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사교육 해방’ 영화 준비하는 최원영 감독
‘청소년의 사교육 해방’ 영화 준비하는 최원영 감독
  • 김두호
  • 승인 201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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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만에 집념의 영화인으로 돌아온 CF감독의 원조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최원영 감독(64)은 영화와 CF 양쪽 분야에서 감독 활동을 해왔다. 작품 활동 이력으로 보면 CF감독이 본업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광고대행업종이 태동하던 시기에 선두기업인 오리콤과 제일기획에서 방송 광고를 연출한 CF감독의 1세대이며 그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스타였다. 1977년에는 전 미국 광고페스티벌에서 CLIO 본상을 받아 국내 광고인으로는 최초의 해외 광고제 수상을 기록했다. 그로부터 방송광고 문화의 지평을 연 CF 분야 거장의 한사람으로 30여 년간 60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했다.


영화는 <한국의 철새> 등 문화영화 감독(국립영화제작소)으로 발표한 다큐멘터리 7편이 있지만 장편 극영화는 1986년 자신이 직접 제작하고 연출한 <가슴을 펴라> 한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원영 감독의 인생 중심에는 CF보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동경심으로 채워져 있다. 한양대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1971년 그의 시나리오 <딸 부잣집>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하면서부터 그는 평생을 두고 영화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광고회사를 차려 번 돈을 투자해 연출한 그의 첫 영화 <가슴을 펴라>는 상업성 영화가 판을 치던 때에 자전거 전국일주에 나선 정년퇴직 교장과 두 청소년을 통해 인간 승리의 귀감을 그려낸 따뜻한 감동 영화였다. 국내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지만 지금도 5월 청소년의 달이면 TV가 선정해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좋은 필름이다. 영화를 통해 청소년에게 가치 있는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감독의 창작 의도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최근 시나리오를 완성해 연출을 준비 중인 영화 <아름다운 바다로>도 국경을 초월한 자유롭고 맑은 동심의 세계를 통해 사교육의 폐단을 일깨워 주는 청소년 영화다. 진지하고 긴장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첫 작품과 달리 새 작품은 어학연수 간 어린이들이 불행한 현지 소녀를 만나 벌이는 사건을 코믹 어드벤처로 연출하게 된다.


자전거 전국일주를 직접 체험한 뒤 <가슴을 펴라> 시나리오를 썼던 최 감독은 이번에도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나기 위해 어학연수를 갔던 곳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시나리오를 직접 완성했다. 그는 광고기업 운영에서 손을 뗀 후 오르지 영화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일에 파묻혀 일주일 중 평균 4일간을 철야 작업으로 지새웠다는 CF감독 시절의 열정을 지금도 영화 작업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준비 중인 영화 <아름다운 바다로>는 어떤 작품인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코믹 어드벤처의 오락성과 교육적이면서 가족영화라는 장르에 주안을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잘못된 교육환경으로 자유로운 성장과 꿈을 잃어버린 어린이들이 해방된 공간에서 유쾌하게 펼치는 사랑과 모험의 판타지 같은 영화다.


줄거리를 들려 달라.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간 개구쟁이 여섯 꼬마들이 현지에서 도둑을 추적하다가 길을 잃는다. 바닷가 오두막집에서 불쌍한 소녀 코니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돕기 위해 겪는 사건과 모험을 아름다운 자연을 무대로 그려낼 영화지만 영화를 통해 영어공부가 되도록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반영했다. 이를테면 영어의 문법 구조를 인물의 캐릭터와 스토리 구성에 반영했다. 영어교재와 게임의 캐릭터 사업 등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의 비즈니스 기능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면 아이디어와 창작의 모티브가 된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직업이나 직장생활에 변화가 찾아오면 내 인생에서 어떤 돌파구나 반란의 전기를 만드는 버릇이 있다. 오랫동안 근무하던 광고회사를 떠나면서 평소 꿈꾸던 전국일주 자전거 여행을 시도했고 그 체험을 소재로 영화 <가슴을 펴라>(1986년)를 만들었다. 운영하던 광고기업(CM랜드)에서 손을 떼고부터는 평생 잊어버린 적이 없는 영화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제작이나 연출 환경이 과거 같지 않았다.

