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우팅 돌풍을 일으킨 록커 김경호
샤우팅 돌풍을 일으킨 록커 김경호
  • 이근형
  • 승인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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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슈퍼스타에 / 이근형



[인터뷰365 이근형] 우리나라 록계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관통하며, 외국의 하드 록이나 헤비메탈의 아티스트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공식은 그 당시 어느 나라를 가도 다 공통적이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90년대로 들어와서 미국의 록음악에서 많은 차용을 했다. 더 좁혀서 이야기기 하자면, 고음으로 치고 올라가서 샤우팅을 내지르는 록 아티스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1970년대 발족하여 모습을 드러낸 크리스천 메탈 (Christian metal) 같이, 화음을 중요시여기는 장르를 본받기 일쑤였다.


그것은 특히나 가수의 가창력과 탁월한 보컬 능력을 가늠하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제격인 록 장르였다. 물론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록음악이 이런 크리스천 메탈 같은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못박아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샤우팅 창법이 한때 난무했던 록계를 생각해보면 분명 영향력은 유효했고 대단했다. 물론 다른 노선을 걸었던 록 아티스트가 대다수였다. 이승철, 김종서 등은 영국의 하드 록에 상당 가량 영향을 받았으며, 시나위의 신대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영국 록에서 차용,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를 넣는데 노력했다. 이들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왔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90년대 미국 헤비메탈 트렌드’ 는 누가 일으킨 것일까.


음성적으로, 다시 말해서 언더그라운드 쪽에서는 기타리스트 조필성을 주축으로 결성된 예레미(Jeremy) 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역시 이 그룹도 시원시원한 샤우팅 창법으로 한 가닥 했었다. 반대로 대중적으로는 바로 김경호가 록계를 한바탕 휩쓸어버렸다. 김경호는 특히 3 옥타브를 넘나드는 엄청난 샤우팅으로 악명 높았다. 그는 1990년대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록계에서 미국 스타일의, 그러니까 폭발적 가창력을 내뿜으며 일렉트릭 기타와의 환상적인 융합을 꾀하는 록음악을 주입시켰다. 평단에서는 김경호가 표면적으로는 슬로우 록(우리나라에서 록 발라드로 잘못 불리는) 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LA 메탈, 바로크 메탈 등의 요소가 들어있다고 평가했다. 샤우팅 창법과 극적인 요소, 맞는 말이었다.


거기다가 이렇게 샤우팅 창법을 앞세우는 해외의 세계적 록그룹 아티스트답게,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은 기본이고 어두운 색깔 계열의 옷에다가 창백한 모습을 띠게 만드는 화장으로 이미지적인 요소도 완벽하게 구비해놨다. 더해서 무대 위에서의 행동 역시 관망하는 듯한 눈빛에다가 최대한 분위기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는, 그러니까 카리스마를 중요시여기는 액션으로 자기의 음악과 자기의 액션을 완벽히 융합시켰다. 특히 샤우팅을 내지를 때에는 눈을 감고 불을 내뿜듯 호쾌하게 풀어버리는 모습에서, 옥타브 따지기에 혈안이 된 록음악 팬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여기에 매료된 학생, 젊은이들은 학교나 노래방에서 김경호를 따라잡으려고 무수히 노력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에 샤우팅 창법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데뷔 시절 자신의 길을 막는 난관들, 탈출구를 택하다


김경호는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71년 6월 7일 태어났다. 현재는 필리핀으로 자리를 옮긴 서울예술신학대학교 학생으로서 1991년 대학가요제에서 <긴 이별>이라는 노래로 동상을 차지했다. 거기서부터 김경호는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김경호는 어린 시절 KBS 창작동요제에도 입상한 경력이 있다. 그만큼 김경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였다. 김경호는 본 조비 같은 헤비메탈, 팝 메탈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스래쉬 메탈에도 상당 가량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김경호는 이런 록 스피릿을 잘 간직하여 소속사를 구해, 1집을 만들고 데뷔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김경호는 자신의 첫 번째 소속사와 음악적 견해가 맞질 않아, 앨범 작업에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가치가 많이 제거된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94년 데뷔 앨범 Kim Kyung Ho를 발매했고, 타이틀곡으로 <마지막 기도> 를 내세웠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소속사와 마찰을 겪으며 홍보 부족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많은 록음악 팬들이 김경호 1집 Kim Kyung Ho의 숨겨진 음악성에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다. 그렇게 김경호는 대학가요제 입상에 비해 첫 데뷔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김경호는 정통 록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록계 및 연예기획사에서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일렉트릭 기타가 5분 이상 흘러나오면 대중들은 리모컨을 돌린다는 말이 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에서 이태섭이 연출한 기타 솔로 같은 것은 예외이지만, 록음악의 비트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적 대중들의 입맛에 의거하자면 그 우스갯소리는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김경호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래쉬 메탈이나 LA 메탈 역시 좋지만,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다. 김경호는 우리 정서 특유의 한(恨)이 서려있는 슬로우 록으로 경로를 바꾼다. 그리고 그것은 곧 히트 가도의 방책이었다.



