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딜쿠샤 지붕 위에서 웃는 '2% 몽상가' 김태영 감독
[인터뷰] 딜쿠샤 지붕 위에서 웃는 '2% 몽상가' 김태영 감독
  • 김다인
  • 승인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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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고달파도 2%의 몽상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

 

영화 '딜쿠샤'의 김태영 감독.

 

 

【인터뷰365 김다인】발레복을 입은 소녀와 만화 주인공 같아 보이는 한 남자가 하늘을 난다. 궁 앞을 지키고 있던 해태도 뒤따라 난다.
이 낯선 화면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영화 ‘딜쿠샤’는 러닝 타임 내내 이상한 조각들이 겹쳐진다. 감독이자 주연인 김태영 감독의 개인사, 그 주변이 있는 사람들, 안성기와 장동건, 궁궐과 고종황제 길용우, 이상의 시, 박재동 화백의 그림, 돈을 얼마 들이지 않은 티가 나는 컴퓨터그래픽까지 얽히고설켜 돌아간다.
영화의 장르를 종잡을 수 없을 뿐인가. 제목도 낯설다. 그래서 감독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김태영 감독,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스스로도 인정하듯 한때 다큐멘터리의 전설이었던 그가 영화 속에 불편한 몸으로 등장한다. 세월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를 만나봤다.

 

우선 제목부터 풀자. ‘딜쿠샤’를 제목으로 한 이유는 뭔가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의 집에 자주 간다. 그 집의 주인이던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 보도로 가택에 연금됐으며 결국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재라도 한국 땅에 묻어달라”던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으며 2006년 내가 ‘아버지의 나라’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딜쿠샤의 집은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을 외신으로 처음 보도한 AP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살던 2층 양옥이다. 앨버트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딜쿠샤라는 이름은 앨버트의 아내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와 작명한 것으로 힌디어로 ‘이상향, 기쁨’을 의미한다.)

 

영화가 지난 11월24일 개봉했다. 잘되고 있나
상영관은 20여개지만 ‘퐁당퐁당 개봉’(관객이 많이 들지 않은 영화를 교차상영하는 것)을 하고 있어 관객 동원이 쉽지 않다.

 

관객이 얼마나 들어야 제작비가 회수되나
7만-8만명? 제작비가 2억2천-3억원 정도 들었다. 그 절반은 내가 투자한 것이다. 나머지 절반만이라도 회수했으면 좋겠다.

 

영화의 내용 중 현실은 어느 정도인가
90%가 현실, 나머지 10%가 판타지다. 어느 평론가가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 판타지’라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영화에는 중국에서 배우 공리를 만나는 등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이 등장한다. 어떤 다큐들을 제작했나.
고엽제 참상을 고발한 ‘베트남 전쟁, 그후 17년’(1992), ‘사할린의 카레이스키’(1993),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1994) 3부작, ‘신주꾸 양산박’(1995), 그리고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6대륙 13개국을 발로 누비며 3년에 걸쳐 제작한 ‘세계영화기행’ 20부작 등을 제작했다. 방송 다큐멘터리 70편을 제작하면서 상도 많이 받았다. 내 스스로 방송 다큐멘터리의 전설이라 칭해도 부끄러울 게 없다.

 

다는 몰라도 ‘세계영화기행’은 방송에서 본 기억이 난다
199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쿠바에 가는 등 2년 동안 전세계 영화계를 취재했다. 두 번의 파산 위기를 겪으면서도 완결한 다큐멘터리다.

 

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본 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를 들어갔다. 방송연예과 졸업 후 영화과로도 진학했다. 영화과를 다니던 중 방송연예과 교수 소개로 MBC방송국 AD 자리를 소개받게 됐다. 가보니 제작부 부장이 내 이력서를 보고는 두어 마디 묻더니 출근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묵시적인 퇴짜였다. 당시 방송국에는 4년제 대학 졸업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2년제 졸업생들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교수님이 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식직이 아닌 일용직으로 AD 보조 역할을 하게 됐다. 근무가 없는 날을 이용해 1986년까지 16밀리 독립영화 4편을 만들었다. 당시 20만원이던 월급만으로 제작비 충당이 어려워 야근도 해야 했다. 내가 만든 영화들이 대한민국 단편영화제 최우수상, 우수상 등을 탔고 1987년 미련없이 MBC를 떠났다.