어느덧 나도 실버 세대로 접어들었다.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일주일 중 나흘간 철야작업을 하고 살던 내 인생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불행이고 고통이었다. 죽는 날까지 신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것이 내 인생관이다. 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세계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2008년 1차적인 실행단계로 부족한 영어연수를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세부에서 장기간 영어공부를 하면서 한국에서 몰려오는 청소년 연수생을 비롯해 현지 사회의 재미있는 풍경을 접할 수 있었고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이 아주 독특한 영화소재가 될 수 있다는 데 무릎을 치고 돌아와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나도 학부모의 한 사람이지만 사교육의 감옥에서 성장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교육환경에 분노를 느끼며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로케이션 장소도 80% 이상 헌팅을 해두고 있다.




최 감독은 영화와 CF라는 두 분야에서 연출 활동을 해온 드문 직업인이다. 한 때 CF 감독이 영화감독보다 더 선망의 직업으로 인기를 모았다. 20초 안팎의 짧은 CF를 통해 상품과 모델, 카피들이 유행문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어느 쪽을 먼저 시작한 것인가?

영화가 먼저였고 내 평생 마음속의 직업은 영화작가였다. CF는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직업이었고 실질적으로 내 인생을 바친 일터가 분명했지만 직업으로 애정을 두지 못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외롭고 가난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내가 7살 때 어머니를 여의면서 새어머니가 입주했다. 형제가 많아 나는 할머니 댁에서 고모 댁으로 옮겨 다니며 자랐다. 서울 신설동에서 출생해 청구 장충 돈암 광희초등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흥인초교에서 졸업했다. 주로 혼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생겨 자립심도 강했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신도 강해 싸움도 잘했다. 아무리 힘센 친구와 싸워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아도 절대 항복하지 않고 씩 웃는 얼굴로 응답해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독종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빨리 돈 벌 생각으로 덕수상고를 다녔지만 대학에 진학하며 영화(한양대 영화과)를 선택했다. 얼굴에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이 싸움질하다가 대학 2년 때 용산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이렇게 살다가 큰일 나겠다는 대오각성을 하고 공부에 눈을 돌렸다.


청소년기에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고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싸움꾼에서 공부 잘하는 모범학생이 된 것인가?

열심히 공부를 시작한 것이 영화 전공의 학생에게는 당시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사는 동네 이웃인 장충동에 유명한 김수용 감독이 살았다. 시나리오를 한 편씩 쓰면 직접 들고 찾아갔다. 감독님은 만나지 못하고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를 문전에서 만나 내가 쓴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받아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아주머니가 되돌려 준 시나리오 겉장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최원영, 맞춤법이나 제대로 써라!”는 짤막한 지적이었지만 너무 반가웠다. 감독님이 내 원고를 제대로 보았다는 것이 흐뭇했고 희망을 주었다.


재미있는 일화다.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나는 대학 4학년 때 네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해 또 전달했다. 끈질긴 도전에 감독님은 “시나리오는 소질이 없어도 끈기는 있구나. 연출부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해라”며 촬영 현장으로 불렀다. 1966년이었다. 당시 감독님은 <소복> <애인> <돌아가는 삼각지> 등 세 편의 영화를 동시에 연출하던 인기 감독이었다. 나는 퍼스트 조감독부터 여러 명이 매달려 있는 연출팀에서 막내 연출멤버로 참여했지만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선배 스태프들 틈에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 후에도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리석회사의 세일즈맨을 하며 결국 또 시나리오에 매달려 1971년 감독님 댁을 다시 찾았다. 새로 쓴 <딸 부잣집> 시나리오를 그때 그 도우미 아주머니를 통해 전달했고 과거처럼 5일쯤 후 되돌려 받기 위해 찾아갔다가 예상 밖의 일이 터졌다. 감독님이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돌려주지 않고 찾아온 나를 응접실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 때 감독님과 나눈 대화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 드디어 해냈구나. 이 작품은 내가 만들 거야.”라는 첫 마디에 나는 어리벙벙해서 웃기만 했다.

