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몰전함 돈스코이호를 찾아낸 유해수 박사(상)
러시아 침몰전함 돈스코이호를 찾아낸 유해수 박사(상)
  • 김두호
  • 승인 201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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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 앞두고 초미의 관심사

【인터뷰365 김두호】한국해양과학기술원 연구부장으로 재직 중인 유해수 박사(1955∼)는 러시아 해군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드미트리 돈스코이 침몰전함을 울릉도 앞바다 해저 400m에서 찾아낸 우리 해양과학계의 엘리트 과학자다.


돈스코이호는 120조 원의 금화가 실린 엄청난 보물선으로도 알려졌고, 100년 전의 보드카가 가득 실렸던 전함이라고도 해서 큰 화제꺼리였다. 1912년경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여객선 타이타닉호에서 건져 올린 와인 한 병 값이 소더비 경매가로 1억 5천만 원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전함 돈스코이호에 쏠린 세간의 각별한 관심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탐사 집념과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해양과학자 유해수 박사에게 돈스코이호는 보물선이라는 상업적 가치보다 역사적, 문화적, 해양과학적 가치가 훨씬 더 크다. 특히, 러시아가 생각하는 돈스코이에 대한 역사적 유산적 의미는 더욱 더 특별하다. 돈스코이호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대사령관의 항복 명령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항전하여 일본전함 3척을 침몰시키고 570명의 러시아 수병을 울릉도에 안전하게 내려놓은 뒤 배수판을 열고 항복 대신 스스로 침몰을 선택한 영웅적인 전함이었다. 이로 인해 세계 최대 크기의 핵잠수함을 ‘드미트리 돈스코이(TK-208)’로 명명할 정도로 러시아는 지금도 돈스코이호의 정신을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중앙역사박물관에는 바로 이 돈스코이호의 대형 모형도 전시되어 있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역사적 기록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돈스코이호’ 탐사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지난 1998년 2월, 우리나라가 한창 국제금융위기(IMF)의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때였다. 당시 유해수 박사가 소속된 한국해양연구원(지금의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첨단 탐사장비는 갖추고 있었지만 정부로부터의 예산 지원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자 대신 민간 기업의 지원으로 돈스코이호의 실체 탐사에 나섰다. 중도에 참여기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탐사가 잠시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탐사팀은 열정과 끈기로 2003년 울릉도 저동의 험준한 심해 계곡 중턱에 유령처럼 잠들어 있는 침몰선을 찾는데 성공했다.


그 후 지금까지 실질적인 인양작업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돈스코이호가 그 역사적인 모습을 바다 밖으로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책임자였던 유해수 박사를 만나서 한편의 드라마 같은 탐사 과정과 프로젝트의 추진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상하 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1905년 울릉도에 침몰한 러시아의 영웅적인 전함 돈스코이호 (6200톤) 석탄엔진과 돛대를 사용하고 뱃머리에 기뢰 제거용 긴 깃대를 장착했다.


보물선 발견 오보 해프닝


2000년 12월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찾았다”는 뉴스가 터져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때 일어난 비화부터 들려줄 수 있는가?
돈스코이호를 발견하기 전의 일이다.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직자가 “폐선박이 해양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두고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런 게 뭔 재미가 있겠느냐”며 아직은 기사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 해양연구원 탐사팀이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찾아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연구원은 러시아와의 외교문제와 우리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감 등을 고려해 돈스코이 탐사사업을 <밀레니엄 2000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아주 극비사업으로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접한 기자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간담회 자리에 함께 했던 기자 한 명이 그 진위를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책임을 맡았던 나에게까지 취재 전화를 걸어왔다. 그
기자는 이미 기사를 다 써놓고 확인 차 질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지원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서 탐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나 역시 기사화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직은 발견이 안 된 상태지만 조금만 더 탐사하면 실체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과 함께 더 이상은 대외비라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줄 수 없는 아쉬운 마음에서 돈스코이호 탐사의 필요성만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찾은 것처럼 보도된 것으로 기억된다.
온라인 저녁 뉴스로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찾았다”는 제목의 보도가 대서특필했다. 우리 연구원은 물론이고 해양수산부, 청와대까지 발칵 뒤집혔다. 탐사업무 관계자 모두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친구와 퇴근 후 술을 한 잔 하던 중에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황당한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현황 파악부터 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급히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기사내용 등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어떤 결과로 이어졌나?
아직은 사실이 아니고, 정부 역시 모르는 상태였다. 이런 추측 기사 때문에 실무 당사자였던 나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곳곳에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닦달이었고, 정부에선 왜 먼저 보고 안했느냐는 등의 질책성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사와 언론사에서의 문의 전화가 쇄도하는 바람에 혼이 나갈 정도였다. 과학자의 생명은 정확한 사실 확인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말하지 않은 일이 사실인 양 간주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 언론의 신뢰성에 무척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탐사사업에 한 건설회사가 참여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보물선 사업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지 않는가?
국내의 보물선 소식은 주요 해외 언론에서도 토픽으로 장식되었고, 참여기업의 장외주식이 100배로 폭등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온갖 문제들이 야기되자 추측기사를 보도한 매체를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도 언론을 상대로 싸우기가 버거운데 하물며 힘없는 연구기관이 상대하기란 효과도 없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연구원 내부의 의견이 있었다. 이에 따라 간단한 항의차원에서 해당 신문사에 관련기사 삭제를 요구했지만 “기사화 여부는 신문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대답만 거듭 들었다. 한참 후 해당신문 구석에 일부 기사가 오류였음을 시인하는 글이 올려 졌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말이 그 피해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는지는 겪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실물로 드러난 침몰선의 전설


