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놀이 끝내고 돌아온 광대, 김명곤
장관놀이 끝내고 돌아온 광대, 김명곤
  • 김두호
  • 승인 200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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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다음 난장은 영화감독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 사진 김우성] '사상 처음으로 정승이 됐던 광대' 김명곤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K1TV 대하사극 <대왕 세종>에서 무너진 고려왕실의 후예이며 혁명가 옥환 역으로 연기활동을 재개했다. 영화 <춘향뎐>이후 8년 만이고 문화관광부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지 10개월 만이다. 그런데 그가 지금 벌이고 있는 큰일은 따로 있다. 영화감독 작업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준비 중이다.


국립극장장이나 장관 일은 "열심히 살다보니 찾아온 부수적인 변화"였다면 영화감독은 오래전부터의 꿈이었다. 첫 작품은 일제강점기 나라와 고향을 잃은 남사당패의 애환을 그린 <유랑>(가제)으로 정해두고 있다. 언제나 ‘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김명곤은 대학 시절부터 광대의 길을 찾아 나섰다. 전도유망하던 서울대(독문과) 학생이 연극에 미쳐버리고, 남들은 나이트클럽, 고고장 가서 흔들어 댈 때 판소리 국창 박초월 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던 그는 민족극단 <아리랑>의 대표이자 상임연출가로써 한국문화계의 다변화를 선도했으며, <바보선언> <서편제>등의 영화를 통해 뛰어난 배우로써의 자기 자리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필자는 작년 3월 장관 사임 후 기자로는 처음으로 김명곤을 만났고, 최근에 다시 배우로 돌아온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매번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인 호텔 커피숍으로 홀가분하고 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시 연기를 시작한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다. 그래도 한동안 <장관님>이었지 않는가?

하하. 가던 길을 다시 찾았으니 편하고 즐겁다. 장관은 떠나면서 그 자리에 모든 것을 벗어 놓고 왔다. 그리고 텅빈 머리로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놀았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쉰 시간이 없었다. 황금 같은 휴식이었다


현재 TV 드라마 <대왕 세종> 출연 활동외에 또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정치나 문화관련 기관에 다시 복귀한다는 소문도 있다.

근거 없는 추측이다. 정치도 유혹이 있었지만 내 삶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연기활동을 계속하겠다. <대왕 세종>에 출연하면서 해외 영화제를 겨냥한 저예산 HD 영화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지만 남사당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공직생활을 하기 전부터 시작했지만 틈을 내지 못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직접 연출을 할 계획이다.


감독할 첫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

내가 오정해씨와 함께 출연한 임권택감독의 <서편제>가 판소리를 통한 한(恨)을 담았다면 나의 영화(가제/ 유랑)는 남사당의 각종 놀이를 통한 흥겨운 신명을 그릴 생각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가 시대 배경이고 젊은 남녀와 스승, 어린 사당패, 일본인칼잡이 등이 엉켜 사랑과 복수, 한의 갈등구조를 만들어 내지만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인형놀이 탈춤 줄타기 풍물놀이와 재주넘기 등 사당패의 신나는 놀이문화다. 그것을 재현하며 인간과 대자연의 정취를 어떻게 혼합해서 녹일지도 고민하고 있다.



준비한지 10여년 된다면 감독이 되겠다는 결심도 매우 오랜 전에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바보선언> <서편제> 때도 시나리오 작업에서 연출 헌팅작업, 캐스팅 음악 편집 등 스태프로 참여해 감독 작업이 손에 설지는 않다.


문화관광부 장관를 맡았던 전후에 인생에서 달라진 점은 어떤 건가?

장관하기 전에 달랐던 것은 없고, 후에 달라진 것도 없다. 하지만 장관시절에는 아주 달랐었지. 국립극장장 시절에는 극장만 잘 경영했으면 됐는데 장관은 공연만이 아니라 체육, 관광 분야로 일해야 하는 폭이 넓어졌던 거고, 정부 각료로서 새 역할도 부여되었고 그랬었다. 그 덕분에 지금도 좀 혼란스럽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또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시기란 거다. 내 안에 저장되어 있던 모든 ‘파일’을 다 버렸다.


국립극장장이나 장관도 젊을 때 그래도 한번쯤 꿈꾸던 자리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결단코 아니다. 단 나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도전하고 뭐든 해보자는 성격이다. <서편제>때도 대학로 커피숍에서 임권택 감독님 처음 만나서 설명 듣자마자 그냥 하겠다고 했다. 국립극장장도 신문에 나온 공고보고 해보면 좋겠다 마음이 들어 그 다음날 이력서 내서 된 거다. 청와대 인사 쪽에서 장관 프로포즈를 해왔는데 ‘아! 내 인생에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하겠다고 했다.


해보니까 어떻던가?

