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에 깨달은 ‘조연’의 설움, 배우 이병헌
나이 마흔에 깨달은 ‘조연’의 설움, 배우 이병헌
  • 이승우
  • 승인 200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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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팬들 덕에 그 수모 갚아” / 이승우



[인터뷰365 이승우] 인기 스타 이병헌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전미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에도 개봉중인 이병헌 출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 지난 7일 미국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것이다.

이병헌은 데뷔 17년 만에,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의 톱스타와 한류 스타에 안주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 새로운 모험을 했다. 동명의 유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지.아이.조’에서 악역인 스톰 쉐도우 역을 맡은 것이다. 영화를 본 국내 관객들은 이병헌의 연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언제나 주연이었던 그가 미국 촬영현장에서는 겪었던 ‘조연의 설움’은 만만치 않았다. 촬영현장에 아침부터 나가 대기했지만 늦은 오후에야 촬영이 없다는 말도 들었고 주인공용이 아닌 ‘조연 연기자용’ 트레일러에서 분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경험마저 ‘즐겼다’고 말하는 이병헌. 그의 달콤살벌한 할리우드 진출기를 들어본다.



‘지.아이.조’에서 본인의 연기에 만족하나.

90% 이상 만족한다. 내가 워낙 컴맹인데도 모든 관련 기사를 꼼꼼히 검색하느라 잠도 못 잔다. 그만큼 우리 관객들이 ‘지.아이.조’에서의 내 연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컸다. 욕만 먹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일반 시사 반응이 비중 있고 존재감 있는 역할이란 평이 많아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중이다.


영어 대사도 거의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란 평가다.

현장에서도 발음이나 억양에 큰 지적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아서 걱정 안하고 뛰어들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보이스 트레이너가 있다고 들어서 마음 편히 갔더니, 그 수많은 배우들을 봐주는 트레이너가 딱 한 명이더라.(웃음) 몇 개월 동안 내게 할당된 시간은 단 두 시간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식 억양을 수정해주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꼼꼼히 지적해줘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영어를 따로 배운 건 십대 후반에 2년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동안 해왔던 영어가 올바른 영어가 아니었다는 걸 절감했다.



지난달 29일 내한한 시에나 밀러와의 스킨십이 화제가 됐었다.

미국식 스킨십인데. 그게 좀 이상하게 비춰진 것 같다. 시에나와 나는 현장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는 사이였다. 시에나는 블록버스터가 처음이었고, 나는 할리우드가 처음이어서 서로 잘 통했다. 촬영 현장에서도 나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의 남자친구와 셋이 만난 적도 있기 때문에 별 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다만 포스터 촬영 때 내 복근을 보더니 식스팩 처음 봤다고 놀라더라. 과할 정도로 오버해서 칭찬해주는 게 시에나의 평소 스타일이다.


영화에서 시에나는 선과 악을 오가는 여자로 나온다. 실제 본인은 어떤 여성 스타일에 끌리는 편인가.

솔직히 어렸을 때는 나쁜 여자라도 예쁜 여자가 좋았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친구 같은 여자가 더 좋다.


현장에서 감독한테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대본 일부도 수정해 나간 걸로 알고 있다. 일본 닌자도 한국 검객으로 바꾸고 무술도 원래 짜여 있던 합에 태권도를 넣었다고 들었다.

내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 있는데 그때 한국어를 넣는 것이 어떻겠냐고 감독에게 건의했더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며 수정했다. 내 어린 시절이 나오는데, 일어로 말을 한다면 아마 한국 관객들은 미친 듯이 웃을 거라고 설득했다. 태국 아이가 내 아역 배우로 선발됐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한국 억양이 안 나오더라. 가르치다 가르치다 안돼서 한국 어린이 더빙을 하자고까지 말이 나왔는데, 결국 못 구했다.

태권도 동작을 넣은 것은 그런 설정이 없으면 완전 일본 닌자가 되는 거였으니까. 뭔가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사소한 부분에서 몰입이 깨지는 게 창피했을 뿐이다. 원래 내 액션은 쿵푸에 가까웠고, 내 라이벌인 스네이크는 화려한 우슈가 기본이었다. 거기다가 할리우드 무술팀은 중국계가 거의 장악을 하고 있어서 쿵푸 동작이 기본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왕이면 발차기 하나라도 태권도를 가미해 파워풀한 느낌을 살리고 싶어 이런 저런 동작을 제시했다. 결국 무리하게 욕심내서 무릎 인대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지만.


채닝과 시에나는 2,3편을 한꺼번에 계약했다고 들었다.

나도 2,3편에 대한 조항을 넣고 최종 사인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또 한 편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아이 컴 위드 더 레인'까지 악역과의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악역을 연기하면서 느끼는 매력이 따로 있나.