김경호 커리어의 출세작,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김경호는 2집을 만들기 위해 예전의 것보다 더 날선 샤우팅 창법을 길러냈고, 발라드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한이 맺힌 가사와 멜로디를 적극 받아들여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 물론 록 아티스트이므로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 세션의 파워풀한 연주를 빼놓지 않았다. 더해서 배킹 보컬을 섭외, 김경호가 미처 도달하거나 메우지 못하는 부분을 배킹 보컬이 원조하여 사운드의 풍부함을 꾀했다. 최고의 작곡가 이경섭까지 섭외하며 웰메이드 작품 양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2집 1997이었다.


많은 록 아티스트들이 행하는 식으로, 어느 특별한 혹은 상징을 띠는 연도를 제목으로 정하는 패턴을 김경호가 사용했다. 스매싱 펌킨스의 노래 1979, 시나위의 인스트루먼틀 트랙 1990 같이 말이다. 김경호는 자신의 2집 앨범 발매 시기인 1997을 염두해서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측되며, 결국 그런 선택은 아주 옳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앨범 제목처럼 김경호에게 있어서 1997년은 너무나도 특별한, 그리고 자기가 가요계의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는 뜻 깊은 해였다. 아이돌 그룹 전성시대, 그리고 발라드가 여전히 강세를 이루는 1997년 가요계에 말이다.


2집 1997의 타이틀곡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김경호의 출세작이었다. 이 노래는 가요 차트 진입 후, 입소문에 의해 여러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는 출발을 끊었다. 그 후부터 이 노래는 무섭게 차트 상위권으로 올라가, 어느새 가요 프로그램에서 쟁쟁한 아티스트들의 1위 후보곡과 경쟁을 다투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김경호 역시 당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의 인기 가도 달리던 시절을 최고로 여기고 있으며, 사실 우리들 기억 속에서도 김경호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가요 차트 1위를 거머쥐며, 우리나라 록계의 오래간만의 쾌거가 김경호의 손에서 이뤄졌다. 1위 확정 후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꽃가루 속에서 김경호는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엔딩을 장식했다.


록음악이 1위를 한 것이 결코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을 흥얼거리며 거리를 노닐고, 매주 주말 텔레비전을 켰다 하면 김경호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창 록 아티스트에 호기심이 충만한 학생들은 김경호를 우상으로 생각하며, 그의 액션이나 코디에 대해 열광했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2집 1997 역시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록음악 팬들로부터 명반이라는 소리를 듣게 했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같은 앨범 수록곡 <슬픈 영혼의 아리아>, <금지된 사랑> 등이 후속곡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2집 앨범 1997은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처럼 대체적으로 한의 정서를 담으면서도, 김경호가 만들어내는 작가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노래 중 <슬픈 영혼의 아리아>는 클래식적 접근에 인트로의 신시사이저 연주는 딱 헤비메탈 슬로우 록 버전이었다. 1번 트랙 Dracula는 김경호가 추구하는 어두운 이미지와 록적인 신비적 요소에 철저히 맞춰진 특이한 곡이었다. 그리고 2집에서 절정에 다다른 김경호의 샤우팅 창법은 앨범의 작품성에 색을 입히는 역할을 했다. 1997 앨범 거의 모두가 김경호의 가창력을 시험하는 코스가 태반이다. 2집 앨범 1997, 그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은 김경호를 슈퍼스타로 키워냈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 샤우팅 논쟁


아직까지도 인터넷의 게시판이나 포털 사이트에 등장하는 록음악 논쟁, 바로 김경호의 샤우팅 창법에 대한 찬반 논란과 타 록 아티스트와의 기량 비교가 바로 그것이다. 김경호는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대한민국을 샤우팅 창법의 매력으로 푹 빠지게 했으며, 그것은 마치 양날검과 같게 했다. 물론 좋은 점이 있다. 젊은이들이 음악의 기법이나 요소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소스를 제공하게 해준 것이다. 그 전만 하더라도 단순히 “메탈리카가 좋아, 메가데스가 좋아”, 아니면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중 누가 진정 힙합인가” 하는 식의 소모적 논쟁일 뿐이었다. 그러나 샤우팅의 대가 김경호의 등장으로, 우리는 어느새 창법에 대해 의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김경호를 검색해보면, 옥타브 논쟁이 대다수다. 그리고 김경호의 가창력이 정말 음악에 있어서 필요한 것인가 라며 오히려 역설하는 질문도 허다하다. 거기다가 세바스천 바하(스키드로), 액슬 로즈(건즈 엔 로제스), 마이클 스위트 (스트라이퍼), 마이클 마티예비치(스틸하트) 등 샤우팅 창법의 세계적 대가들과 김경호를 빗대며 “누가 진정한 3 옥타브 이상의 보컬들인가” 하며 거창하게 대질 심문하는 글도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야 진지하게 논할 수도, 혹은 재미삼아 농담거리로 말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도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인터넷에는 이런 논쟁이 도배되어있다.