좋은 선택이었다. 각국의 문화 책임자들과 만나면서 시야도 넓어졌고 국제적 관계 속에서 한국문화의 미래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제일 힘을 기울였던 일은 뭔가?

1년이었지만 사실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다. 특히 ‘6H브랜드’라는 사업이다. 이건 내가 임명된 이후부터 그만두는 날까지 제일 공을 들인 일인데 ‘한글, 한지, 한식, 한복, 한옥, 한국음악’ 등 ‘6대 한 스타일’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었다. 이게 다른 말로는 ‘한국 민족문화 원형 발굴사업’이라는 거다. 한국의 고유한 의식주와 예술을 산업화하여 세계화를 노리는 비전을 이 기초에 담은 것이다. ‘한류’는 바로 이 기초와 만났을 때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거니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짜 논 것이고 지금도 이 사업은 문화관광부에서 잘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 그 밖에 각 문화장르별로 각론을 수립했고 영화와 기초예술의 중장기 발전계획 같은 현실적인 사업안들을 만들어 냈다.


반기문 UN사무총장 공관 벽에도 ‘한지’를 발랐다지?

그렇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기분이 좋았고, 한 스타일 관련 사업자들이 용기와 희망을 많이 가졌을 거다. 이 분야가 정말 앞으로는 대단히 중요하다. 몽고나 중국에서도 한류가 열풍이다. 그런데 그걸 팔로우업 하는 상품이 없다. 김치가 세계 5대 음식에 선정되었다. 이것도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한지는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보다 우수하다. 닥나무 재배서부터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그런데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전주에 전통한지 공장들이 다 문을 닫고 있다. 그럼 우리 전통적 생산법이 사라진다. 그러면 안되는 거다.


하긴. 김명곤 장관 재임시절에 문화관광부는 상당히 바빠 보였었다.

정말로 일을 많이 했다.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 정부의 부처평가중 문화관광부는 ‘하’를 받은 상태였다. 1년 만에 그걸 ‘중상’까지 끌어올렸으니 정신없이 일한 게 맞다. 인천 아시안 게임이나 대구 육상 세계선수권 대회를 유치했고, 결국 실패했지만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참 공을 많이 들였었다.


<바다이야기>로 어수선할 때 취임했었는데.

말도 마라. 정말 바다에 빠져 허우적댔다. 처음 몇 달간 너무 힘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로 게임 산업의 부작용을 다 해소할 수 있었다. 게임 진흥에 관한 법률 다 고쳤고 사행성 게임에 대한 제도를 아주 강하게 바꿀 수 있었다. ‘게임물 등급 위원회’라는 새 기관도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는 제도적으로 깔끔해졌다.


맞다. 수 만개의 도박장이 다 자취를 감췄다.

업계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다. 전쟁하듯이 싸우면서 해결한 거다.




김명곤이 장관으로 취임한 것은 <바다이야기>로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던 2006년 3월이었다. 그 문제의 해결을 담당해야 할 주무부서의 장관으로 ‘광대 김명곤’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문화예술계에서는 예술가로 살아왔고 또한 성공적으로 국립극장장직을 수행한 이력에 큰 기대도 했었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일반국민들은 많이들 우려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취임한 김명곤은 결국 1년 만에 그 많던 도박장들을 모두 몰아냈다. 마치 ‘암행어사’나 ‘해결사’의 캐릭터를 연기하듯 해낸 것이다.



퇴임 당시 여론에선 50여개 산하기관의 인사권 문제로 청와대와 틈이 벌어졌다는 설이 있었는데.

부임하자마자 <바다이야기>문제로 유진룡차관 인사문제가 언론에 터지고 해서 아주 어려웠다. 그 와중에 분명하게 기준을 잡은 건 ‘나에게 부여된 인사권은 내가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퇴임 날까지 그 원칙을 고수했다.


그래서 압력이나 청탁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물론이다. 나로 인해 거부감을 느낀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원칙을 지켰다.


분명히 대답해 달라. 그 인사 청탁에 관한 압력들을 거절한 문제 때문에 조기 퇴진 한 건가?

난 모른다.


알았다. 너무 짧았다는 아쉬움은 없는가?

큰 아쉬움은 없다. 언제까지 한다하는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장관 이란 건 ‘계약직’만도 못한 ‘임시직’아닌가?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하고 돌아왔다고 자평한다. 다만 내가 펼치고자 했고 소중하게 추진했던 정책이나 사업이 커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꼭 장관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뜻 있는 사람들과 계속 추진하려고 한다.



이제 김명곤이란 사람에 대해 묻자. 어떤 꿈이 있었나?