 

시작은 단편영화인 셈이다
시작은 좋았다. 1987년에 발표한 단편 ‘칸트씨의 발표회’가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면서 난 넒은 영화세계에 눈을 떴다. 베를린에서 돌아와 장편영화 ‘황무지’를 시작했다. ‘칸트씨의 발표회‘가 광주항쟁 피해자 청년의 의문사를 다룬 것이라면 ’황무지‘는 정반대 입장, 즉 광주에 투입된 진압군 엽사의 양심선언을 다룬 것이었다. 이 영화가 실정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상영금지 되고 필름을 빼앗기고...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작비 때문에 사무실도 폐쇄하고 월세방에서도 쫓겨났다. 한마디로 쫄딱 망했다. 그후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어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로는 성공했다. 그 당시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
1995년 기준 매출 20억원 정도. 하지만 난 여전히 후배 PD와 단칸방에서 살았고 자가용도 없었다. 결혼도 못했고 핸드폰도 비자금도 없었다. 나는 어떤 프로젝트가 생기면 오로지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달렸다.

 

 

김태영 감독과 배우 안성기, 장동건.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성공한 후 영화 제작에 나섰다. ‘딜쿠샤’를 보면 장동건 출연작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 안성기 출연작 ‘미스터 레이디’(2003) 장면들이 등장한다. 모두 본인 제작 영화다.
가상 역사극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처음 제작한 영화였다. 당시 신인이던 장동건을 캐스팅했다. 겉으로는 본전치기를 했지만 속으로는 13억원 정도 손해를 봤다. 순제작비가 34억원이었는데, 20억여원이 초과됐고 그 중 절반은 내가 댔기 때문이다.

 

‘미스터 레이디’에는 노래하는 안성기가 출연한다. 안성기가 영화에서 노래한 걸 본 적이 없고, 그의 필모그라피에서도 본 적이 없는 영화다.
완성되지 못한 영화다. 안성기 선배의 필모그라피에서 유일한 미완성작이다. 이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도 당선됐다. 주요 등장인물은 앵벌이 두목, 성소수자, 그리고 어린아이다. 안성기 선배가 앵벌이 두목, 가수 소찬휘가 성전환을 한 종갓집 자손으로 출연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로, 박칼린이 보컬 코치를 담당했다. 영화 촬영보다 먼저 호주, 미국 등에서 녹음을 했다. 음악에만 2억원을 들였다.

 

안성기의 파워풀한 모습, 성악적인 발성 등이 인상적이다. 내용을 들으니 지금 개봉해도 될 것 같다
안성기 선배도 당시 성악 발성의 노래를 배우느라 애썼다. 가죽 점퍼를 입고 나와 노래하는 모습이 지금 봐도 멋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영화 제작을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강제규 감독도 말렸다. 그러나 난 새로운 도전을 즐겼고 결과지를 받아보고 싶었다. 19억원을 쏟아부어 촬영을 했지만 결국 제작비가 바닥이 났다. 100군데 이상을 찾아다니며 투자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거절당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미스터 레이디’는 뮤지컬이라서 관객이 제한돼 있었다. 투자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제작비가 3억-5억 정도면 회수할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투자자들에게 내가 그동안 집어넣은 제작비를 19억원을 없는 것으로 치고 앞으로의 제작비만 투자해 달라고 해도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 본인이 투자한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당시 마포에 4억원 정도 나가는 집, 조금 가지고 있었던 땅 다 팔아 제작비에 댔다. 하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투자자들을 만나러 다니던 어느날 그는 출근길에 쓰러져 3일 만에 깨어났다. 그때 이후 몸의 반쪽이 불편해졌다. 내 몸이 망가진 것보다 더 아픈 일은 ‘미스터 레이디’ 연출을 맡은 조명화 감독이 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둘 다 실향민에 외아들로 내 핏줄과도 같은 사람이었는데...

 

가족들로부터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나
그럴 형편이 안됐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도 한푼도 없고... 게다가 나는 어머니가 다섯 명이다.

