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동네 촌장의 별세
미술동네 촌장의 별세
  • 정중헌
  • 승인 200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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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훈훈한 온기는 아직도 세상에 그대로 랍니다. / 정중헌
고 이규일 아트인컬쳐 고문


한국 미술계의 어른 한 분이 지난 4일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미술기자 출신으로 미술 전문지 발행인과 근현대미술품 감정가, 또한 미술평론가로 활동해온 이규일(68) ‘아트인컬쳐’ 고문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별세한 것이다. 미술기자 선후배로, 미사사(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으로 필자와는 정말 막역한 사이인 이규일 선배는 올 봄까지만 해도 신수가 훤했다. 낙천적인 성격에 식사 맛나게 하시고 매사에 훈훈한 바람을 일으켰던 이 선배가 지난여름 창백한 얼굴로 인사동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필자를 비롯해 미술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 저렇게 수척해졌다니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못된 암세포가 그를 덮치더니 불과 3~4개월 만에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이 선배는 지난 40년 동안 미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좋은 기사도 많이 썼지만 미술계 전반에 이로운 일을 도맡아 해왔다. 그래서 필자는 진 반 농 반으로 그 형님을 <미술동네 촌장>이라고 불렀다. 그 촌장은 투병 중에도 주위를 깔끔히 정리하려고 했다. 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뜬금없이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미술품들을 전시하려는데 ‘이규일을 아끼는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달라는 간청이었다. 그것이 선배와 맺은 인연의 끝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전시회는 성황이었고 필자는 서울아트가이드와 월간 ‘삶과 꿈’에 이규일과 그의 수장품 전에 쏠린 온정에 대하여 이런 글을 실었었다. 전시회 오프닝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미술동네 촌장 이규일 수장전에 쏠린 온정


한국 미술계는 지난 40여년 동안 양적으로 팽창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이해상관을 따져 이합집산하고, 파이를 넓히기 위한 공존보다는 서로 비방하고 시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미술동네에는 화가들을 주축으로 화상이 있고 콜렉터가 있다. 언론과 평론도 큰 몫을 하고, 화구와 액자와 운송에 이르는 네트워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가들의 권익을 위한 미술협회가 있고, 화상들은 친목과 정보 교환을 위한 화랑협회를 두고 있다. 감정기구도 있고, 미술 전문지들도 여럿이다.

그런데 미술동네는 제각각이어서 화합이 되지 않는다. 이중섭 박수근의 위작이 수천 점 나왔는데도 몇몇 외에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사간동에 유치하는 일도 흐지부지되는 양상이다. 미술시장은 커졌지만 화가들은 뒷전으로 내몰렸고, 신인들의 등용문은 여전히 비좁다. 미술계 인프라를 확충하고, 공신력을 회복하고, 미래의 자산인 신인 발굴과 육성에는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오로지 상술만 판을 치다보니 미술계가 삭막할 수밖에 없다.


이 모두가 미술계에 어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리사욕을 떠나 미술계 공동의 이익과 단합을 위해 헌신하고 현안을 조율하는 지도자가 미술계에 있는 것일까 자문해 볼 일이다. 미술계가 작고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래도 존경받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규모로 세를 따지고, 파이를 쪼개는 일에만 집착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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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저서 <이규일의 미술사랑방>


이런 미술동네에 옛 마을의 촌장 같은 분이 있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의 이규일 선배다. 그는 미술기자 시절에 운보 김기창 화백과 세계 일주를 할 만큼 유대가 깊었고, 이당 김은호 화백과 월전 장우성 화백의 일대기를 장기 연재해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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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를 그만 두고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월간미술’ 부장과 주간을 역임했다. 또한 인사동에 미술연구소 미술사랑과 출판사 도화서를 차려 ‘한국의 춘화’ 등을 펴냈다. 그 후 사재를 털어 월간 미술전문지 ‘아트’를 창간했다. 그로인한 부채도 안고 있다. 감정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지난해에는 백남준 추모문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내년에 칠순을 맞는 이규일 선배에게 얼마 전 병마가 덮쳤다.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그 좋던 혈색이 창백해졌고 거동도 불편해졌다. 매일 인사동 사무실에 출근해 글을 쓰고 미술인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던 그가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은 필자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미술기자를 함께 하며 친분을 쌓은 필자가 본 이규일 선배는 미술계 현상을 취재하기 보다는 심층에 접근해 뒷이야기까지 캐내는 천부적인 전문기자였다. 화가를 취재하기 위해 먼저 화가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았고 노소를 막론하고 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화가뿐 아니라 화상들과도 신의를 두텁게 쌓았다. 이 선배는 미술계나 동네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일을 했지 실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미술기자에서 큐레이터, 전문지 발행인을 거치며 두루 쌓은 경험과 풍부한 식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미술계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 해온 촌장의 병고는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규일 선배의 장점은 미술계 네트워킹이다. 서로 각각인 미술계에서 그는 화가와 화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고, 미술동네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고 묶어주는 사랑방 어른의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모두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으며, 미술게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어떤 대화에도 거침이 없었다. 구수한 농담도 자주 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격이 있었고 경우와 사리가 밝아 누구에게나 신임을 얻었다.


이 같은 미술동네 촌장 어른이 병고에 시달리자 사방에서 위로와 격려가 넘쳤고 지인들의 온정이 답지했다 내년 칠순에 의 저서를 내고 소장품 전을 열려고 했다는 이 선배의 말을 듣고 그를 아끼는 미술계 인사들이 전시회를 주선했다. 필자를 비롯해 화가, 화상, 평론가, 기자들이 <이규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전시를 도왔고, 삼청동의 리씨갤러리 이영희 관장이 장소를 제공해 ‘맑고 격 있는 이규일 수장 청완 작품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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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규일 고문의 5살때 사진을 그린 조덕현의 작품 <가족사>


전시작 대부분은 이 선배가 소장해온 작품들이지만. 화가와 화상 몇 분이 기증한 작품들도 함께 걸렸다. 미술동네 사람들은 그의 쾌유를 빌며 대다수 작품을 구입해 주었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픈 날에는 미술계. 출판계, 언론계 선후배들이 참석해 축하해 주면서 건투를 빌었다. 이날 이규일 선배는 여전히 쩌렁한 목소리로 미술동네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꿋꿋이 병마를 이겨내겠다고 다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규일 선배는 한국 미술계의 산 증인이기도 하지만 동네 촌장같은 존재다. 타산적인 미술계에서 그의 존재는 앞으로도 절실할 것이다. 이번 이규일 수장전에 보내준 지인들의 따뜻한 정은 자상한 그의 인품과 역할에 대한 존경이자 그의 쾌유를 진심으로 비는 염원의 발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중헌, 서울아트가이드 2007년 9월호>

이중섭 위작 논란시 감정에 참여한 고 이규일 고문(사진 오른쪽)


선배의 빈소는 그래도 쓸쓸하지 않았다. 평소 그를 아끼던 화가, 화상, 평론가, 기자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고인을 추억했다. 필자가 문상 갔을 때 이옥경 가나화랑 대표, 화가 박성남, 여운, 신양섭, 조각가 박석원, 삼성문화재단 한용외 사장, 서울아트가이드 김달진 대표, 한국일보 박래부 논설위원, 중앙일보 정재숙 부장, 미술평론가 정준모, 윤범모 그리고 중앙일보 편집국 동료들 등 많은 지인들이 고인의 안목과 인품을 기렸다.


그렇게 선배는 총총히 떠나셨지만 아우가 쓴 글은 남아 지금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삼가 이규일 선배님 명복을 빕니다.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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