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시간에 몰래 만화 그리다 교사에게 들킨 중학생
- “언젠가 만화도 예술로 인정받을 것”
- 믿음의 한마디로 시사만화가 꿈 키워
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을 지낸 유환석 화백은 강원일보와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에서 시대와 서민의 삶을 따뜻한 풍자로 기록해 왔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2026 원로예술인 아카이브 전시지원’ 공모에 선정돼, 데뷔 50주년 특별전 '따뜻한 풍자'를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예술마당 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개최합니다. 이번 10회 연재는 시사만화가로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생애기록 치유기’입니다. 유 화백의 성찰이 후배들에게는 작은 이정표가 되고, 독자에게는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따뜻한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365 신향식 칼럼니스트 = “커서도 만화를 계속 그려라. 언젠가는 만화도 예술로 인정받는 날이 올 거야.”
유환석 화백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 춘천 강원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미술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석고상을 바라보며 데생에 열중했지만, 그의 공책에는 만화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사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그림에 빠져 있던 소년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시 만화는 예술보다 낙서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를 딴길로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시선도 많았다. 수업 시간에 만화를 그리다 들켰으니 큰 꾸중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사는 소년의 공책을 빼앗지 않았다.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 뒤, “계속 그려라” 하면서 뜻밖의 말을 건넸다. 혼날 준비를 하고 있던 소년에게 돌아온 것은 질책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남들이 낙서라 부르던 그림을 누군가는 재능이라 불러주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가도 괜찮다고, 한 어른이 처음으로 허락해 준 순간이었다.
유 화백은 그때를 떠올리며 “정말 쇼킹했다”고 말한다. 짧은 표현이지만, 그 안에는 소년의 세상이 뒤집힌 순간의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낙서’라 불리던 그림이 ‘가능성’이 되던 날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여러 종류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그는 신문이 오면 네 칸 만화와 시사만평부터 펼쳐 보았다. 네모난 칸 안에서 세상 이야기가 웃음이 되고, 날카로운 비판이 되고, 때로는 지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위로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해외 잡지에 실린 한 컷 만화까지 찾아보며, 그는 말보다 그림으로 세상을 읽는 법을 익혀갔다.
친구들이 국어와 영어, 수학 문제를 풀 때에도 그의 손은 자꾸만 인물을 그렸다. 어른들은 그런 모습을 걱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년에게 만화는 공부를 피해 숨는 곳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답게 숨 쉴 수 있는 자리였다. 그 마음을 처음 알아봐 준 사람이 미술교사였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남몰래 품은 ‘공책 귀퉁이’ 하나가 있다. 좋아하지만 떳떳하게 내보이지 못한 것, 잘하고 싶지만 세상의 기준 앞에서 작아진 꿈, 괜한 욕심이라며 스스로 접어버린 마음이다. 그때 누군가 “그건 쓸모없는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 준다면,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질 수 있다.
교사의 한마디는 유환석이라는 소년에게 바로 그런 말이었다. 그날 이후 만화는 몰래 그리는 낙서가 아니라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은 길이 됐다.
막연한 꿈이 ‘내가 갈 길’로 바뀌어
또 한 번의 전환점은 국어 시간에 찾아왔다. ‘신문이 나오기까지’라는 단원을 배우며 강원일보를 견학했을 때였다. 신문사 안에서 삽화를 그리는 화가를 본 순간, 멀게만 느껴졌던 꿈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거만한 자신감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소년의 벅찬 발견이었다. 시사만화가는 막연히 동경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도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 목표가 됐다.
그는 주간 간행물 '선데이서울'과 '주간한국'의 독자투고란에 만화를 보냈다. 작품이 당선되고 생애 첫 원고료를 받았다. 활자 속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모습을 바라보며 소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오래전 교사가 건넨 말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정말 계속 그려도 되는구나.’
누군가의 믿음은 그렇게 현실의 증거를 하나씩 만났다. 강원일보를 거쳐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의 대표 시사만화가가 되었고, 간판 만평 ‘헹가래’로 오랫동안 독자들과 만났다. 이후 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을 맡으며 한국 시사만화계를 대표하는 화백으로 자리 잡았다. 한 교사가 발견한 공책 속 그림은 한 사람의 평생 직업이 되었고, 수많은 독자에게 웃음과 위로를 건네는 작품으로 자라났다.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남는 말
우리는 흔히 인생을 바꾸려면 거창한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면 결정적인 순간은 뜻밖에 작고 조용하다. 수업 시간에 건넨 한마디, 원고 한 장을 바라봐 준 눈빛, “너라면 할 수 있다”는 짧은 믿음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반대로 “그림 그려서 먹고 살겠느냐”, “그건 취미로만 해라”는 말도 오래 남는다. 말한 사람은 금세 잊어도, 들은 사람은 그 문장을 가슴에 품은 채 수십 년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어른의 말은 때로 한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 된다.
유 화백의 이야기는 성공한 만화가 한 사람의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안에 아직도 꾸중을 기다리며 고개 숙인 어린 시절의 자신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좋아하는 것을 들킬까 두려워했던 아이, 인정받고 싶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던 아이, 누군가 단 한 번만이라도 믿어주기를 기다렸던 아이 말이다. 그 아이에게 이제는 우리가 말해 줄 수 있다.
“네가 좋아했던 것은 헛된 일이 아니야.”
“늦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해도 괜찮아.”
“그때의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 듣지 못했던 말을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것. 그것이 생애를 기록하는 일이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어른인가
유 화백의 사연을 들은 한 지인이 “학창 시절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더라면…”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말 뒤에는 차마 다 적지 못한 한 사람의 생애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발견되지 못한 재능, 접어야 했던 꿈, 그때 누군가 붙잡아 주었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시간들. 기자는 “아… ㅠㅠ”라고밖에 답하지 못했다. 어떤 아픔 앞에서는 긴 위로보다 함께 안타까워하는 짧은 탄식이 더 진실할 때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스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믿어주는 어른을 만나지 못한 채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던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우리의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스승을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우리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만화도 예술이 되는 날이 올 거야.”
수십 년 전 교사가 건넨 이 말은 현실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말이 한 소년에게 ‘너의 마음은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건네는 한마디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아이가 자기 재능을 포기하지 않게 하고, 한 청년이 다시 도전하게 하고, 오랫동안 꿈을 접어둔 사람이 다시 공책을 펼치게 할 수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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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향식 칼럼니스트
신문기자 출신 글쓰기교육 전문가이자 대한민국 1호 생애기록치유사다.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여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내면을 치유하는 새 영역을 개척했다. 조선미디어그룹 스포츠조선과 경향미디어그룹 굿데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교육, 글쓰기, 자연치유를 주제로 글을 발표했다. 연세대에서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그 논문이 서울대 1학년 기초필수 교재에 모범예문으로 수록된 것을 계기로 대학과 전국 주요 고교에서 학술적 글쓰기 초빙강사로 활동했다. 또, 하버드대, MIT, 베를린공대, 함부르크대 등 해외 대학의 글쓰기교육 현장을 취재하며 글쓰기 교육 방법론을 연구했다. 국제 바칼로레아(IB)가 한국에 본격 도입되기 이전부터 그 교육적 가치에 주목해 선구적으로 취재했다. 대치동에서 신문기자 출신 강사진으로 구성한 논술학원을 17년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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