“너, 요즘은 뭘 하나? 영화는 안 해?”

“영화로 못 먹고 살 것 같아서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수고 많이 했어. 지금 어디로 갈 건가?”

“공사 현장에 가야 해요.”

인사를 하고 김수용 감독님의 장충동 저택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감독님 댁을 드나든 지 8년 만에 꿈이 내 손에 잡혀 감정이 북받쳤다. <딸 부잣집>시나리오는 당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신봉승 작가가 편당 50만원을 받던 시기에 35만원을 받았다. 대기업 사원의 1, 2년 연봉액수였다.


그 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이유는?

시나리오를 쓸 여유가 없어졌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정연구 과장이 문화영화 제작요원을 찾던 중에 <딸 부잣집> 시나리오의 인쇄본을 읽고 나를 스카우트했다. <딸 부잣집>이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이다. 3년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한국의 철새> 등 문화영화의 연출을 맡아 영화 제작 기법을 폭넓게 접하며 다큐멘터리 작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CF 감독이 된 것은 언제, 어떤 동기에서인가?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해 나의 연출을 지켜 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추천해서 1975년 국내 첫 광고대행사로 출범한 오리콤에 스카웃 됐다. CF감독이라는 말이 낯설 때였다. 방송 광고는 몇 초에 승부와 승패를 거는 작업이다. 촌철살인의 재치와 카피, 연출 센스를 발휘하려면 혹독한 집념과 근성이 필요한데 내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방송광고 문화가 제대로 정착이 안 된 시기인 1977년 나의 작품이 전 미국 광고페스티벌 CLIO 본상과 전 일본 광고페스티벌에서 ACC 본상 등을 받았다. 국내 광고 작품이 해외 광고제에서 평가받은 첫 케이스였다.


방송광고의 개척시대에 일어난 해프닝이나 비화를 듣고 싶다. 본인이 겪은 일화 중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어떤 것인가?

1978년 제일기획의 창립 초기에 CM팀장으로 스카웃되어 오리콤에서 회사를 옮겼다. 앞서 언급했지만 나는 싸움꾼이었던 청소년기에 누구와 싸워 얻어맞고 형편없이 패해도 항복을 거부하는 성깔이 있었다. 오히려 재도전 기회를 생각하며 패자의 희열을 즐겼다. CF감독 시절 내가 좋아하는 광고는 성공하기 힘든 광고나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광고가 많았지만 그것을 맡을 때마다 흥분했다.


롯데제과, 삼성전자, 해태, 제일모직, 크라운맥주, 맥스웰커피, 갤로그, 질레트, 유니레버, 기아, 대우자동차 등 내가 연출한 많은 기업 광고 중에 크라운맥주 광고 얘기가 나의 일에 대한 근성을 잘 드러낸 사례일 것이다. OB맥주에 밀려 만년 2위에 머물렀던 크라운맥주의 광고주는 계약관계에 있던 제일기획에 해약을 통고하고 공개입찰을 통해 새 대행사 계약을 추진했다. 5대 광고대행사가 참가했고 이미 불신을 당한 제일기획은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며 뛰어들어 경쟁에 참가했다. 나는 광고주 회장과의 마지막 면담에서 펩시가 코카콜라에 도전해 성공한 전략 등 세계 광고시장의 성공 사례를 들고 나가 크라운맥주 광고를 되찾아오는데 성공했고, 큰 소리쳤던 대로 ‘조용필 캠페인’ 광고를 히트시켜 판매시장에서 처음으로 크라운이 OB를 앞지르는 신화를 만들었다.


