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동안 지독한 짝사랑중인 연극배우 강태기
40년 동안 지독한 짝사랑중인 연극배우 강태기
  • 서영석
  • 승인 200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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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프로무대 ‘에쿠우스’ 못 잊어”



【인터뷰365 서영석】배우들은 연기인 강태기의 삶을 두고 ‘연기에 신들려 산 생애’로 평가한다. 연극계의 큰 얼굴 강태기가 2013년 춘삼월 어느 날 돌연 지켜보는 사람 없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빈 소주병 하나를 곁에 두고 홀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63살 나이. 외출에서 돌아 온 여동생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눈을 감은 뒤였다고 한다.

1960년대 말 극단 실험극장으로 연기를 시작한 강태기는 1976년 TBC 공채 6기로 탤런트가 됐지만 중년 이후 그의 무대는 주로 연극이었다. 화제를 남긴 <에쿠우스> <명성황후> 등 연극을 비롯해 유현목 감독의 영화 <사람의 아들> 등 5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한국연극배우협회 수장까지 지냈다. 이혼 후 인천에서 여동생과 살던 그의 죽음이 지병인 고혈압 합병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기인 강태기의 쓸쓸한 타계를 추모하며 그와 대학로 연극시대를 함께하는 동안 형제처럼친분과 애환을 나누어 온 연극연출가 서영석 감독이 2008년 강태기 생전에 인터뷰 한 내용을 다시 전재한다. <편집자 주>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힘드시나보죠?

힘들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하지만 한 번 공연을 하고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탈진을 할 정도로 에너지가 바닥이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었나? 하하.


예전에 비해 무대에서 에너지가 많이 떨어져 보이는데?

그 표현은 썩 부적절한 표현 같지만, 어쩝니까? 나이가 있는데. 나도 사람이다 보니 나이는 못 속이나 봅니다. 하지만 아직은 창창합니다. 후배들에 밀리지 않으려 발악(웃음)을 하다 보니 용만 쓰는 꼴일지는 몰라도.

나이는? 거의 평생을 연극으로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요?

호적에는 1951년 7월 9일로 등재되어있지만 실제는 1950년 7월 9일이죠. 우리 나이로 치면 59살,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지요. 1970년 21살의 꽃다운 청춘에 연극에 발을 디뎌 거의 40년을 무대에서 지낸 셈이죠.


데뷔 당시와 지금의 연극계의 차이가 있다면?

변했죠, 너무도 많이, 좋아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겁니다. 그 당시 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려웠지만 특히 연극계는 말할 나위가 없었어요. 공연이나 연습 때 냉난방은 고사하고 식사조차 해결하기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요즘 후배들에게 그런 말 하면 웃습니다. 요즘 친구들이 굶는다는 걸 이해나 하겠어요?




지금까지 한 공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프로 무대에 처음 올랐던 작품으로 1970년 극단 실험에서 공연했던 ‘에쿠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지요.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너무 열심히 했고 나를 배우로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으니까요. 또 연극으로서는 최초로 공전의 히트를 치며 한국 연극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멤버들이 아직 우리나라의 공연계에서 중추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지요. 젊음의 용기도 있었지만 참가자 전원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덤빈 작품이기도 하고요.


‘배우 강태기’하면 중년 팬들은 아직도 ‘에쿠우스’의 강태기를 연상할 겁니다.

그 작품이 배우 강태기의 기틀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또 너무 힘들었기에 생각하기 싫은 부분도 있습니다.

상복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실제 수상 경력은?

글쎄요, 명성에 비해 그리 다복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배우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들은 다 받았지만, 아무리 상을 많이 받으면 뭘 합니까? 그저 응접실의 장식품에 불과한 걸, 배우는 스스로의 자부심과 관객의 사랑이 더 큰 상이라 생각합니다.


방송이나 영화에 섭외가 끊이질 않는데 유독 연극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요?

