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PD에서 교수로, 다시 화가로,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중>
1세대 PD에서 교수로, 다시 화가로, 강현두 서울대명예교수<중>
  • 김두호
  • 승인 201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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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가 된 최초의 광고 방송

【인터뷰365 김두호】최초 TV방송 개국 비화

군사정부가 당시 텔레비전 방송 도입을 서둘러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개국 날짜가 1961년 12월 31일이었지만 당초 계획된 개국 예정일은 1962년 6월로 알고 있다. 군사정부의 무리한 요구와 재촉으로 일정을 두서너 번 앞당겼고 또 최종 개국 행사도 6일 앞당겨 크리스마스 날로 잡았다가 취소됐다. 적어도 1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으나 불과 3개월 정도에 가동을 한 것이다.
텔레비전은 새로운 전자전파 시대를 상징하는 환상의 첨단 미디어였다. 군사정부가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줄 깜짝 선물로 텔레비전 방송 개국을 추진한 것이다. 준비하는 동안 군사정부의 고위층들이 빈번하게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찾아와 진도를 체크하고 독려하는 가운데 거대한 물량의 방송장비들을 공수해와 일사천리로 최초의 TV방송이 문을 열었다.

개국 초기에는 해프닝도 많았을 것 같다.
첨단 매체를 가동했지만 방송 제작 업무는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시스템에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가며 일을 했지만 업무방식은 관례를 만들어가야 했으므로 실험적이고 엉성한 게 많았다. 프로그램 편성표를 칠판에 적어서 바람막이 창으로 활용했는데 그 후 방송국 편성표는 어디서나 칠판을 사용하는 것이 전통처럼 됐다. 창문공사가 안 된 방에서 초겨울의 삭풍에 떨며 작업했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서울에서도 방송국이 있었던 남산 바람은 별나게 매섭다. 칼바람이었다.

개국 당시에 맡은 일은?
개국기념행사에서 박정희 장군이 참석해 축하 연설을 했다. 나는 교양프로그램 프로듀서이면서 무대 조감독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로 기념행사나 인터뷰, 연극, 오페라, 음악회 등의 현장에서 생방송 중계 프로를 연출하고 제작해 100여 편 쯤 방송했던 것 같다. 스포츠는 야구 축구는 프로팀이 없던 시대였고 중계할만한 인기 종목은 농구 정도였다.

TV 방송 초기 특기할만한 사건이나 중계현장에서 겪은 일화를 들려 달라.
드라마센터에서 <밤으로의 긴여로> 연극공연을 TV카메라로 담아 낸 것이 현장 중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아찔한 경험은 서울운동장에서 3.1절 행사 중계를 할 때 카메라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앉아 있는 연단 무대를 찍다가 웅성거리는 군중을 보고 카메라맨이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돌린다는 것이 그만 대학생 시위 현장을 찍고 말았다. 중계 책임은 나한테 있어서 그 일로 한동안 불안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할 때라 여권이 안 나올 수 있어서 걱정했는데 무사했다.

방송관련 갖가지 에피소드 중에는 어느 때나 생방송 중계 때 일어난 돌발사고 일화가 가장 재미있고 많은 것 같다.
카메라 한 대로 중계하던 과거에는 현장 연출자에게 장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TV는 영향력이 큰 매체라 정치적으로 카메라가 동원되는 사례도 적잖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군사정권 시절의 보도뉴스는 지시사항이 우선이 됐고 정해진 지침을 벗어나지 못했다. 1962년 미국대사관 옆에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에 방송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삼엄한 검색대를 통과해 중앙 회의실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별들이 번쩍이는, 그 시대 주역들이 한자리에 늘어 선 모습을 보고 조금은 섬뜩하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순진한 촌닭 같은 젊은이였다. 그래도 개국을 준비하던 때 자주 찾아온 김종필 씨 등 지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안하지는 않았다.

과거는 실내 현장중계를 하려면 요란하게 조명기재를 동원해 공연장의 반발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TV카메라 튜브(Tube)는 비디오 시스템 전체의 질을 좌우하는 눈(目)과 같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로 카메라도 고성능에 고감도, 경량화 되었으나 비디콘(Vidicon) 카메라 튜브시대는 10킬로와트짜리 대형 조명기재를 동원해 강렬한 빛을 쏘아댔다. 조명 불빛으로 공연에 지장을 주고 무대 미술이 죽어 다들 싫어했다. 한번은 오페라 중계를 앞두고 출연 성악가들이 조명 설치를 거부해 생방송 중계가 펑크를 내게 되어 난리가 났다. 지휘자인 임원식 씨가 중간에서 적절한 보상을 약속하며 중재를 해 간신히 진행이 됐었다. 조명의 의존도가 줄고 감도가 높은 IO(Image Orthicon) 튜브 카메라를 활용하게 되면서 중계방송의 조명의존도가 줄어들었다.

