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서 간다. 이은미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서 간다. 이은미
  • 황두진
  • 승인 20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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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의 여왕 이은미의 노래와 삶 / 황두진



[인터뷰365 황두진 / 사진 김우성] ‘맨발의 디바’, ‘라이브의 여왕’, ‘직설화법’. 가수 이은미를 대변하는 많은 수식어들은 대체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음악적 고집’으로 귀결된다. 그녀가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를 통해서든 간간히 다루어지던 매체를 통해서든, 세인들의 시선 속 이은미는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고집을 부려서라도 끊임없이 잡으려는 무언가가 정확히 알려진 적은 없다. 오늘 그녀는 20여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그리고 기탄없이 인터뷰365에 고백했다.



인터뷰라 생각 마시고 그냥 삶과 음악을 편안하게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길었던 음악 여정을 돌이켜 ‘레전드’로서 해주실 수 있는 말씀들을요.


난 대한민국에서 그 표현을 쓰는 게(레전드) 굉장히 싫어요. 왜냐하면 몇몇 전설적인 사람들이 그 말을 스스로 버렸잖아요. 내가 이런 얘기 했다하면 섭섭해들 하겠죠. 근데 전설이라 하면 그 위치를 지키려는 노력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은미 씨는 그걸 지켜왔잖아요. 무대에서 말이죠.


나도 언제 변절할 지 어떻게 알아요? 아직까지는 그렇다 해도 나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얼마든지 변절할 수 있죠. 요즘은 변절하고 ‘세상이 그런 걸’하고 변명하는 게 마치 유행처럼 되었던데요? 나도 변명 좀 하지 뭐.





‘레전드’라는 말이 싫다고는 했지만 <어떤 그리움>으로 시작하여 <자유인>을 거쳐 <마논탄토(악보에서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를 뜻하는 용어)>에 이르기까지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 ‘사라 본’의 목소리를 듣고 굉장히 감동을 받아서 ‘과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구심 반, 욕심 반으로 뛰어들었죠. 그런데 처음부터 재즈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물론 재즈의 장점을 충분히 수용하는 보컬리스트가 되고는 싶었지만 재즈보컬리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꿈이 원대했거든요.



어떤 꿈?


재즈는 2천석 이상의 극장에서 공연하면 사운드를 들을 수 없어요. 근데 나는 스타디움 공연이 목표였죠. 어디까지나 대중적 음악을 하는 팝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대신 내 자신이 스펀지처럼 여러 음악들을 빨아들여서 여태까지 들었던 다양한 음악들을 표현할 수 있는 보컬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 욕심은 아직 변함이 없습니다. ‘아 이은미는 록을 하는 사람, 이은미는 재즈를 하는 사람, 이은미는 R&B를 하는 사람이지’하고 규정되어지는 것은 이은미가 아닙니다.



의외인데요? 누구보다 크고 화려한 무대를 꿈꿨다는 말이죠?


기왕이면 ‘쟁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내가 정의하는 ‘쟁이’라 함은 어떤 한 곡만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고등학교 때부터 소위 말하는 청계천 ‘빽판(LP)’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듣곤 했는데 오죽하면 우리 집에 놀러온 후배들 중에 내가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음악들을 듣는 것에 대해 질려버리는 애들도 있었죠. 학창시절에 굉장히 대중적인 음악들, 다양하고 복잡한 음악들을 들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과 그렇게 음반과 의견을 교환하며 지내왔기에 그런 꿈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네요.


여하튼 그렇게 시작하여 1, 2집을 낼 당시에는 미성에 가까웠던 허스키보이스를 ‘알리사 프랭클린’같은 파워풀한 보컬로 바꾸는 게 목표였죠. 내가 원하는 보컬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런 까칠까칠한, 약간은 거칠다싶은 푸석푸석함이 필요했거든요. 내 목소리가 너무 윤기 있는 게 무척 싫었죠. 윤기 있는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음악들의 한계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내 목소리의 윤기를 당장 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어차피 대중음악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내 목소리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 뭔지 내 나름대로 생각해냈죠. 성인들이 들을 수 있는 편안한 음악, 그런 류의 음악으로 만들어지도록 노력했던 음반이 1, 2집입니다.





그리고 3, 4집을 하는 동안에는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음반을 내기로 했던 기획사에서 계약을 한 후 잠적을 한 것이죠. 그땐 정말 몸으로 때웠어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음악을 했던 친구였기에 더 믿었었는데, 내가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내 재능을 발견해 준 친구였는데. 사람에 대한 애정, 무대에 대한 애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더군요. 세상이 싫었습니다. 이전에 1, 2집이 성공을 했다고는 해도 실제적으로 내게 금전적인 도움은 없었기에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도 말할 수 없었어요. 6개월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좀 독해진 것 같아요. 하하. 오기가 발동한 거죠. ‘세상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버텨보자.



