘프레드릭 더글러스’에 대한 비화도 소개했다.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이 백인 주인을 상대로 제기한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이 흑인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미국 헌법상 시민이 될 수 없으며 연방의회는 연방의 관할 내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한 사건이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이 말썽 많은 판결을 계기로 정치무대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유럽까지 이름을 떨친 흑인 노예폐지 운동가였고 지도자였다. 미국은 해마다 2월을 ‘흑인역사의 달’로 기념한다. 링컨의 생일이면서 위대한 흑인 노예폐지론자인 더글러스의 생일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시대만 잘 타고 났다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의 영향력 있는 조언자이기도 했다.

이제 링컨시대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1861년 4월부터 1865년 4월까지 계속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그들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고 오점이었다. 노예제 확산을 반대하던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7개주가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도 열리기 전에 연방을 탈퇴했다. 연방정부에서 보면 반역이었다.
결국 전쟁을 치루고 남부연합군을 제압한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배경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정이 많이 깔려 있다. 링컨도 인도주의적 소신에서 처음부터 노예해방을 정치신념으로 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대체로 링컨의 위대한 점을 소신을 가진 노예해방 선언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링컨도 철저한 노예폐지론자는 아니었다.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지만 흑인과 백인이 같이 사는 것은 피차 불편하므로 흑인이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연방의 통합을 공약으로 내세웠지 노예해방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과제는 노예를 구하는 것보다 연방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의 발언 중에 “노예를 해방하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노예를 해방하고 연방을 구할 수 있으면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노예의 일부만 해방 시키고 연방을 구할 수 있으면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결국 나중에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군사 전략적인 면과 외교 전략적인 양면에서 필요성이 따랐다. 또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노예해방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목표를 지닌 명분이 승리의 힘으로 발전했다는 점도 링컨 대통령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예제도가 폐기되어도 참정권을 제한하거나 백인들과 학교나 공공시설을 함께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흑백 차별주의로 흑인들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아 20세기까지 흑인사회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상처가 아물 때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탁월한 리더십과 신념으로 차별주의와 맞서 싸운 흑인 민권운동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꼽아 달라.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흑인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은 온건한 성향의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이었다. 1856년 흑인 노예 어머니와 백인 농장주 사이에서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출생한 그는 남북전쟁 후 독학으로 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 교육자로 흑인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해 흑백인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면서 점진적으로 흑인들의 권리와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활동을 하면서 카네기, 록펠러 같은 백인 경제인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190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만찬에 초청된 최초의 흑인이었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손님이 아니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백악관 주인이 된 것은 그로부터 107년이 걸렸다.

현대 민권운동의 기수와 같은 흑인 민권운동가라면 역시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이하 킹으로 약칭)와 맬컴 엑스가 아닌가.
킹 목사의 부상은 버스에서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 수감된 흑인 여성 로사 파크스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런 점에서 로사 파크스가 현대 민권운동의 선봉에 섰고 이어서 로사 파크스 체포에 항의하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운동’의 흑인 대표지도자로 킹 목사가 등장해 본격적인 민권운동의 불을 댕겼다. 그의 외침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그로부터 워싱턴을 비롯한 킹 목사의 연설이 있는 장소에는 청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일종의 간디와 같은 비폭력 저항주의 민권운동가로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링컨기념관 앞에서 외친 연설에서 ‘I have a dream'이라는 명언이 나왔다. 베트남전 때 는 반전운동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암살테러에 의한 죽음이 민권운동에 바친 킹 목사의 생애를 한층 더 위대한 순교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86년에는 그의 생일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될 정도로 영광이 사후에도 이어졌다.
맬컴 엑스(Malcolm X)는 킹 목사와 다른 철학과 방법론으로 흑인들의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킹 목사가 남부지방에서 흑백화합을 기치로 내걸고 평화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했다면 맬컴 엑스는 북부 도시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흑인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강조한 보다 전투적인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흑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스스로 쟁취해야한다고 외친 그는 존 F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킹 목사와 함께 1960년대 미국의 충격적인 시대상을 보여준 비극적 피암살자 중 한 명이었다. 킹 목사가 흑인들과 상당수 백인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라면, 맬컴 엑스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흑인들의 공감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제 미국 흑백사회는 평등한가

저서 <검은 혁명>의 마지막 부문은 ‘이제 흑인은 평등한가?’라는 주제로 정리한 내용이다. 과연 미국 흑인사를 깊이 탐구하고 현지 생활을 경험한 법률인의 시각으로 볼 때 ‘이제 흑인은 평등하다’고 보는가.
이제 법률적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제도적 조직적 장애물이 거의 다 철폐되었다고 본다. 지난 수십 년간 인종문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흑인 중산층도 1970년대 이후 4배로 증가하고 빈곤층도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택시를 타거나 쇼핑을 하든가, 공공 장소에서 흑인이라는 것 때문에 신뢰를 받지 못한 경험을 하소연 하는 흑인들이 많다. 주거지도 구분해서 백인끼리 사는 곳이 많다. 심리적 장벽은 아직 남아 있다.
흑인들이 아직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근거로 경찰의 인종차별적 법집행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약인 코카인 사범 처벌에 있어서도 흑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덩어리 코카인과 백인들이 사용하는 분말 코카인 사이의 형량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흑인들의 과다한 전과자 양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가 따른다. 특히 경찰관의 불심검문 대상자들이 백인보다 흑인이 훨씬 많다는 불만도 있다. 어쨌거나 미국에서는 여전히 인종문제가 아주 민감하고 상존하는 이슈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김진태 검찰총장(맨 오른쪽)등 검찰인사들과 함께 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 시절의 정상환 변호사(왼쪽에서 세 번째), 정상환 변호사와 피아니스트인 오희 여사 부부.

