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지일 영화배우의 인생에는 좌절이 없다
[인터뷰]한지일 영화배우의 인생에는 좌절이 없다
  • 김두호
  • 승인 20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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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27개 직종 전전하는 방랑자의 삶/김두호
오랜만에 서울을 찾은 배우 한지일/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한지일 영화배우의 본명은 한정환이다. 젊은 연기자 시절에는 '한국의 이소룡'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홍콩에 진출시키기 위해 영화사 신필름이 작명한 '한소룡'을 예명으로 사용했으나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 에 출연할 무렵부터 한지일로 개명했다. 젊고 잘 생겼던 남자였지만 1947년생이니 그도 칠순의 노배우로 접어들었다.

기자(인터뷰어)가 40년 넘게 직업적인 일 관계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가족같이 교유(交遊) 해오면서 느껴온 한지일이란 영화배우는 특색이 많은 사람이다. 우선 성품이 여릴 정도로 착하고 순수하면서 정이 많다. 동료나 선후배 사이에 의리가 많아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앞장서 돕는다. 또 평생을 두고 불우한 이웃돕기를 실행해온 자선가(慈善家)의 미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비디오 영화가 한 시절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때 영화사 '한시네마타운'을 설립, 제작한 영화 '젖소부인 바람났네' '정사수표' 시리즈물이 대박나 100억대의 재산을 모았으나 빌딩을 짓다가 IMF 때 파산하고 이혼으로 가정까지 잃는 불운이 따랐다. 그는 결혼 당시 최고의 인기직종인 KAL스튜어디스 출신의 멋있고 착한 부인과 연애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행불행이 엇갈린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뜬구름 인생의 삶을 시작했다.

한지일 배우는 정처 없는 고달픈 방랑길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시련을 헤쳐 왔다. 한 때 베트남에서 사업도 했으나 빈손으로 돌아왔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직종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살지만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래도 주머니에 여윳돈이 좀 생기면 불우한 동포 노인 요양원을 찾아가 위문하고, 시카고에 '한마음봉사단'을 만들어 '자살방지 전도사'를 자처, 캠페인도 벌려왔다. 국내에서 일어난 연예인의 자살사건이 자살예방 캠페인의 동기가 되었다지만 그 자신도 과거 자살기도를 해 응급실에서 깨어난 트라우마가 있다.

고희의 영화배우 한지일.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무렵에 모델로 시작해 1972년 김수형 감독의 영화 '바람아 구름아'의 주연배우로 발탁되면서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 '물도리동',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 '길소뜸' 등의 영화와 TV드라마 '금남의 집' '형사25시' 등 출연 작품 40여 편 중에는 대종상 신인상, 조연상과 아시아영화제 주연상의 화려한 수상이력도 들어있다.

미국의 동서부 도시 간을 종횡으로 내달리며 정처 없는 자유인이 되어 인생을 드라마를 만들어 가듯이 살다가 잠시 귀국한 한지일 영화배우를 만났다.

 

한지일은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열심히 일하는 근로 활동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 내세운다. 자살방지운동도 열심이다. 과거 자살기도의 뼈아픈 체험이 자살방지운동을 하고 있는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인터뷰365

-당신은 요즘 '페이스북 스타'가 되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팔로우가 엄청나다는 얘기가 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페북에 올리는 생생하고 적나라한 생활기록을 현장 사진과 함께 접할 때마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귀감이 가기도 하고 한편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도 한다.

떠돌이 독신생활을 해도 페이스북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 나의 인생은 외롭지 않다. 애써 숫자를 확인하지 않지만 페북 친구들이 많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올리지만 한마디의 대화와 댓글에서 따뜻한 정과 인간의 향기를 느낀다.

-페북을 통해 미국에서 수시로 일자리를 바꾸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대체 그동안 몇 개의 직종에서 일을 했는가?

