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농사꾼이 된 노중균 박사의 반전인생
대마농사꾼이 된 노중균 박사의 반전인생
  • 김두호
  • 승인 20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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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경영학과교수 재임용 포기, 고향서 일구는 내 꿈은 국제적인 대마왕 ”

【인터뷰365 김두호】노중균 박사(47)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가 된 뒤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한 엘리트 지식인이다. 그는 지금 강단을 떠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산골로 돌아가 밭 갈고 씨 뿌리는 농부로 변신해 있다. 학자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초의(草衣) 은둔(隱遁)의 촌부로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수입 섬유소재가 된 대마(大麻) 재배농업으로 대마왕이 되겠다는 야심의 인생 반전을 시도한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는 학문으로 터득한 경영논리를 대마 재배 농업에 적용해 고소득 친환경 농사를 짓겠다는 계획을 차곡차곡 실현해 가고 있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할 때 대마 농사를 먼저 시작한 제자에게 사업자문을 해주는 과정에서 자신도 대마사업의 미래와 가능성에 확신을 얻어 생산성 분석과 재배농법을 익혀 2012년부터 경작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교수에서 대마 농사꾼으로 길을 바꾸었지만 그의 새로운 도전은 꿈이 원대하다. 현재 대한삼베농업회사 법인의 임원으로 참여해 자신은 고향인 경북 상주지역을 맡고, 제자는 강원도 평창지역 대마 재배단지를 조성하고 있으며 몇 해 안에 대단위 경작지를 확보해 한미 FTA를 극복하는 국제적 농기업인으로 성장 발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안동 거창 보성 평창 지역에서 전통 재배농업으로 명맥을 이어온 대마는 주로 수의, 약수건, 이불, 행주 등으로 소재가 활용되고 있으나 국내 대부분의 삼베 수요는 국내산이 부족해 중국산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대마 가운데 노 박사가 선택한 품종인 청삼은 환각성분이 재래종에 비해 적고 오히려 환각억제 성분이 재래종에 비해 많아 농작물 육성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트랙터를 몰고 대마 밭을 일구는 노중균 교수에게 그곳까지 오게 된 과정을 물었다.

전설의 효자 정재수는 내 짝꿍

농사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일을 해본 사람만이 농부가 흘리는 땀방울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나오는지를 안다. 일을 하면서 느낀 솔직한 고백을 듣고 싶다.
나는 이곳(경북 상주시 화서면 사산2리 마암동) 농촌 출신이다. 행정 명칭이 마암동이지만 우리말로 말바우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농촌생활을 했다. 농사일의 기초가 손에 배여 있어서 논밭이 낯설지 않다. 유명한 효행소년 정재수가 바로 초등학교 때 내 둘도 없는 짝꿍이었다.

정재수라면 영화 <아빠하고 나하고>의 실존 주인공이었던 소년이 아닌가? 눈 덮인 엄동설한의 산길에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다가 동사한 전설적인 효자 소년이었다.
그렇다. 정재수는 서울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에 반공소년 이승복 소년 동상과 나란히 효행소년 정재수상으로 세워져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착한 내 단짝이었다. 그가 목숨을 잃은 1년 뒤 <아빠하고 나하고>가 만들어졌다. 1978년 2월 재수는 옥천에 있는 큰댁에 아버지와 차례 지내러 가다가 아버지가 산속 눈길에서 실족해 쓰러지자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간호하다가 아버지 곁에서 얼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됐다.

혹시 다닌 초등학교에 기념이 될 만한 유품이라도 남아 있는가?
모교는 상주시 화서면 사산초등학교인데 학생들이 모두 떠나가 폐교가 되었지만 정재수기념관으로 바뀌어 지금은 그의 효행정신을 기리고 있다. 박노식 씨가 아버지로 나오는 영화를 우리 학교에서 찍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의 몇 안 되는 동창들이 모임을 그곳에서 하게 되면 우리들은 잠시나마 회포어린 옛날로 돌아가 재수를 그리워한다.