아까도 말했지만 뭐든 해보자는 성격이기에 꿈이 참 많았다. 어릴 땐 문학, 음악에 대한 꿈이 있었다. 문학하려고 서울대 독문과 갔는데 연극반 들어가면서 ‘연극배우’가 되는 걸로 꿈이 바뀐거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무대에 서자 모르고 있던 내 속의 ‘끼’가 튀어나왔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판소리를 접하고는 명창이 되고 싶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을 만나 영화를 하게 되니까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계속 ‘예인’ 어쩌면 ‘광대’의 꿈을 키워온 거다. 하지만 관직이나 장관을 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국립극장장을 연임하며 6년이나 했다.

국립극장장이 된 것은 분명히 인생의 한 전환점인데... 그 자리가 ‘관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리랑 소극장>을 오래 했으니 좀 큰 극장을 경영하면서 예술의 폭을 넓히겠다는 생각일 뿐이었다. 실제로 국립극장장의 주 업무는 예술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배우하다가, 극단 대표하다가 장관하게 된 일련의 내 삶은 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 사는 방법’이 바뀐 것일 뿐이다.


국민의 정부를 이어받은 참여 정부 시절에 국립극장장이 되어서 정부로부터 지역혜택(김명곤의 고향은 전주이다.)을 받았다는 오해도 있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오해다. 신문에서 공고보고 이력서 냈다니까. 국립극장장은 그 전까지 내가 했던 이력이 허락한 기회였을 뿐이다. 국립극장은 ‘책임운영기관 1호’로 선정된 곳이다. 정부 관리들이 하다가 너무 경영이 안 되고 채산성이 생기지 않아서 민간인을 뽑아보자는 제도에 내가 공채로 된 것이다.


국립극장장 시절 여러 기관 평가에서 ‘1등’을 자주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맞다. 극장장 부임한 첫해에 내 연봉이 5천만 원 정도였는데 매년 평가로 인한 보너스를 받다보니 마지막해인 6년차에는 연봉 1억원이 훨씬 넘어섰다. 그때 대통령, 국무총리보다 연봉이 많다고 해서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전까진 참 힘들게 살았다고 알고 있다. 고생스럽고 암울했던 때를 이야기해 달라.

대학교 1학년 때 입학금과 첫 달 하숙비를 친척으로부터 후원받은 이후부터는 나 혼자 벌면서 학교를 다녔다. 아르바이트에 과외에 연극까지 미쳤으니 완전히 거지처럼 살다가 학교를 졸업했다. 직장생활 2년쯤 할 땐 좀 괜찮았는데 도저히 연극의 꿈을 버리지 못하겠어서 집어치웠더니 다시 밥을 먹을 방법이 막막했다. 정말 마당극, 민족극 할 때는 독립운동가의 심정이었다. 원고 쓰고, 책 번역하고 영화출연하면서 조금 돈이 생기면 연극에 쏟아 붓고... 보통 어려웠던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몸도 안 좋아지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단 한 가지 부모님께는 자식노릇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럽다. 두 분 모두 너무 일찍 가셨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

두 분 모두 날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언제나, 뭘 해도 날 믿어주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 두 분 덕분에 난 불우한 환경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인생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거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과 잘 맞지 않으셨던 분이다. 30대 이후에 돈 벌이를 잘 못하셨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남자는 쉽게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해라.’라고 가르치셨다. 독문학을 하겠다 했을 때도, 연극을, 판소리를 한다고 할 때도 ‘해라.’ 라고 만 하셨던 분이다. 그러면서 내가 배우가 되기 전에도 판소리 관련해서 신문 기사가 나오면 아들을 위해 그런 것들을 다 오려두신 분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남편이나 자식에게 화 한번 낸 적이 없으신 분이다. 누구랑 싸우거나 하시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그냥 웃기만 하던 천사 같은 분이었다. 나는 그 아버지의 ‘고집’과 어머니의 ‘참을성’을 배운 거다.


두 분 다 왜 일찍 돌아가셨나?

그게 한이다. 어머니는 먼저 일찍 가셨고 아버지도 아프셨는데 치료도 제대로 못해보시고 가셨다. 그때 난 결혼도 안한 상태였다. <서편제>가 터졌을 때 친척과 누나들이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고 말한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국립극장장이나 장관이 되는 모습에도 정말 기뻐하셨을 것이다. 멀쩡한 직장 때려치고 연극한다고 했을 때도 날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기에 더 한이 되는 거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흐뭇해 하셨을텐데...’라고 말 하면서 김명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새벽 일찍 가족과 함께 용미리 묘지를 찾는다고 했다. 한국예술종학학교에 다니는 딸과 고등학생인 그의 아들이 어릴 때 찍은 사진들의 배경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지밖에 없다고 투덜거린다는 정도다.




임권택, 이장호 감독도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 아닌가?

맞다. 이장호 감독은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사주며 영화를 시작하게 해준 형이다. 그게 <바보선언>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한마디로 아버지 같은 분이다. 한 분이 더 계신데 바로 박초월 선생님이다. 나는 이 분을 ‘둘째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연히 만난 이 분들이 내 삶을 바꿔 버린거다.