탐사책임자로 겪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지원기업이 IMF 여파를 견디지 못해 중도에 법정관리로 넘어가는 사태에 처한 일이었다. 예산 지원도 자연히 중단되었다. 당시로선 탐사 작업에 매달려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돈스코이호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하고 수중카메라와 잠수정을 투입시켜 실체를 확인하는 단계가 바로 코앞이었지만, 탐사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를 맞았다. 다행히 채권은행과 법원에 부단히 설득한 끝에 탐사사업비의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가뭄에 내린 단비였다.


보물선 사업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록이 드물다. 도대체 위치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전설 같은 얘기에 매달렸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 자신도 한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혼란을 겪었다. 하나의 파도를 어렵사리 넘으니 또 다른 파도가 덮쳐왔다. 오랜 해양탐사와 힘든 업무에 탐사대원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엄청난 양의 탐사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탐사대원들조차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이렇게 마냥 탐사를 계속한다는 것은 허허벌판에서 바늘 찾기 아니냐, 민간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탐사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정도였다. 더욱이 일본의 전문탐사기업과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였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도 있었고, 울릉도 주민들이 “여기 해저지형은 험해서 아무리 첨단 장비를 동원해도 찾을 수 없으니 헛고생하지 말고 돌아가라”라며 하던 말도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러시아와 일본의 탐사기술 지원 일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의지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돈스코이호를 찾는다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재차 일어섰다.


탐사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추진했다면 발견도 시간문제일 것으로 생각한 기자가 기사 욕심에서 몇 발자국 앞선 기사를 쓸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도 시기가 좋지 않았다. 당시 남해 어느 섬에서 일제 금괴를 발굴하던 사람들이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에 전직 고위층의 동생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뒤따랐다. 보물찾기 사업에 대한 그런 불신감이 사회적으로 팽배하던 때라 법정관리 주무판사는 돈스코이호 탐사가 혹시 남해 보물선 사업과 연관 되었는지를 캐묻기도 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었다. 다행히 주무판사는 돈스코이호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끝까지 가야 한다”며 오히려 격려까지 해 주었다.


대망의 돈스코이호는 언제 발견했는가?
2003년 5월 20일이다. 침몰된 지 98년만이다. 우리 탐사 촬영요원들이 심해 유인잠수함을 타고 내려가 찾아낸 침몰선의 키(배의 조종 장치)를 비롯한 여러 잔해를 확인한 결과 그 모두가 전함의 부착물이었고, 그 침몰선은 바로 돈스코이호라는 것을 정확히 확인했다. 가수 이용은 10월의 마지막 밤을 잊지 못한다고 노래했는데, 나와 우리 탐사팀은 5월이 바로 그러했다. 그때는 정말 눈을 뜨고 꿈꾸는 것 같았다.


발견까지 계속 기업체가 탐사사업에 참여한 것인가?
참여기업이 법정관리 전까지 지원하였고 사업이 중단된 이후 다시 재개되었을 때 파산법원의 감독 하에 여러 은행 채권단이 참여했다. 탐사재개를 위해 여러 은행 채권단을 설득하고 파산법원 판사를 만나서 사업설명을 했다. 연구원 신분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울릉도 해저에서 발견된 돈스코이호 잔해들(152mm 함포(좌), 시모세탄에 불탄 조타기(중), anchor order(우)