전설적인 효자였던 정재수는 노 박사의 초등학교 단짝이었다. 그의 동상 앞에서 잠시 추억에 젖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학교수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돌아온 데는 용기와 신념도 있어야하지만 남다른 사연도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결정한 것은 아니다. 2005년 3월 연세대 경영학과 (원주 캠퍼스) 조교수로 임용되어 2010년 2월까지 재직하고 대학을 떠났다. 내 성격과 인생철학에는 다소 개혁적인 성향이 있다. 대학시절은 운동권으로 시위에 참여했고 교수가 된 뒤에도 촛불집회 때 국민과 소통하라며 두 차례 시국선언을 하고, 또 내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교직원 조찬 기도모임에 참가하지도 않고 학생들을 데리고 해인사 템플스테이를 가는 등의 행위를 보여 결과적으로 스스로 재임용 신청을 포기하는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다면 고생도 좀 한 것 아닌가?
27개월 간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채웠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하기 시작해 수사기관의 대공분실을 출입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암울한 사회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는 사회정의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35살까지 치열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결심한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가?
자부한다. 하루를 살아도 치열하게 보냈다. 입대하기 전 학생 때는 국제경상학생협회 연세대지부장으로 학술적인 동아리 활동에 빠졌으나 복학한 뒤는 운동권 동아리인 사회진출연구회의 열성 멤버로 참여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고백교회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한편 남동공단의 노동자를 찾아가 기타교습을 하며 의식화 운동을 했다.


하느님은 내 자만심을 두 번 꺾었다

당신의 개혁성향을 진보나 좌파로 볼 수도 있는가?
나의 과거는 진보나 좌파 따위의 이념이나 정치적인 성향에 매달리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사회적인 정의감을 앞세운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젊은 시절 나에게 두 번의 큰 시련과 좌절을 주셨다. 두 차례나 나의 자만심을 꺾어 정신을 차리게 하셨다.

그게 어떤 일인가?
나는 농촌 출신이지만 공부를 잘했다. 상주시 화령중학교 2학년 때 서울 금천구 강서중학교로 옮겨 선린상고 진학 때는 서울시 연합고사에서 200점 만점에 192점으로 수석 입학했다. 그러나 3년 장학금도 뿌리치고 1년 수료 후 검정고시로 대학 입학 자격을 따냈다. 애초에 대학은 서울대 국문학과를 가고자 하였으나 부모님의 요청으로 서울대 법대로 목표를 바꾸었다. 그런데 학력고사 성적이 서울대 법대 및 경영학과 커트라인에 조금 못 미쳐 서울대를 포기하고 연세대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대학 진학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좌절은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때 살고 있던 서울 봉천동 작은 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25시간 혼수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난 사건이다.

두 번째 사건은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사건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순간적인 일로 죽을 고비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이 살려주신 게 분명하다. 깨어난 후 한동안 자신감을 잃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으나 그 일로 깨달은 것이다.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당신이 지금 도전한 농부의 길에서 무엇을 바라고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다. 대마농장을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연세대를 떠난 후에도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에서 강의를 하며 학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나의 조교 출신 제자의 요청으로 대마재배 사업과 관련해 사업성 분석을 하다가 대마사업이 한미 FTA 체결이후 우리 농촌의 소득사업으로 장래성이 밝다는 것을 파악했다. 특히 화학비료로 인한 토양의 산성화를 막고 농약도 배제하는 친환경 녹색 농업이라는 점에서 나도 소매를 걷어 올려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 것이다.

대마밭에 씨를 뿌리고 있는 노중균 박사

대마로 사회적 농기업 설립이 목표


많은 사람들은 대마가 마약성 식물재료로 인식해 재배나 유통이 금지된 걸로 알고 있다. 대마도 종류가 많은가?
대마는 품종별로 분류하면 THC(Tetrahydrocannabinol 마리화나의 유효성분) 함량에 따라 산업용과 마약용으로 구분한다. 산업용은 THC 함량이 0.5% 미만이며 섬유장이 길고 내구성이 높은 품종으로 유럽과 러시아, 캐나다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약용 대마는 THC 함량이 0.5% 이상으로 재배가 엄격히 금지되어 주로 서남아시아와 아열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국내에는 THC 함량이 0.3% 이하로 산업용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다. 2001년 농작물 직무육성신품종심의위원회에서 전국적으로 장려 품종으로 청삼을 결정한 바 있다.