나는 전문 직종이 배우이고 연기인이다. 배우생활은 나이가 들면서 출연 요청이 줄어들고 끊어지면 저절로 직업적으로는 은퇴 당한 셈이 된다. 배우들이 대다수 다른 직업이나 사업으로 돈을 버는 재주가 부족하다. 무슨 일이든 경제활동을 하려면 국내에서는 처신하기가 어렵지만 미국에서는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시선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어서 편하다. 임시 고용직이나 용역형태의 일자리까지 내가 섭렵한 직종을 체크해보니 27개 직종이 되더라. 주로 몸으로 버티는 판매, 서비스, 세일즈, 운전을 비롯해 전문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공사현장의 노동까지 안 해 본 게 없다.

배우 한지일은 때때로 쇼핑센터에서 잡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페이스북에 공개하기도 한다. /인터뷰365

-옛날로 돌아가 보자. 초기의 예명이 한소룡이었다. 홍콩의 슈퍼 액션스타였던 이소룡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유래가 있는가?

한국영화가 전성기로 접어든 1960년대는 한국영화가 아시아권에서 가장 화려하게 주목을 받았다. 연출 제작 배급 수준도 홍콩영화의 몇 수 위였다. 액션영화도 많은 우리 영화인들이 홍콩에 진출해 작품 활동을 하는 때가 있었지만 이소룡시대와 함께 홍콩영화가 쿵푸 무술액션 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소룡이라는 이름은 1970년 명동의 길거리에서 나를 발탁한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나를 홍콩에 진출시키 위해 지어준 이름이다. 신일룡 배우의 이름도 신필름에서 만들어졌지만 이소룡의 이름이 그만큼 한국 영화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한지일로 개명한 것은 이장호 감독이 액션배우 느낌이 나는 한소룡을 버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홍콩 진출은 이력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홍콩에서 제작될 ‘반혼녀’라는 작품에 캐스팅이 되어 출국 준비를 하다가 여권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연예인 블랙리스트 원조다. 당시 정권의 반대 세력인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과 절친한 친구관계에 있었다. 우리 가족이 DJ를 아버님으로 부르며 한 가족같이 지냈던 것이 여권 발급에 지장을 받은 것 같다. 1970년 이유석 감독의 '천동'이라는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주연배우로 데뷔한 것은 1972년 김수형 감독의 '바람아 구름아'였다.

-한소룡이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은 1978년 대종상 신인남우상을 받은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이다. 이듬해 역시 이두용 감독의 '물도리동'으로 싱가폴에서 개최된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출연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한국계 영화감독인 홍의봉 감독의 1976년 작품 '캘리포니아 90006'에 출연한 것도 큰 행운이었다. 1980년대 초 바쁘게 활동하던 무렵은 김영효 감독의 '화요일 밤의 여자', 김효천 감독의 '오사카의 외로운 별' 등 애정 액션물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았다.

임권택 감독이 한창 시선을 모았던 시기에 연출한 '아다다' '아제아제바라아제' '길소뜸'을 비롯해 KBS-TV드라마 '형사 25시', MBC-TV의 '늦게 만난 여자'도 재미를 느끼며 출연했던 작품들이다.

(사진왼쪽부터)영화 '경찰관'(1979), '아다다'(1987), '길소뜸'(1985) 스틸컷
(사진왼쪽부터)한지일 출연작 영화 '경찰관'(1979), '아다다'(1987), '길소뜸'(1985) 스틸컷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영화제작업계는 비디오 시장을 겨냥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무렵 영화제작사 한시네마타운을 세워 성공한 제작자로 선망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큰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소문났었다. 얼마까지 벌었고 왜 망했는가?

영화 팬들이 집에서 비디오 영상을 즐기는 시류에 맞추어 한시네마타운을 운영했다. 내가 제작한 '젖소부인 바람났네' '정사수표'가 대박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300여 편을 만들었고 부동산을 포함해 100억대의 재산을 모았다. 호텔도 구입하고 빌딩을 건축하다가 IMF가 터지면서 임대사업이 무너져 빚을 안고 파산했다.

-그로부터 이혼까지 한 사실이 전해져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KAL 스튜어디스 시절 스마일 퀸으로 선정됐다는 마음씨 착한 부인과 매년 명절이면 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보육원과 양노원을 찾아다녀 따뜻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성장한 두 아들의 근황도 궁금하다.