왜 그 논쟁이 나쁜 쪽으로 갔냐 하면, 한창 폭넓은 음악 감상과 록음악의 진짜 매력에 빠져야할 젊은이들이, 샤우팅 창법의 가창력에만 국한되어서 아티스트를 바라본다는 점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해외 록계에서는 창법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노래 잘 부르는 록 보컬은 칭찬 받고, 후한 점수를 준다. 그리고 창법에 개방적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가창력을 가늠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대놓고 샤우팅 창법이나 보컬 능력을 잣대로 들이대며 “A는 이것을 구사하지 못하니 쓰레기 록 보컬이다”라고 치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터넷, 그리고 록계를 의논하는 젊은이들은 김경호라는 인물을 예로 들면서 “록 보컬은 뭐니해도 샤우팅이 제격” 이라고 맹신한다.


어떤 때에는 세바스천 바하나 로버트 플랜트보다 김경호가 못 부른다며, 김경호를 마구 씹는(?) 부류도 있다. 이것은 거의 인터넷상에서 악성 댓글, 그리고 쓰레기 논쟁에 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일까. 평단에서는 한때 김경호를 두고서 “우리나라의 슬로우 록 돌풍 중심이지만, 창법의 가타부타를 끌어들이며 록계를 격하시킨” 인물로 비추곤 했었다. 김경호는 단지 자기의 가창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창출하려고 하는 음악이 곧 메탈에 기반을 둔 슬로우 록이었기에 샤우팅을 내질렀을 뿐이다. 그런데 길은 잘못 들어섰다. 젊은이들에게 안 좋은 버릇을 기르게 했고, 샤우팅만이 록 보컬의 기본자세라는 출처 불분명의 명제까지 만들어졌다.



다시 김경호의 시원한 샤우팅을 듣길 기원하며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김경호는 2003년 이후부터 돌연 대대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며 이런 샤우팅 창법 논쟁은 현재에 와서 많이 수그러진 모습이다. 이제 김경호는 더 이상 샤우팅 창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인터넷상에서는 아직 철없는 학생들이 김경호의 샤우팅 창법 논란에 불을 붙이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김경호 전성시대보다는 아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이 하나 있다. 김경호가 더 이상 샤우팅 창법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경호는 2003년 7집 Open Your Eyes 이후부터 성대 결절을 겪어와야만 했다. 90년대 데뷔 이후부터 그는 늘 어느 무대를 가던 고음의 샤우팅 창법을 팬들에게 들려줬다. 게다가 1998년부터 라이브 공연을 수 십 차례 가졌으니, 자신의 최대 장기를 선보여야할 큰 무대에서 그의 샤우팅 창법은 마치 CD 플레이어를 킨 것처럼 쉬지 않고 터져 나와야만 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이렇게 김경호에게 성대 결절이라는 절망적인 상해가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2004년 8집 <시작> 부터는 샤우팅 창법을 최대한 자제하고, 부드러운 발라드 트랙으로 일관하였다.


근데 더 안 좋은 상황은, 성대 결절로 인한 합병증으로 김경호에게 ‘대퇴골두무혈성괴사(피가 통하지 않아 엉덩이 살이 썩는 병)’ 가 찾아왔다. 그 병은 2006년 즈음 김경호를 급습했는데, 가뜩이나 더 이상 샤우팅 창법을 제대로 지를 수 없는 그에게 이름도 어려운 최악의 병이 그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이런 그였기에 2003년부터 한창 잘 나왔던 예능 프로그램이나 가요 무대 모두 스케줄 취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그 당시는 김경호가 록가수 특유의 신비주의를 벗고, 코믹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런 고난들이 김경호를 더 성숙시켰을지도 모른다.


이후부터 나오는 작품들은 세상을 편하게 바라보며 노래한다던가, 사랑을 더욱 더 애절하게 갈망하는 듯한 노래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샤우팅 창법을 잘 못하는 대신, 부드러운 보컬로 양질의 발라드를 만들었다. 더해서 최근에는 한 대학의 교수로 임명, 학생들에게 실용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더해서 2008년 4월에는 소극장 공연을 돌며, 무대로의 복귀를 찬찬히 이끌고 있다. 김경호는 샤우팅 창법을 많이 잃은 대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 을 가졌다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아예 샤우팅 창법을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성기 시절만큼 3~4 옥타브를 넘나드는 것은 힘든 모양이다. 그러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대한민국에 샤우팅 창법의 돌풍을 일으킨 김경호, 이제 몸을 추스리고 날개를 펴고 있는 그에게 다시 시원시원한 샤우팅을 요구하는 것은 과연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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