어떤 점에서 대마재배가 농가의 고소득 작물로 유망하다고 보는가?
대마는 어떤 기후에도 잘 자라며 척박한 땅에서도 특별한 재배 기술 없이도 파종 후 110일이면 3∼4m까지 자라는 식물이다. 대마 자체의 방충 항균 효과 덕분에 제초제 없이 유기농 재배가 가능하고 다른 식물과 윤작시 병충해를 방지할 수도 있다. 중금속에 오염된 토양의 정화 기능도 있다. 특히 농촌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심각해지는 때에 고령 농민도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여기에 대마 섬유 재료는 수입의존도가 높아 국내 수요가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앞으로 고급 섬유 소재로 개발이 무궁무진하다.

대마섬유의 특징이라면?
대마섬유는 매우 질기고 강하며 항균 능력이 뛰어나다. 물의 흡수 방수성도 면의 42배에 이른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생리 위생용품에서 속옷류와 고기능성 의류, 산업자재와 전자제품의 소재로도 활용된다. 적외선 차단 기능과 전자파 억제기능도 우수한 것으로 분석됐다.

대량 생산에 따른 기술개발도 과제가 될 것 같다.
내가 등기이사로 참여한 삼베농업회사법인이 세계 유일의 친환경 대마정련기술과 삼베 원사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매년 재배 면적을 넓혀 인피섬유에서 종이류까지 제품화를 위한 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나갈 것이다. 또 미생물 배양액을 활용한 정련 방식을 도입해 우리 농토의 토질을 바꾸고 다른 작물의 병충해를 막아주는 사업까지 추진하고 있다.

지금 대마 재배 면적이 어느 정도나 되는가?
내가 시작한 1단계 재배면적은 7천㎡ 쯤 된다. 이미 강원도 평창과 충북 영동군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했고 2013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재배 면적을 확장할 예정에 있다. 그와 함께 고령화 된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사회적 기업으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경영방식을 도입할 생각이다.

당신은 경영학 전공의 학자인데 이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가?
나는 그동안 학술지와 저서, 논문을 통해 서구와 한국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경영제도가 좋은 우량 서구기업의 경영방식이라 할지라도 무분별하게 한국기업에 이식하면 실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한국적인 경영방식이 무엇인가를 이론적으로 제시해왔다. 곧 발표할 저서도 ‘경영 한류를 위한 일과 사람관리’인데 비록 농촌에서 일하지만 나의 학문은 버릴 수가 없다. 일터가 다르지만 학문적인 연구와 과제, 경영학의 논리는 변한 것이 없다. 학문은 반드시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주장하는 한국적인 경영방식을 요약해서 설명해줄 수 있는가?
나는 그동안 국가기관과 대기업의 경영 컨설팅이나 학술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했고 정치 경제 시스템이 다른 세계 여러 나라를 찾아가 전공과 관련된 현장 경제 경영실태를 틈틈이 조사 분석하며 살았다. 삼성 LG 현대 등 우리 기업의 브랜드가 세계 속에 부각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량기업의 경영방식은 여전히 서구식이지 한국식이 아니다. 우리 기업사를 돌아보면 1980년대까지는 일본식 경영방식이 이식되었고, 1990년대 이래는 미국식이 무분별하게 도입되었다. 이제 한류 경영방식이 정립되어야하는 시기가 왔다. 한국적인 경영방식은 이 시대에 맞는 한국 국민 정서와 문화, 독창적인 한국적인 전통 경제 윤리와 특성들을 기둥으로 세우는데 있다.


남들은 앞만 바라보고 한창 돈과 명예를 좇아 뛰고 있을 사십대에 노중균 박사는 멈춰 서서 땅을 갈고, 바람 속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는다.

농부가 된 대학교수의 새로운 삶에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대마로 성공한 뒤 장래 인생 설계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가?
대학시절 교수보다 기자가 될 뻔했다. 한국일보 공채에 응시해 2차 시험까지 최종 5명에 선발되었으나 3차 면접시험 통고를 제대로 못 받아 응시에 불참해 운명이 바뀌었다. 어떤 점에서 사회성과 정치성이 강한 면이 있다. 지금 농촌으로 돌아온 것은 나의 또 다른 꿈을 향한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홉 남매를 낳아 키우신 아버지가 별세 하시고 어머님이 혼자 시골집에 사실 때 어느 노스님이 지나시다가 문 앞에서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면서 이 집에서 총리가 난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더 정치성이 잠재적인 기질로 생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새로운 기업농으로 사회적인 기여를 해서 내 고향 상주시를 발전시켜 기회가 온다면 시장도 해보고 싶고 한걸음 더 국가를 위해 큰일도 해보고 싶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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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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