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스페셜’ 11년 11월 11일 11시, 영원한 11번의 전설 ‘불멸의 투수 최동원’
‘MBC스페셜’ 11년 11월 11일 11시, 영원한 11번의 전설 ‘불멸의 투수 최동원’
  • 김지나
  • 승인 20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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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지나】 11일 방송되는 ‘MBC스페셜’에서는 불멸의 투수 최동원 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지난 9월 14일, 최동원(53세)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어떤 타자를 만나도 물러서지 않고,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던 마운드의 전설, 투수 최동원.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 최동원이 세운 7게임에 5번 등판, 4승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이다. 특히 야구팬이라면 한번쯤 흉내 냈던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강한 카리스마로 마운드를 호령하던 당당한 최동원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대의 라이벌 선동열, 김시진을 비롯 최동원을 상대한 타자들이 말하는 최동원의 플레이와 대투수 최동원을 만든 아버지 최윤식의 그림자 같았던 삶을 살펴본다.

또한 1981년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될 뻔했던 최동원의 토론토 블루제이스 입단 좌절에 숨겨진 비화를 공개한다. 떠나는 순간까지 그저 ‘다이어트를 했을 뿐’이라며 병색을 숨겼던 최동원. 그가 던진 강속구만큼이나 강한 모습으로, 그러나 너무 빨리 떠난 그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

선동열은 5살 터울의 4년 후배였지만 최동원에게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최고의 적수였다. 두 사람의 통산대결은 1승1무1패, 87년 5월 16일의 대결은 선동열 감독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선 감독은 15이닝동안 무려 232개의 공을 던졌다.

최동원 역시 209개의 공을 던졌다. 5시간의 사투 끝에 승부는 2대2 무승부로 끝났다. 선동열 감독은 86년 첫 대결에서 최동원 선수를 1대0으로 이긴 것에 “최동원이라는 큰 산을 넘은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 다음 대결에서 0대2로 지고, 세 번째 대결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역대 한국 최고의 투수 최동원과 김시진은 동갑내기로 고교시절부터 시작해 대학시절, 실업선수 시절, 프로선수 시절까지 무려 15년 넘게 처절한 대결을 벌여왔다. 김시진의 대구상고 시절 고교시절 괴상한 폼에 금테 안경 낀 조금은 건방진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최동원, 하지만 김시진은 최동원에게 숱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김시진에게 최동원은 쉽게 넘을 수 없는 ‘높은 산’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친한 친구로 돌아가 평범한 20대처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재미삼아 하는 동전 놀이, 속칭 짤짤이에도 강한 승부욕을 보이던 장난기 어린 최동원의 모습이 한때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본 롯데 오리온즈 가네다 감독이 고등학생 최동원을 양자로 삼고 싶다는 설에 대해 당시 함께 있었던 김시진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친구를 회상하며 선수시절 인생의 일부였던 최동원의 죽음에 김시진은 “모든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선수시절 최동원은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1981년 에드먼튼 세계대회 캐나다전에서 선발 등판한 최동원은 8회까지 11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다. 이 경기 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입단제의에 따라 초고속으로 계약이 진행돼 최동원은 4년간 61만 달러에 계약하게 된다.

하지만 병역문제와 금액 문제로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다. 하지만 진출 불발에는 한국 야구계의 반대가 있었다. 당신 한국일보 토론토주재 기자였던 유승민씨는 한국야구계 고위관계자로부터 최동원이 미국 진출을 하면 “갓 출발한 한국 프로야구가 타격을 받게 돼 보낼 수 없다”며 메이저리그 진출을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한국 야구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스카우터 웨인모건과 당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숨겨진 비화를 전격 공개한다.

최동원이 고교 1년 때 어깨 보험을 들고, 하루 200개 이상 투구 연습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특히 그의 집에 연습장까지 만들며 훈련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부산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정도. 그의 이런 남다른 훈련과 관리는 아버지 최윤식씨의 열정 때문이었다. 늘 그림자처럼 최동원을 따라다니며 관리 해준 최윤식씨(03년 별세).

‘선수는 운동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던 아버지는 상이용사 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최동원의 체력 훈련을 도왔고, 프로 시절에는 연봉 협상 등 운동 외 문제를 해결하는 대리인 역할을 했다. 야구선수 개인 트레이너나 에이전트 개념이 없던 시절,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희생과 헌신은 최동원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1990년 화려한 성적에 비해 너무나도 쓸쓸히 갑작스럽게 마운드를 떠난 최동원. 전성기에 비해 짧았던 그의 선수생활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최동원 은퇴의 발단은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사건. 선수들의 권익과 2군 선수들의 불합리한 처우에 문제의식을 갖고 선수협을 창립하고 회장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이는 구단으로부터 버림받는 계기가 된다. 이후 충격적인 삼성 김시진과의 트레이드 사건을 겪은 후 최동원은 조용히 마운드를 내려온다. 삼성 트레이드 후,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삼성 유니폼을 입고 사직구장에 돌아온 최동원을 봤던 당시 팬들은, 그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의 당당한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 같았던 최동원의 죽음에 많은 사람이 함께 울었다. 그 울음의 의미는 깊었다. 특히 부산 팬들의 슬픔은 더 컸다. 그들은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깊었다. 현재 부산에서는 ‘최동원 야구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시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고 있다.

최동원이 남긴 불굴의 자취를 그와 함께 했던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되살려 우리 안의 최동원은 누구였는지를 찾아가본다.

경남고 시절 늘 1번이었던 故 최동원 선수. 그가 11번을 달게 된 것은 연세대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11이라는 숫자가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는 최동원, 그의 사후에야 11번은 영원한 친정팀 롯데의 영구결번이 되어 부산 팬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인들은 마운드 밖에서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한평생 야구만을 위해 살았고, 마지막까지 야구를 위해 살고 싶었던 최동원, 그는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를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살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인터넷뉴스팀 김지나 기자 come3412@interview36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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