결코 집착은 아니지요. 불러만 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방송이나 영화는 쩐(?)이 무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탐나기도 하지만.., 꼭 연극연습을 시작하면 섭외가 들어오는데 도리가 없지요.

혹자들은 연극을 하다가도 그쪽으로 달려가지 않습니까.

물론 금전적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우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도리가 있는 겁니다. 요즘 후배들에 대해서는 그런 면에서 화가 나지만 선배로서 그들의 생활을 책임질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연극과 사랑에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는 모릅니다만, 연극…, 하면 할수록 깊이 빠지는 묘한 놈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지요. 아무리 깊이 사랑에 빠져도 시간이 지나면 신비감이 사라져 모든 것이 시들해지기 마련인데 연극은 도무지 그 깊이와 변화무쌍한 변신을 가누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서 포근히 감싸주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안타깝고 불쌍해 며칠을 안고 울어도 설움이 풀리지 않기도 하지요. 여름날의 태양 같기도 하다가 한겨울의 서릿발보다 더 차갑게 돌변하기도 합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천진함과 장미의 가시, 주인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는 페르시안 고양이의 발톱 같기도 하고 그 천(千)의 얼굴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어려운, 마약보다 더 무서운 놈이죠.

명성은 얻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부(富)는…?

우리네 직업이 그렇죠. 돈과 명예, 등식(等式) 같기도 하지만 한 몸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돈을 좇았으면 지금보다야 윤택한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후회는 안합니다.


배우를 안했으면 뭘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천직이라 생각했기에 다른 어떤 생각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아마 연출이나 작가면 혹시 하는 생각은... 그래도 강태기는 배우입니다.


배우가 지닌 직업적 매력을 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은퇴가 없지요. 농담 같지만 앉아 있을 수만 있어도 연기는 가능합니다. 연기와 연극의 매력은 연극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순수하고 진지한 공연을 통해서 관객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연기의 매력은 연기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 경지의 희열입니다.


가을입니다. 가을다운 가을에 뭔가 감성적으로 느낌이 있다면?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 나무들... 처음 대학로에 극장들이 들어설 때보다 부쩍 성숙해진 플라타너스들. 저 놈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또 한해가 간다... 가끔은 무대가 무서울 때가 있지요. 내가 진지한가, 내가 하는 행위가 그 배역에 맡는 연기인지 까닭 모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무대와 연기에 대한 안목이 생기려는데 인생은 많이 지나왔다는 자괴감, 그래서 예술이 참 어렵고 고되고 힘든 길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의 연극관이나 예술관은 무엇입니까?

너무 포괄적인 질문인데요. 연극이나 연극관에 대해 짧은 시간, 몇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석학(碩學)이 있을까요? 난 그저 진솔하자, 내가 맡은 역에 최대한 자신을 투영하자, 그 정도, 예술?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혹자들은 예술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견해에 반대를 합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작품의 테두리에 가두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창조했을 때 비로소 희열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자유와 일맥상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겁니다.


연극의 미래와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하시죠.

겉멋에 치중하는 후배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승부가 힘든데,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연극이 이루어지는 건데 외형, 겉으로 드러나는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연기만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연극이 예술인 것은 자기 자신만의 연기를 창조할 수 있어야 가능한데 남의 흉내나 내는 행위는 자신의 미래를 갉아먹는 우둔한 짓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현실도 중요합니다. 먹고 살아야지요. 하지만 뭐가 우선이지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평소 외모와는 상이하게 무대에서는 ‘고급스럽다’라는 느낌이 드는데 본인은 자신의 그런 분위기를 아시는지?

…? (웃음) 연기에 충실하려다 보니...




불과 몇 시간 전 무대에서 살아 퍼덕이는 생선의 생동감을 느꼈던 그의 어깨가 조금은 쳐져있지만 동시에 성숙한 인간의 고결함이 느껴진다. 강태기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연극배우’라는 타이틀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 한때 영화나 방송의 외도를 했던 시간들도 있었으나 이젠 고향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고참 배우로, 자신보다 연극계의 미래와 후배들을 안쓰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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