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잃고 눈물로 수상한 이해랑 연극상, 손봉숙
아버지 잃고 눈물로 수상한 이해랑 연극상, 손봉숙
  • 정중헌
  • 승인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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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손봉숙의 연기인생 / 정중헌




“이 상은 제게 두 배의 기쁨과 두 배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인터뷰365 정중헌] 제18회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 배우 손봉숙은 지난 8일 조선일보사에서 열린 시상식을 마치고 필자에게 상 받은 소감을 이렇게 풀어냈다. 그에게 이 상은 구원이었으나 그래서 슬픔이 더욱 밀려든다는 것이다.

50이 넘도록 연극과 결혼하다시피 홀로 살아온 손봉숙의 정신적 반려는 아버지였다. 군 출신인 아버지는 평생 홀로서기를 못하는 딸에게 용돈을 주고 용기를 넣어준 정신의 반려자였다. 그런 아버지를 지난 2월 여읜 손봉숙은 삶의 의욕을 잃고 눈물로 매일을 지새웠다. 연극할 의욕도 삶의 에너지도 모두 잃은 무중력 상태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를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어 병상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빌고 몸부림치며 애원했어요. 제 인생 어떤 무대보다도 절실한 간구였고, 진정한 몸짓이었을 거예요. 아버지를 붙들고 울부짖다가 실신해버렸으니까요.”

한 달이 지나도 눈물이 솟았고 몸은 지칠 대로 지친데다 어깨까지 저려왔다. 이런 절망의 상태에서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해랑연극재단과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뜻밖의 낭보가 날아 든 것이다. 배우이자 연출가로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토대를 놓은 고 이해랑 선생의 연극 정신을 기려 제정된 이 상은 국내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단과 연출가, 배우, 스태프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상 중 하나다. 중진급에게 돌아가던 이 상을 50대 초반의 손봉숙이 받은 것은 의외라기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것이 연극계 중론이다.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큰 상을 받고 몸까지 추스렸으니 기쁨이 두 배지만, 아버지에게 이 기쁨과 홀로 선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니 슬픔 또한 두 배지요.”


시상식 날 수상 소감을 하러 나온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늘 이 자리에 계셨으면 많이 예뻐해 주셨을 아버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아빠”라고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식이 끝난 후 그는 “아빠! 제 용돈 걱정하고 계시죠”하는 말을 하려다가 속으로 삼켰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가 용돈을 주지 못하니까 한꺼번에 상금(3천만원)을 내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다른 분들은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가신다고 하던데 저는 눈물샘이 터진 것 같았어요. 하도 오른쪽 가슴 위쪽 어깨 부분이 저려 교통사고 후유증이 도진 게 아닌가 해서 치료하러 갔더니 슬픔의 감정 선이 돌처럼 굳어 있다는 거예요. 치료하는 분이 며칠에 걸쳐 근육을 풀어주며 슬픔이 좀 덜 할 거라고 했는데 정말 좀 나아지더라구요."




어깨가 드러나는 검정 드레스로 식장의 분위기를 젊게 한 손봉숙은 “이 상은 내가 무대에 다시 서고 또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주었다”며 실로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 꿈이 연습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연극인들과 함께 예술과 삶을 논하는 스튜디오를 꾸미는 것이에요. 상금이 생겼으니 조촐하게나마 제 꿈을 실천에 옮길 궁리를 하려고 해요. 배우 훈련을 통해 연기 메소드도 만들고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좋은 작품도 하고 싶어요.”

슬픔의 수렁에 빠져 있던 배우 손봉숙은 수상을 계기로 다시 활력을 찾았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성숙한 연기자가 되겠다는 다짐도 하고 있다.