떠올릴 때마다 엔도르핀이 증가할 것 같은 성공담이다. 개인적으로 광고회사를 설립한 것은 그런 자신감과 역량의 결과인가?

아니다. 부장으로 있으면서 결재라인의 임원과 갈등이 있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비굴하게 굽히기 싫어서 제일기획에 사표를 냈다. 그길로 평소 생각하던 자전거 전국 일주여행을 떠났다. 울릉도의 봉래폭포 밑에서 철도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뒤 난생 처음 자기를 찾아 여행 중인 61세 어른을 만났다. 새벽까지 막걸리를 마시며 인생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 그분을 모델로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가 <가슴을 펴라>였다.

1983년 8월 남한 일주를 하고 돌아와 CM랜드라는 광고 제작회사를 설립했고 틈틈이 준비한 시나리오로 개인 재산을 투자해 2년 후 카메라를 돌렸다.


비바람 몰아치는 폭우 속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원로 배우 고설봉(당시 78세)과 두 소년(정상수 김세준)의 열연 장면들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특히 극한상황에서의 인간 심리를 표현한 연출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각오로 덤빈다. 군대생활도 최전방에서 비상시 적진을 침투하는 특수부대원으로 극기 훈련을 받으며 복무했다. 인간이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연출 작업에는 자신감을 느낀다.


세계 일주를 위해 영어연수를 갔다가 <아름다운 바다로>를 준비하게 되었다는데 이제 여행 계획은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미룬 것인가?

꿈꾸던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영화 작업을 위해 미루고 있을 뿐이다. 영화 일이든 여행을 떠나든 움직이지 않고 사는 것은 나의 사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참으로 억울하게 산 친구들이 많다. 어릴 때는 가난하게 자라고 젊어서는 죽도록 일하며 자식들 교육뒷바라지에서 결혼, 주택 뒷바라지까지 하고 노후를 쓸쓸하게 보낸다. 세계 일주를 계획했던 것도 의기소침하게 사는 많은 친구들에게 멋지게 사는 인생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최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바다로>가 자유로운 성장환경을 갈망하는 어린이들의 꿈을 소재로 삼았지만 지금 청소년들은 풍요로운 시대에서 살면서도 사교육의 속박 등 과열 교육환경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다. 자녀교육 문제로 겪은 고민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밝힐 수 있는가?

나는 자식들에게 공부와 관련해 스트레스를 준 기억이 없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IT기업에 근무하는 아들(36)과 미술을 전공하고 음악전문 채널의 PD로 있는 딸(32)이 있다. 아들은 공부를 잘했지만 딸은 중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아 나는 대학갈 생각을 버리고 기술을 배워 사업 쪽으로 나가기를 권했다. 억지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해방감을 느낀 딸이 뒤에 성적이 좋아졌다. 오히려 자발적인 각성을 불러 스트레스를 안 받고 자유롭게 공부해 유학까지 다녀왔다. 딸은 아버지가 대학을 포기하도록 했을 때 마음속으로는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친구들과 달리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가르쳐준 것으로 고마워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안주고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최 감독은 자신의 세대가 불행한 세대라고 했는데 자녀를 위해 투자한 비용은 어느 정도인가?

교육비 외에 큰 돈을 쓸 일이 없었다. 딸이 결혼했지만 가까운 친지 50여명만 초대해 조촐하게 치렀다. 결혼 비용이 2000만원을 넘지 않았다. 많은 사람에게 부담을 주며 시끄럽게 혼례를 치루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고집 때문이다.

아들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체력유지에 늘 불안감을 안고 다녔으나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시도했던 자전거 전국일주를 해냈다. 6주 동안 3면의 해안선과 내륙을 일주했다. 처음으로 자식에게 눈물을 보인 것도 길을 떠나며 인사를 해올 때였다. 더 한층 아버지를 놀라게 한 일은 직장생활을 쉬면서 3년간 세계를 샅샅이 일주하고 온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자식들이 재정적이든 정신적이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찾아가는 점에서 부모로 부담을 느끼지 않아 행운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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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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