국창 박초월선생의 제자는 어떻게 된 건가?

대학 때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 녀석과 종로3가를 지나가다가 단성사 뒷 건물 꼭대기에 있는 박초월선생 판소리 학원을 보고 그냥 무작정 찾아간 거다. 판소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가 첫 달 학원비 대줬고, 그 다음 달부턴 박초월 선생님 장학생이 됐다. 재주가 있었다기 보다는 서울대생이 판소리 배운다고 하니까 박선생님이 신기해했던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학원에서 먹고 자게 해주셨다. 아침에 눈뜨면 선생님이 밥을 해 가지고 오셔서 주셨다. 그러다가 선생님 아들 공부 가르쳐 주라고 하셔서 선생님 댁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 거다. 그때 학원에서 단성사 간판이 내려다 보였는데 그걸 보면서 내 인생에 어떻게 될껀가 걱정하고 그랬다. 그 간판에 내 얼굴이 그려질지는 상상도 못했다. (서편제는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겠다.

부모님들도 그렇고, 박초월 선생님도 그렇다. 어렵고 힘든일이 생길 때마다 그 분들은 날 믿어주겠지... 지금 날 보면서 웃어주시겠지... 하며 문제를 뛰어 넘는다. 좌절하고 힘들 때 여전히 그 분들이 힘이 된다.


김명곤은 분명히 우리 다음세대들을 위해 한마디 할 수 있고, 한마디 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얼마 전 고3인 아들의 친구들과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물었다. 대답이 신문기자다, 벤처기업가다 하고 매우 현실적인 소박한 꿈을 쏟아냈다. 나는 말했다. 꿈은 미루나무보다 태양을 겨냥해야 한다며 빌 게이츠나 링컨 같은 인물을 꿈꾸며 살아야 한다고. 사실 나는 대학시절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남기겠다는 꿈을 꾸며 살았다. 열심히 살다보니 어쩌다 장관을 했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이지 아직 진정한 꿈은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젊은이는 불가능하다는 꿈에 도전해야 한다. 히말라야를 목표로 산에 올라야 백두산 정도를 쉽게 오를 수 있다.


아직도 못 이룬 꿈이 있고 올라가야할 꿈이 있다면 어떤 꿈인가?

내 마음속에는 솔개와 관련한 우화가 하나 있다. 보통 솔개가 40여년을 산다면 내가 생각하는 솔개는 70년을 산다. 그 놈은 부리의 수명이 다하면 절벽에 날아올라 바위를 쪼아 새 부리가 나도록 낡은 것을 부셔버린다. 깃털도 묵은 것을 날려 버리고 발톱도 뽑아 버린다. 갱생의 솔개가 새롭게 사냥을 떠나기 위해 창공에 떠오르는 그런 우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마음속의 솔개를 생각하며 아마도 오르지 못할 불가능한 꿈이지만 그 꿈들을 버리지 않고 산다.


욕망은 끝이 없어서 어렵게 꿈을 이루어도 빛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또 다른 꿈에 도전하게 되지만 인생은 짧다. 꿈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가?

배우가 무대에서 조명을 받는 시간은 길어야 2시간이다. 그걸 받기 위해서는 어둠속에서 지낸 수천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찬란해지는 거다. 모두가 이걸 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이 어둠을 참아내지 못한다. 나도 젊었을 적엔 단지 이 어둠을 참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 보니 나는 그 어둠을 즐겼던 거다. 한창 연극할 때 차비가 없어서 연습장, 극장을 걸어 다니면서 미친놈 소리도 들었고, 여자 친구랑 사귀다가도 공연이 시작되면 매번 깨졌다. 하지만 그게 고통스럽다거나 그래서 꼭 나중에 성공해야지... 이런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냥 차비 없어도, 여자 친구 잃어버려도 연극이 너무 좋으니까 했던 거다. 그렇게 올인 했지만 못 올라간 공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제일 행복했다. 그때도 행복했고 지금 기억해도 행복한 거다. 그러니까 젊은 친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전 장관 김명곤’은 분명히 ‘광대 김명곤’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느 지하 소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안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예인의 얼굴’ 말이다. 김명곤은 매사에 낙관적이다. 너무나 낙관적인. 그래 어쩌면 그것이 세상이 ‘광대’에게 허락한 눈(目)이다. 이 눈으로 광대는 세상을 웃기고, 울리고, 조롱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곤은 우리사회에 매우 소중한 광대다. 그에겐 이 낙관적인 광대의 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 시간과 아픔이 있다. 그 눈으로 해치워버린 큼지막한 배역들이 있다. 광대 김명곤, 영화감독이 된 후 그의 다음 난장이 궁금하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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