한번도 막연한 악역을 연기한 적은 없다. 아무리 악역이라도 그 설정은 배우의 몫이니까. 어릴 적 트라우마라던가 가정환경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연구를 꼭 거친다. 그게 악역의 매력인 것 같다.



강제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출연도 이야기가 오가던데.

사적인 자리에서 오간 말인데 기사화된 거다.(웃음) 일단 다른 작품 하시고 본인 작품 들어간다고 하시니 그때를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영화 프로모션 말고 다른 홍보 활동을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원래 예능프로는 질색인가.

나가고 싶은데 제안도 안 들어온다. 워낙 안 하니까 그런 것 같다. ‘무릎팍도사’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생각 없냐고? 솔직히 거기 나오는 사람들 보면서 매저키스트인가, 왜 고통을 당하면서 즐거워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3대 1로 당하는데 되겠나.(웃음)


지금은 무산됐지만 ‘그린 호넷’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던 권상우가 조언을 구해왔다고 들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많이 신경 썼었다. 특히 영어부분을 많이 걱정했다. 그래서 언어는 중요하긴 하지만 그 영화가 배우 권상우에게 요구하는 게 어떤 부분인지 빨리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줬다.


할리우드에서 촬영하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을 한 가지씩 꼽자면.

좋은 점은, 한국식으로 하자면 ‘밥차’ 규모가 거의 블록버스터라는 점.(웃음) 정말 웬만한 식당보다 규모가 컸다. 여러 나라 음식이 다 나오고 채식주의자를 고려한 식단까지 있었다. 그날 아침 현장에 도착해 각자 먹고 싶은 걸 종이에 적어 내면 점심 때 그 메뉴가 나왔다. 나빴던 건 식이요법 때문에 그 밥차를 이용 못했다는 것. 3개월 동안 구경만 했다. 내 메뉴는 언제나 브로콜리와 닭가슴살, 계란 흰자 6개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신경이 예민해지고 식성도 이상해져 평소엔 즐기지 않던 자장면과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타지생활도 서러운데 먹는 것도 그랬으니 서러움이 더했겠다.

어느 날엔 홀리듯이 햄버거 냄새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더니, 맥도날드보다 더 큰 햄버거 트레일러가 와서 내 눈 앞에서 열리더라. 못 먹은 게 얼마나 한이 되던지, 식이요법 후엔 배 터지도록 햄버거를 먹는 꿈만 꿨다. 또 다른 서러움은, 이건 설명하기 굉장히 묘한 경험인데, 조연 연기를 하면서 새삼 알게 된 것들이다. 분장도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이 사람들은 주인공 분장만 한다)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시스턴트나 그 조수들이 해줬다. 아침 6시에 나가서 오후 4시쯤 ‘오늘 촬영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여지껏 조연 생활 하는 친구들 입장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경험들이 나는 정말 좋았다. 그 순간들을 즐기기도 했고.


설움 당하는 느낌을 즐겼다고?

첫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단합 대회 식으로 소머즈 감독과 주조연 배우, 제작자 이렇게 유명 식당에 모이는 날이 있었다. 난 당연히 서먹서먹했고 또 몸 만드느라 뭘 먹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먼저 일어나는데 시에나랑 다른 출연 배우들 찍는다고 파파라치가 잔뜩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나가니까 자기들끼리 누구냐고 쑥덕거리더니 아무도 관심없이 길을 비켜주더라. 나오면서 파파라치가 안 따라 다니니깐 편하구나 하며 스스로 합리화시켰다.(웃음)


이번 일본과 한국에서 팬들의 환대를 보고 미국 배우들이 뭐라고 하던가.

좀 패닉상태에 빠져서 미안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사람들이 몰린 걸 보고, 평생에 그렇게 사람이 몰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며 무서워했다.(웃음)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김포 공항에까지 내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으니까 “널 이제부터 마이클 잭슨이라고 부를게”라고 하더라. 동양에서 온 꼬마라고 봤는데, 팬들 덕분에 기를 폈다. LA에서의 수모를 갚은 거지. 한국에서의 환대를 보더니 이번엔 “아깐 우리가 잘 못 봤어. 이제 보니 넌 엘비스 프레슬리구나”라더라.(웃음)



앞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나도 그런 편이었지만, 유명해지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관리 차원에서 나를 닫아버리게 된다. 그런 갇힌 사고방식으로 살다 보면 뭔가 새로운 것에 부딪히길 꺼리게 되는데, 할리우드에 가서 많이 부딪히고 많이 열리게 됐다. 후배들도 할리우드에 가게 되면 겁내지 말고 먼저 다가가기를 권한다. 또 할리우드에서 한국 영화 리메이크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잘 활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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