 

어머니가 다섯 분이면?
생물학적 어머니는 한 분이지만 계모가 많다. 아버지는 평양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월남했다. 아버지 형제는 셋인데 모두 경성제대(현 서울대)를 나왔다.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까지 다녀왔고 1948년 월북했다. 거기서 김일성대학을 다시 들어갔고 노동당 당비서와 결혼도 했다. 하지만 지주 출신 집안이라는 것 때문에 1.4후퇴 때 다시 월남했다.
월남 후 아버지는 군에 들어갔고 공병대위로 복무했다. 당시 워커힐 공사를 진두지휘하는 등 당시 우리나라 건설공사 톱5에 드는 실력자였다. 공병장교 때 생모와 결혼해 나를 낳았는데, 생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후 첫 번째 계모와만 혼인신고를 했고 나는 그 호적에 올려졌다. 제대 후에도 아버지는 지방 건설현장을 다니셨고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들이 아버지 재산을 다 빼갔다. 나는 계모가 바뀔 때마다 사는 집이 바뀌었고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나중에는 친척집 등을 전전하면서 컸다.

 

생모는 다시 못 만났나
일곱 살 때 나 혼자 영등포의 어느 작은 방을 찾아가서 만난 기억이 있다. 생모는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후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일상을 지탱했나
고등학교 자퇴하고 상점에서 먹고 자며 점원으로 일했다. 1978년 알거지가 된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떠났다. 난 잠잘 데도 없고 배도 고팠다. 다방 DJ 보조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다방 셔터가 내려지면 몰래 들어가서 잠을 잤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유능하셨는데...
호적상 아버지의 친자는 나와 첫 번째 계모가 낳은 이복여동생뿐이었다. 그 계모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착실하게 간수했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쓰러진 후 계모와의 관계를 끊었다. 계모가 작은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유산이랍시고 내가 관계되는 것을 스스로 원치 않아서였다.

 

‘딜쿠샤’에는 전재산을 쏟아부은 영화가 제작 중단되고 몸까지 잃은 그의 상황이 직간접적으로 보여진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 ‘남는 밥 김치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 주세요’라는 쪽지를 문앞에 남기고 죽은 어느 작가의 손글씨 등등. 하지만 ‘딜쿠샤’에는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박재동 화백의 커리커처.

 

 

영화 속 장면들이 뜬금없어 보여도 김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니 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노래를 부르는 억순이, 부동산 드러머, 무명의 연극배우, 시각장애인 부부, 그리고 김 감독의 동거남까지.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는가.
물론이다. 2013년 ‘딜쿠샤’를 촬영하기 시작해 3년6개월 동안 그들의 변화를 찍으면서 나 역시 희망을 얻었다. 특히 장애인 부부는 ‘딜쿠샤’ 완성이 늘어지면서 결혼까지 찍을 수 있었다. 촬영하는 동안 이웃뿐 아니라 선배 동료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딜쿠샤’를 크랭크인하도록 해준 청어람 최용배 대표(‘칸트씨의 발표회’ 연출부로 만났다), 배급비를 도와준 장동건,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할 때 이춘연 대표와 함께 내려와 회식을 시켜준 안성기 선배 등등.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안성기, 장동건 부분은 기존 영화 필름인데 고종황제 역의 길용우는 이번 영화를 위해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좋아하고 특히 고종을 좋아한다. 고종황제 역을 맡아준 길용우씨는 ‘미스터 레이디’ 때 제작비를 선뜻 보태줬고 이 영화에서도 펀딩영상 촬영까지 해줬다. 편집시 고종황제 부분이 생뚱맞다고 들어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박재동 화백의 커리커처도 인상적이었다
박재동 화백은 하루 동안 자신을 찍은 것으로 이렇게 많이 써먹을 수 있냐고 놀라워했다. 박 화백에게는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주고 그려달라고 했다.

 

박 화백이 그린 김 감독 커리커처는 마치 똘이장군처럼 귀엽기까지 했지만 붉은 권총을 입에 문 장면은 섬뜩했다. 이상의 시를 소재로 했다지만, 김 감독 내면이기도 한가.
...그렇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는 동거남과 살다가 고시원으로 가던데.
방 3개짜리 아파트에서 5년 넘게 같이 지낸 후배인데, 지금은 헤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후배는 일본에 컨텐츠 수출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너무 일찍 철수하고 중국과 한국에 회사를 내는 바람에 4년 만에 벌어놓은 것 다 날렸다. 난 모든 것의 우선순위가 일이다. 영화 제작비를 우선적으로 처리하다보니 보증금 다 까이고 6개월 이상 버티다가 쫓겨나서 고시원으로 가게 됐다.