그 전까지는 음악이 ‘이은미라는 사람을 만드는’ 도구로서 사용이 되다가 3, 4집 때는 ‘투쟁’의 도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나 혼자 일어서야 했습니다. 녹음을 해야 하는데 녹음비가 없어서 매일 백만원, 2백만원씩 빌리러 다녔죠. 그런 식으로 3, 4집을 만들고 나니까 정말로 녹초가 됐습니다. 당시 소화했던 무대가 엄청난 양이었어요. 그래도 에너지가 남아있었던지 <노스텔지아>라는 앨범을 내게 된 것이고요.



그게 5집이었죠?

아니요. 4집과 5집 사이에 만든 음반입니다. 그게 대박이 나면서 빚 다 갚고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연습실도 생겼어요. 3, 4집은 정말 살아남기 위한 매일 매일의 투쟁이었죠. 밴드를 구성해서 아이들을 지켜내는 것도 굉장히 힘이 들었고, 진짜 전사로 살았습니다. 누가 건드리지를 못했으니까. 당시 전인권 씨와 힐튼호텔에서 공연차 만났는데 저에게 그러는 겁니다. “은미야 너 호랑이 같아” 그런 과정들이 아마 내가 강렬하게 보였던 이유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스텔지아> 음반을 내고 공연도 흥행이 되면서 빚도 갚고 (밴드)아이들 악기도 사주는 등 생활이 점차 나아졌고 음악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큰 욕심을 버렸다고 해야 하나. 사실 전 음악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봤거든요. 내가 달러를 버는 게 꿈이었는데 뉴욕 공연도 해봤고. 하하.


또 <노스텔지아>와 5집를 거치면서는 ‘내가 이렇게 세상을 향해 계속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데 세상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1집을 만들고 데뷔해서 2001년까지 변하는 게 없었습니다. 방송 상황이나 시스템이나 매체들이나 음악계나. 그런 것들에 대한 지루함, 나름대로의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러움 같은 게 5집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나 혼자만 꼿꼿한 뒷방 늙은이로 앉아 있는 느낌도 들었죠. ‘나는 니들이 아무리 흔들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하면서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음악가들이 살기에는 힘들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비참하죠. 너무 혹사당하는 무대 풍토에서 그렇다고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요. 그게 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으니까. 또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보며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저 무대를 통해서 저 가수와 이 시간을 함께 공유하여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굉장히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별별 일을 많이 겪었죠. 심지어 어떤 관객은 노래를 하고 있는 제 손을 잡고 안 놓는 겁니다. 자기 친구한테 빨리 사진 찍으라고 하면서 말이죠.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야 할 예의가 있듯이 관객도 그 음악을 받아들일 때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방송은 더욱 절망적입니다. 다른 팀 사운드에 시스템을 맞춰 놓는 경우도 있는가하면 방송용으로 사운드를 잔뜩 눌러놓기도 합니다.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서 양해를 구하고 노래를 중단하면 “건방진 가수, 잘난 가수”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습니다.


20년을 노래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저는 단 한 번도 존경 같은 걸 바란 적이 없습니다. 단지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팬들이 아직 있으니까 그 분들에 대한 예의를 노래로써 깍듯이 갖추고 싶었을 뿐입니다. 방송에 밴드 데리고 나오면 그 친구들 출연료 나오는 줄 아세요? 방송 출연 한 번 하면 제 돈이 더 많이 나갑니다. 그래도 계속 데리고 나가죠. 계속 듣다보면 사람들이 ‘라이브가 이런 매력이 있구나’하고 기쁨을 느낄 테니까요.


음악은 저한테 굉장히 소중합니다. 첫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의 호흡부터 마지막 연주가 끝나고 내쉬는 한숨까지도 음악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관객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예전처럼 세상에 대해서 화를 내지는 않을 거예요. 세상에 대한 말조차 이제 음악을 통해서 표현할거고, 그걸 꼭 강하게 표현해야지만 전달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한동안 슬럼프도 있으셨지요?


일을 열심히 매진해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우울증이 있었습니다. 나이에서 오는 것도 있었고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을 해야 하나. 그래서 2년여를 쉬었습니다. 다시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음악을 좋아해주시는 분들, 내 음악을 지켜주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분들, 특히 팬클럽 친구들은 내가 슬럼프에 빠진 동안 내 홈페이지에 ‘왜 음반 안 나와요’라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기다려 준 것이죠. 앞으로는 날 지켜주는 분들을 위한 음악들을 하고 싶어요. 그 분들이 내 음악을 통해서 충분히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위안을 받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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