일본의 탐사 참여 제안 거부


한때 한일 공동 탐사계획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다.
돈스코이호가 화제로 부각되자 일본 NHK가 KBS에 공동으로 돈스코이 탐사다큐멘터리를 제작하자는 계획을 세워 우리 정부에 제안했다. 탐사비용 대부분을 일본 측이 부담하고 우리 한국해양연구원과 일본해양과학기술센터(JAMSTEC)가 공동으로 심해 탐사활동을 하는 과정을 영상기록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정부의 기술평가회의에서는 첨단 탐사기술 교류와 공동 탐사활동이 심해 지질구조 등 해양과학연구에 도움이 된다는 참석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영해에서 행해지는 탐사작업에 일본이 참여함으로써 성공 이후에 일어날 미묘한 이해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무엇보다 돈스코이호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역사의식이나 입장이 다르다.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 단독 탐사로 발견한 게 바람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돈스코이호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자존심의 상징으로 한반도를 지켜주려 했던 우리의 희망이자 러시아의 영웅적인 전함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탐사팀이 발견하여 탐사의 성과가 나오면 그것은 곧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향수를 자극하거나 전략적으로 이용될 우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내가 강하게 반대 입장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지금도 군사대국화, 전력(戰力) 보유가 가능한 헌법 제9조의 개정 등 일본의 지도자들은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막연하게 울릉도 주민에 의해 구전되어온 돈스코이호 침몰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 정부출연기관이 탐사계획을 세우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명분과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 지구환경시스템 공학과에서 자원공학을 전공하고 지구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보물선이다, 침몰선 탐사다 하고 매달리는 바람에 내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연구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해저 침몰선 탐사 역시 내가 전공한 지구물리학 연구 활동의 한 분야다. 타이타닉호를 발견한 로버트 밸러드 박사도 나처럼 지구물리학자다. 밸러드 박사도 탐사과정 중에 소속 연구소의 반대에 부딪혀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타이타닉호 발견이 성공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 후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소로 부각되고 관광명소가 될 정도로 유명해지 않은가.


돈스코이호 탐사에 관심을 두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우리 연구원이 심해탐사와 돈스코이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6년 마지막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차관으로 들여온 심해탐사 장비가 도입된 이후다. 심해탐사장비의 성능 등 제반사항을 실험하는 데는 정확한 크기를 알아야 하는데, 심해에 침몰된 돈스코이호 만큼 좋은 실험대상은 없다. 그야말로 100년 실험장이요, 타임캡슐을 여는 것과 같다. 실제로 미국은 비행데이터를 획득하기 위해 각종 측정센서가 설치된 보잉 747기를 비행 도중 아리조나 사막에 고의로 추락시켜 그 내부 상황을 확인한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돈스코이호에 관심을 기울인 동기는 바로 국제금융위기(IMF)로 기업도산, 대량실업 사태 등 암울하던 1997년, 우리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물한 영화 <타이타닉>에서 비롯되었다. 바다 속으로 사라진 전설의 여객선이 훌륭한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그 실체를 발견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러일전쟁의 숭고한 역사가 깃들인 돈스코이호를 찾아내어 실의에 빠진 우리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때 마침 대학 동기와 선배가 참여기업의 간부와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실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큰 계기였다.


그 넓은 망망대해에서 침몰선을 찾는 현대판 동화 같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었나?
전설처럼 내려오는 돈스코이호 이야기의 실체 여부와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역사공부부터 해야 했다. 정확한 침몰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정보와 자료를 찾아 헤맸고, 국내외에 산재한 당시 해전사 기록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런 한편, 울릉도 주민들로부터 선대부터 내려오는 구술기록도 모두 채록하였다. 독도 수비대장으로 알려진 고 홍순칠 씨가 선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돈스코이호 발굴사업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실도 자세히 파악했다. 1981년 도진실업이라는 기업이 일본의 전문 탐사기업인 신일본해양의 300m급 유인잠수정의 도움을 받아 울릉도 해저를 샅샅이 뒤졌다가 실패하게 된 원인도 분석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등 국외에서도 관련 역사자료를 찾았다는데…?
러시아 해전사 기록보관소를 찾아가 돈스코이호 선임장교 블로킨 중령의 보고서를 입수했다. 일본 함정의 공격으로 러시아 해군의 사망자가 속출하고 상갑판이 크게 파손된 전함이 울릉도 동쪽 해안 수심 약200∼400m 깊이에 침몰되었다는 내용도 알아냈다. 갖가지 노력 끝에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러일전사 자료와 극비자료에서 해제된 방위청 방위연구소 자료를 통해 돈스코이호의 침몰 위치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다만, ‘동망루 정동쪽 1.5해리 떨어진 곳에 침몰했다’는 기록을 확인했지만, 현재 울릉도에는 동망루라는 지명이 없어 애를 먹었다. 다행히 전쟁 당시 침몰 위치를 스케치한 그림을 입수하여 개략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발견의 성패는 탐사구역 설정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물론이다. 모든 관련 자료조사는 예상되는 침몰 지점을 파악해 탐사구역을 설정하기 위한 과정이다. 탐사구역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탐사비용과 시간적 차이도 크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를 종합해 일단 1차 탐사구역부터 정했다. 그런 후 해양지질과 해류에 따른 이동 등 물리적인 환경을 감안해 2차 탐사 범위도 설정했다. 선정한 탐사구역은 울릉도 저동항 앞바다 남북 8km, 동서 6km 해저였다. 그곳은 수심이 100m에서 2,000m로 급변하는 심해 계곡이다. (하편에서 계속)

하편 기사보기 : /news/63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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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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