 

고시원 생활은 지낼 만 했나
누우면 다리가 책장 속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 고시원에서 자살한 김종학 선배, 일이 없어서 세상을 등진 서울예전 선배 곽지균 감독 등이 많이 생각났다. 나도 그렇게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 특히 곽지균 감독이 데뷔작 ‘겨울나그네’를 냈을 때 내 일처럼 기뻐서 폼 잡고 다니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밤이 되면 고시원을 나와 사무실로 가서 ‘딜쿠샤’ 찍은 것 다시 보고 하면서 버텼다.

 

지금은 어디서 지내나
안성기 선배가 전주영화제 이후 1천만원을 보내주셔서 그중 300만원으로 영화의 엔딩 장면(김 감독과 이웃들이 딜쿠샤 지붕 위에 올라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을 완성했다. 홍대 스튜디오에서 출연자들과 함께 촬영한 후 지미집을 빌려 딜쿠샤 지붕을 찍어 합성했다. 그리고 500만원을 보증금으로 1년 동안 살던 고시원을 떠나 원룸으로 옮겼다.

 

생활은 어떻게 했나
다큐멘터리 저작권료로 버텼다. 예전에는 연간 5천만원 정도 나왔지만 지금은 2천만원 정도 나온다.

 

 

'딜쿠샤'의 엔딩. 출연진과 김태영 감독이 행복한 표정으로 딜쿠샤 지붕에 앉아있다.

 

 

처음에 ‘딜쿠샤’는 90%의 현실과 10%의 판타지라고 했는데, 영화 마지막 즈음에 1인 다역을 하는 여배우 손을 슬쩍 잡는 장면이 있다. (현실이면 좋겠는데) 현실인인가 판타지인가
연인이 생겼으면 하는 나의 판타지다. 난 아직 생생한 총각이다. ‘딜쿠샤’가 관객 10만명만 넘으면 라오스로 갈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이 나이에 장애도 있는데 어렵지 않겠는가. 라오스에 가서 신부를 데려오고 싶다.

 

신부의 조건은
내 나이가 많지만...그래도 49세를 넘으면 안된다. 39-49세 정도면 좋겠다.

 

지금까지 사귀어온 사람은 있지 않겠나
몇 번 결혼할 뻔했다. 하지만 난 늘 프로젝트가 먼저였다. 결혼하면 앞으로 30년 동안은 생활비 가져다줘야 하는데 누군가를 책임질 자신도 없었고.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미스터 레이디’ 투자 받으러 쫓아다니다가 쓰러진 후 보살펴준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제작비로 돈을 빌리는 바람에 관계가 멀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렸다.

 

‘딜쿠샤’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인생 전반부를 영화로 정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 싶었다. 현실을 살되 2%의 몽상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딜쿠샤’도 원래는 좀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많이 찍었는데 2년여 동안 편집하면서 많이 뺐다. 2년이라는 시간이 준 힘이었던 것 같다.
영화적으로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았나 싶다. 좋은 독립영화들도 많지만 센 영화들도 많다. ‘딜쿠샤’는 순한 영화로서 어느 정도 목적을 이뤘다 싶다.

 

앞으로 꿈은 무엇인가
영화를 만들어 20억원쯤 회수하는 것이다. 후배들 밥 사주고 차비 주고 하는 데 한달에 150만원, 내 생활비 150만원 해서 300만원 정도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단된 작품 가운데 꽤 좋은 것들이 있어 아직 희망이 있다. ‘딜쿠사’가 잘되면 반은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반은 다음 영화를 위한 종잣돈으로 남겨두고 싶다.

 

2시간 넘게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태영 감독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돌아볼 때마저 밝았다. 자신이 말한 2%의 몽상 때문일까, 그 밝음이 색깔마다 다르게 영화에 붙여져 있다.
필자는 ‘딜쿠샤’를 보고나서 어느 청빈한 사람의 닳고 헤진 옷 위로 색색이 덧꿰맨 헝겊이 떠올랐다. 원판과는 다른 헝겊의 색감은 처음에는 튀는 듯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의 옷 색깔과 어우러지기 마련이다. ‘딜쿠샤’를 보며 이 영화 뭐지? 하던 생각이 점차 김태영이라는 한 사람이 지나온 색색의 시간, 그것을 견뎌온 밝은 에너지에 머문다.

 

 

김다인 interview365@naver.com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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