저자 개인 얘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검사시절 근무 지역은.
대구지검 의성지청장, 대구지검 특수부장, 대검찰청 정보통신과장을 거쳐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주미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해외근무를 했다. 귀국해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청주지검 차장검사, 수원지검 1차장검사, 인천지검 부천지청장,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다가, 2014. 초 검찰을 떠나 서초동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서울법대 출신에 사시합격이라면 인정받는 수재과정이다. 가정환경이 좋았는가, 가족은.
중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교육자이신 아버지가 재일동포를 위한 재일교육문화센터의 책임자로 계실 때였다. 아내는 바이올리니스트지만 지금은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자녀는 재학 중인 대학생 하나와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아들 까지 둘이다.

20년 넘도록 검찰에 재직하는 동안 형사분야와 조세분야에서 많은 사건을 다룬 것으로 들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보람을 느낀 일화를 소개해 달라.
법을 다루는 직무의 절대 요건은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다. 검사로 사건을 다루다보면 진실 규명을 위해 초죽음이 될 정도로 녹초가 될 때가 있다. 오히려 범죄자에게 동정을 받아 사건이 풀린 적이 있다. 1990년대 시끄러웠던 사건중의 하나인 서울 양재동 다방여주인 살인사건에서 두 명의 공범 용의자를 수사했는데 서로가 상대방을 주범으로 지목해서 혼란이 생겼다. 나중에 한 명이 스스로 주범임을 자백했는데 그의 말이 검사의 집요하면서 고통스럽게 보이는 인간적인 설득에 항복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태원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거나 해외로 출국해 공소유지가 매우 힘들 때라 한 사건에 그렇게 많은 정력을 소진한 적이 흔치 않아 기억에 남는다.

검찰에 머무는 동안 보람을 나눈 일이라면 업무상의 일보다 의성지청장으로 있을 때 소관 지역인 청송감호소(현 교도소) 수감자 자녀를 비롯한 의성지역의 불우 가정 자녀를 위해 장학재단을 만든 것인데 지금도 한빛장학회라는 이름으로 건재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간혹 수혜학생들이 감사편지를 보내와 보람을 느낀다.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에 역외탈세 세미나를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탈세 목적으로 조세피난처에 재산을 은닉한 사람들이 폭로되어 한 때 뉴스인물로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 세계의 비화는 추리소설 같이 미스테리가 많은 것 같다.
주로 개인보다 기업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다. 개인의 경우는 국내 거주자인지 해외 거주자인지부터 가려내야 하고 그에 따라 조사범위와 적용 내용도 달라진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관련 인물들의 인적구성과 배경도 파악하기 어려워 그만큼 온갖 추측이 난무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된다.

저서 중에는 <정치개혁 이렇게 한다-미국정치개혁법연구>와 역서로 <대통령의 용기>가 있는데 미국의 정치문화와 역사에 특별히 많은 조예를 가진 것 같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공부(컬럼비아대 로스쿨)도 하고 공직근무도 해서 미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개력 이렇게 한다”는 미국의 선거법과 로비스트에 관한 제도,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 규정 등을 자세히 소개한 책이다. 우리나라도 로비스트가 음성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서 이를 양성화할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이 참고가 될 것이다. 역서인 “대통령의 용기”는 국가적인 위기와 개인적 시련을 굳은 신념으로 돌파한 9명의 미국의 대통령의 인간적 고뇌와 결단을 보여주는 책이다.

<검은 혁명>에는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루고 있다. 과연 미국역사에서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성공한 기록을 남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취임 초기 정적들이 공격한대로 경험 없는 풋내기가 이것저것 진보적 의제를 가지고 실험하다가 실패하고 퇴장할 지 아니면 자신의 다짐대로 워싱턴의 오랜 분열과 냉소의 정치를 끝내고 통합과 상생의 성공한 지도자가 될 지의 판단에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 여론조사도 실업률을 비롯한 경제문제와 외부적으로 아프칸, 이란, 북한문제 등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따라 지지도가 많은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쿤타킨테로 상징되는 노예들이 옷이 벗겨지고 두들겨 맞아가며 미국으로 팔려갔던 17세기 노예무역의 본거지인 가나의 케이프 코스트 캐슬에서 240여년이 지난 2009년 7월, 군중을 향해 감격의 손을 흔드는 미국 대통령이 그곳 흑인의 후예라는 점, 역사적인 그 영광의 기록만은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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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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