박정자, 손숙, 윤석화, 윤소정에 이어 여배우로는 다섯 번째로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 손봉숙은 169㎝의 훤칠한 체격에 시원스런 미소, 동서양 연극을 넘나드는 다양한 연기력 등 특징이 많은 배우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를 잘 모른다. 하지만 오로지 연극 무대를 고집하며 지난 30년 동안 60여 편의 연극에 출연한 집념과 연기에 대한 열정이 이번에 평가 받음으로써 그의 숨은 진가가 빛을 발한 것이다.


“1977년 데뷔작 <상자속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손봉숙은 2006년 공연된 <바람의 욕망>까지 30년간 오로지 무대를 지켜온 배우이다. 1991년부터는 국립극단 배우로서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백양 섬의 욕망> <피의 결혼> <수탉이 울지 않으면 암탉이라도>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햄릿> <시련> 같은 작품들이 얼른 떠오를 정도이다. 특히 1993년 국립극단의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그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인 연기였다. 큰 키에 가냘픈 몸매, 아름다운 얼굴과 정확한 발음으로 압도하는 그녀의 연기는 관객들의 심리를 사로잡는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영화나 텔레비전 주변을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연극 무대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온갖 열정과 의지를 무대에만 쏟아왔다. 참으로 드문 배우이고 우수한 배우이고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다.”


임영웅 위원장을 비롯한 유민영, 서연호, 손숙, 김광일 등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필자도 공감한다. 우선 손봉숙은 젠틀하다. 잔머리 쓰지 않고 경우가 바르다. 큰 키가 때로 부담이 된 적도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는 언제나 군계일학이었다. 도시적인 매력에 세련미가 특기지만 풀어지면 전현 딴 판이다.


‘극단 자유’ 단원인 그는 이병복 제작에 김정옥 연출의 토탈 연극 <무엇이 될고 하니>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와 <따라지의 향연> <피의 결혼> 등에 단골로 출연하여 이색적인 아우라를 만들어 냈다. 이 작품들과 함께 순회공연도 많이 가졌는데, 베네주엘라 카라카스공연 때 필자가 동행한 적도 있다.





자유극장 스타일의 연기자로 알았던 그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서구적인 세련미를 한껏 풍기며 노래와 춤 실력까지 보여주었다. 국립극단 배우 시절 필자는 <피고지고 피고지고>라는 창작극에서 그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 그에게서 한국 여인의 끈끈한 정서와 질박한 멋, 가락과 풍류가 배어 나온 것이다.

<백양 섬의 욕망>의 삐아, <베르나르도 알바의집>의 아르타리오, <햄릿>의 거르투르 연기도 좋았지만 필자는 얼마 전 아더 밀러의 <시련>에서 그녀가 해낸 레베카 역을 잊을 수 없다. 인생을 어느 정도 달관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여유와 중량감이 뿜어 나왔고 무대의 중심을 잡는 힘이 있었다. 아! 하고 감탄했던 그 연기력과 성숙함이 이해랑 연극상을 받게하고도 남았다.


필자는 여건이 되면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산 여류화가 천경자의 삶과 예술을 영상이 있는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 그때의 주인공은 손봉숙이라고 일찌감치 점찍어 두었다. 손봉숙도 내심 싫지 않은 표정이다. 천경자의 끼와 열정을 무대 위에 재연할 배우는 당연히 손봉숙이라면서 아직 대본조차 착수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손봉숙의 이번 수상은 묵묵히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한 배우에 대한 조명이라는 점에서 한국 공연예술계와 배우 세상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키가 커서 늘 슬프게 보인 손봉숙이 이번 수상 카탈로그에서 파안대소하는 사진은 그에게 잔다르크(데뷔작 배역 명)의 유전자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손봉숙은 배우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는 흔치않은 배우 중 한명이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 특히 자유극장 멤버로 돌아가면 그는 궂은일도 마다않는 살림꾼이 된다. 요즘 이병복 선생의 특수의상 제작작업을 어깨너머로 보며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그가 앞으로 멋진 작품, 멋진 무대, 멋진 연기를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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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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