흑백 TV시대는 시청자도 많지 않았다. TV가 영향력 있는 매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민방이 등장하고 또 1980년대 컬러 영상이 비롯되면서가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1970년대만 해도 동네에 TV수상기가 있는 집이 있으면 구경꾼이 모여들던 때였다.

TV 광고를 처음 내보낸 연출자였다는데 첫 광고는 어떤 광고였는가?
TV방송은 라디오와 달리 막대한 재정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사업인데 앞을 내다보지 않고 가동을 서둘러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결국 광고방송을 도입키로 하고 당시 공보처 소속 사무관이었던 이완희 편성계장이 중심이 되어 정부가 공표할 자료를 다급하게 준비했던 일이 있다.
방송으로 기업체 광고를 하고 돈을 번다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방송광고회사는 물론 기업에도 담당직원이 없던 시절이다. 저녁 7시 상업광고 방송을 시작하면서 새 편성에 들어간 프로가 내가 연출을 맡은 <퀴즈 아카데미>였다. 광고방송이라는 것이 상품 슬라이드 몇 장에 음악을 깔고 광고 문안을 아나운서가 읽는 식이었다.

브롬빈이라는 드링크 광고가 첫 TV방송 광고였다. 그런데 생방송인 첫 광고방송 중에 사고가 터졌다. 나의 큐 사인에 따라 두 사람의 여자 아나운서가 멘트를 주고받는 데 먼저 시작한 서영희 아나운서가 시작하자마자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조정실에서 급히 오디오를 껐다. 이어서 시작한 이연숙 아나운서까지 웃음이 터져 나와 또 목소리를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아나운서들이 안 해본 상품 선전 멘트를 한다는 것이 겸연쩍었는지 폭소사고를 낸 첫 광고가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개척시대였기에 애교거리로 넘어갈 수 있었다.


강 교수가 밝히는 개국 초기 방송국 비화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유학을 떠난 데는 어떤 동기가 있어서인가?
개국요원으로 일본 NHK나 미국의 방송시설을 보고 온 분은 개국의 책임 리더인 최창봉 씨와 기자직의 유인목 씨 정도뿐이었다. 당시 일본 TV방송도 초기단계였다.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TV방송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개국 후 방송국 운영조직도 관료화 되어 초기 인력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TV방송의 총책임자가 라디오의 하부 직제로 출발했으나 개국 후 국장직제로 신설 승격되자 군 출신 인사가 그 자리에 취임해와 창립직원들과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TV방송국은 창설인재들이 한사람씩 떠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미국서 영화와 TV관련 유학을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스카우트 되어 온 정일몽 씨 같은 분은 아침 조례 때 포켓에 손을 넣었다가 상부에 밉보여 결국 방송국을 떠난 일로 신문 가십에 오르기도 했다. 방송국 분위기가 싫어서 유학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꿈꾸던 생각을 보다 빨리 실천하게 한 동기는 됐다.

150달러 들고 미국 유학

지금은 유학을 쉽게 생각하지만 1960년대는 해외여행도 하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그 시대 유학을 다녀온 분들에게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귀감을 주는 사연들이 많다.
나도 단돈 150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떠났다. 대다수 유학 가서 접시 닦으며 공부할 때였다. 그때는 미국의 친지가 재정보증을 해야 유학 비자가 나왔다. 나보다 먼저 간 대학동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일본에 가서 국제선을 타던 때인데 나는 비행장이 김포로 옮긴지 얼마 안 된 1963년 서북항공기로 불렀던 노스웨스트 편으로 일본에 가서 도쿄 아카사카 호텔에 묵고 태평양 횡단 국제선 보잉 707기를 갈아탔다. 호텔이 우리나라에는 반도와 조선호텔 밖에 없던 시대에 일본에서 호텔 구경도 처음 했었다.

나는 떠나기 전 유학중인 친구에게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미국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전해 달라고 했더니 그는 비서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엄청난 위치에 있다는 말을 했다. 미국의 프로듀서는 연출 기획 제작을 총괄하는 우리의 CEO 수준이었다.
나는 다행히 친구를 통해 미국의 3대방송사로 알려진 보스톤의 WGBH TV에 이력서를 제출해 취업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한국에서 방송업무를 본 경력을 인정받아 방송국 일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보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전역에서 선발한 10명의 워킹 스카라십 학생 중 외국인은 나혼자였으므로 KBS TV 연출 실무 경험이 행운을 안겨준 셈이었다.

방송의 실무와 이론을 나란히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유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 오전은 대학에 가고 오후는 방송국에서 일했다. 첫 해는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 기술 조작 일을 했고 이듬해부터는 조정실에서 스위칭과 영상기술을 담당하거나 간단한 뉴스 프로를 연출했다. 세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정실에서 월터 크롱카이트 앵커가 비장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멘트를 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의 방송생활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장면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전철을 타고 밤늦게 귀가해 다시 밤을 새워 과제물을 준비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는 미국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머로나 프로듀서 후래드 프랜드리 같은 방송인이 되려고 다짐했다.

<계속>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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