큰 아들 원석(38)이는 요즘 인기를 모으는 혼혈가수 매니악과 이미쉘이 소속된 매니저먼트 기업을 운영하고 있고 둘째 원기(36)는 미국에서 공부한 덕분에 학원 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IMF로 세상이 어수선할 때 김대중 대통령시대를 맞이했다. 김홍업 씨와 절친했고 그 집안과 가족처럼 지냈다면 어려울 때 도움도 받았을 것 같다.

당선 소식을 접할 때 일산 김대중 대통령 사저에서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쁨을 나눈 것이 홍업이와도 마지막 인연이 되었다. 그 후 그가 나를 찾지도 않았고 나도 애써 만나려 한 적이 없다. 나와 대학도 같이 다녔고 와이프끼리도 한 직장에서 정을 나눈 사이였지만 서로의 처지와 환경이 변하면서 인연도 덧없이 끊어지더라.

-최근 미국의 로스엔젤리스에서 그곳에 체류 중인 진성만 원로가수와 동포 요양원을 방문해 위문활동을 한 모습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고달프게 살면서 변함없이 선행을 실천하고 사는 게 대단하다.

내가 힘들게 살 때 더욱 외롭고 어렵게 사는 어른들이 생각난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도 회갑잔치를 양로원에 모시고 가서 많은 분들과 함께 즐기시도록 잔칫상을 차려드렸다. 어머님이 일찍 떠나시고 단 한분의 혈육인 이모님도 미국에서 얼마 전 별세하셔서 너무 슬펐다.

미국 로스엔젤리스의 한인 동포 요양원을 방문한 배우 한지일. 위문활동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보람을 찾기도 한다.(사진 위쪽) 한지일이 동포들이 많이 사는 애틀랜타 한인회를 찾아 토산품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도시를 이동하면서 한국산 토산품 판매를 하기도 했다./인터뷰365
(사진 위)미국 로스엔젤리스의 한인 동포 요양원을 방문한 배우 한지일. 위문활동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보람을 찾기도 한다. (사진 아래) 한지일이 동포들이 많이 사는 애틀랜타 한인회를 찾아 토산품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도시를 이동하면서 한국산 토산품 판매를 하기도 했다./인터뷰365

-언젠가는 마약과 관련해 수감생활을 하는 가수 계은숙의 구명운동을 하는 것을 페북으로 보았다. 어깨에 구명 캠패인의 띠를 두르고 거리와 점포에서 서명을 받는 모습이 전해졌는데 계은숙과는 어떤 관계인가?

아무런 인연 관계가 없다. 장미화 김흥국 등 친하게 지내는 가수가 많지만 계은숙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인터뷰365>에서 계은숙의 살아온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보고 나와 비슷한 환경과 어려움을 겪었다는 동질감을 느껴 구명운동을 미국 동포사회에서 펼쳤다. 사실 나는 많은 동료 후배 연예인들이 스스로 아까운 목숨을 끊는 것이 가슴 아파 젊은 동포들을 대상으로 자살예방 운동을 사명처럼 생각하며 펼쳐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과거 당신도 자살 미수와 관련된 사건으로 기사화 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죽을 만큼 약을 먹고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발견되어 응급실로 실려가 산소호흡기를 물고 깨어난 적이 있다. 누구나 살면서 힘들 때 죽고 싶은 생각을 한두 번은 하게 된다. 평생을 평화롭게 휘파람 불며 사는 사람은 없다. 죽기를 각오하면 무서울 게 없고 못할 일이 없다. 정다빈 최진실 등 얼마나 아까운 배우들인가. 자살 방지 운동은 죽을 때까지 내가 해야 할 일로 생각한다.

-고희를 넘어서면서 바라는 일,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죽는 날까지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사는 모습을 지켜가고 싶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을 떠나 사회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럴만한 힘과 기회가 오기를 소망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내 나라에 작은 기여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다. 비록 작은 정성이라도 바치고 싶다. 지금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에 가면 뭔가 홍보활동을 하는 길도 구상중이다.

 

오랜만에 서울을 찾은 한지일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 핀다.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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