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을 걸어온 ‘아름다운 조연 인생’ 배우 전양자
40년을 걸어온 ‘아름다운 조연 인생’ 배우 전양자
  • 정중헌
  • 승인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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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강한,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특별한 여배우 / 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60년대를 거친 올드팬들은 배우 전양자를 인형처럼 깜찍하고 청순 발랄한 영화계 신성으로 떠올린다. 70년대 TV 드라마 열성 시청자들에게 전양자는 조신하고 다소곳한 어머니상으로 기억된다. 올해로 연기 생활 40년을 넘긴 전천후 배우 전양자가 요즘 실버스타로 떠올라 중장년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60대 중반의 그는 최근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공연된 에이콤의 실버 뮤지컬 <러브>(윤호진 연출)에서 소박한 사랑을 연기해 중년 관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나이를 뛰어넘어 김진태와 황혼의 사랑을 펼치는 극중 배역도 멋졌지만 젊은 시절의 예쁘고 화려한 이미지를 여전히 뽐내 관객을 매료시킨 것이다.


작년 6월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된 실버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이만희 작ㆍ위성신 연출)에서 연기파 배우 이호재 오영수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영원한 공주님’ 역할로 팬들의 사랑을 받은 그는 이번 <러브>의 인기로 실버스타로 높이 떠올랐다. <러브>는 전양자, 이주실, 김진태, 정현, 황범식 등의 낯익은 중진들의 인기 여세를 몰아 3월 15일부터 30일까지 ‘KT&G 상상아트홀’에서 앙코르 공연된다.


뮤지컬 <러브>는 고령화 시대의 중장년 관객층을 겨냥한 실버 뮤지컬이다. 아이슬란드 작품을 각색한 국내 초연으로 제작 초부터 화제를 모았다. 노인 요양원이 무대로 남녀 환우 20여명을 일반인 상대로 공개오디션으로 뽑았다. 여기서 뽑힌 50~70대 아마추어 배우들과 TV와 연극무대에서 낯익은 시니어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뤄 출연 배우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는 것도 이채가 아닐 수 없다.


말년을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인들의 애환과 그들 사이에서 꽃피는 사랑의 감정을 코믹하게 그린 이 뮤지컬에는 비틀즈의 '렛잇비', 아바의 '땡큐 포 더 뮤직', 본 조비의 '아이 러브 로큰롤' 등 추억의 팝송들이 합창과 독창으로 활용돼 친근감을 더해준다. 아들에 손에 이끌려 이 요양원에 입원하는 니나(전양자)를 본 할아버지 요나(김진태)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둘은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혼의 사랑을 수놓는다. 그러나 요나는 치매 말기 환자로 니나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줄거리다.




“요나 무릎에 누워 요나를 보내는 연기를 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매번 울어요.” 연기뿐 아니라 노래도 해야 하는 뮤지컬이 전양자에게는 버거운 일이지만 그는 여기에 도전했다. “박자 맞추는데 애를 먹어 진태씨의 지도를 많이 받았어요. 외국에서는 나이 든 배우들이 영화와 무대에서 노련한 연기를 펼치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젊은 층만 겨냥한 작품들이 많아요. 제가 실버 연극 두 편을 해보고 느낀 것은 중장년 관객들이 이런 공연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객석을 채운 중장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자신들과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만희 작가의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실버 세대의 심리를 섬세하고 정감 있게 그려내 중장년 관객을 모았다. 삶의 파고를 헤치며 사느라 어느새 늙어버린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낸 데다 중년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원숙했기 때문이다. 연기파 이호재와 국립극단의 시니어 오영수, TV 드라마로 낯익은 전양자의 얽히고설키는 삼각관계는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뭉클한 공감을 자아냈다. 이 무대에서 다혜 역을 맡은 전양자는 팍팍한 삶을 살았지만 노년에 동창 친구들과 진실한 속마음을 트면서 행복을 일구는 멋장이를 연기한다. 흠이라면 아무리 서민적으로 꾸미려 해도 너무 곱고 예쁘다는 것이라고 할까.


필자는 전양자와 인연이 깊다. 예전에 그가 출연한 <수전노>와 <세일즈맨의 죽음> 등 연극도 관람했고 <자유부인 81>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의 영화도 보았다. 60년대 청춘영화의 그의 풋풋한 매력도 잊히지 않는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도 숱하게 보았고 그가 경영한 음식점에도 가보았다. 그런데 40여년을 쉼 없이 연기자로 일관해온 전양자에 관한 자료나 글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게 우리 연예계 현실이다. 몇년 전 영상자료전에서 <전양자 영화 회고전>을 한다기에 여기저기 자료를 찾았지만 짜투리 밖에 없다는 것에 우리문화의 기반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앝은가를 다시금 생각해야 했다.


전양자, 은은한 빛 발하는 만년 조역




배우 전양자는 영화와 TV드라마, 연극 무대를 두루 누비며 40년 가까이 왕성한 활동을 펼친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스타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온 친근한 얼굴이다. 요즘도 안방드라마에서 자주 대하는 그가 악극무대에도 선다니 나이를 무색케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년 팬들은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 때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국적인 여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풋풋함을 뿜어내던 전양자의 발랄한 연기는 상쾌한 청량제였다.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분위기를 일신한 신세대 배우 군(群)에서 전양자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양자는 스스로 ‘조연배우’라고 말한다.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나 70년대 TV브라운관에서 주역을 맡아 인기를 모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조연’을 자처하는 것은 겸손이기 보다는 생리에 맞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연’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의 연기 패턴과 연기자로서의 길이 응축되어 있다. 반짝하는 스타보다는 달빛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는 생명력이 긴 연기자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1966년 이강천 감독의 <계룡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전양자는 그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중 대부분은 60년대와 70년대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겹치기로 출연한 작품도 적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출연작을 일별해 보면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도 있지만 생소한 제목들도 부지기수다.


66년작으로 <계룡산>, <종점>을 꼽을 수 있고, 67년의 <가슴 아프게>, <돌지 않는 풍차>, <빙우>, <타인들>, 68년 <엄마의 일기>, <여고동창생>, 69년의 <눈 나리는 밤>, <어느 지붕 밑에서>, <마인>, <애수의 언덕>,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등 6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70년대에도 <당신을 알고 나서>, <칠인의 숙녀>, <황금 부르스>(70),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마도 빗물이겠지>, <장군의 딸들>(71), <밀녀>(72), <혈육애>(76), <아무도 모를꺼야>(77), <비목>,<이 한몸 다바쳐>(78), <우요일>(79) 등 연기 활동이 활발했다.


전양자의 출연 작품을 보면 영화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문제작’은 많지 않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이만희 감독의 <만추>,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등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 전양자의 존재나 평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평하기보다는 폄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출연작에서 보듯 전양자는 주로 청춘영화나 멜로영화, 통속적인 시대극에 치중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기자가 “문제성을 제시하는 특이한 스크린에서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지만 그렇게 뛰어난 연기자라기보다는 무난한 연기자로 알려진 것 같다”고 평하는 것은 전양자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단견이며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약한 조연급에서 맴돌기만 했다”는 것인데, 이런 평가가 과연 그 시대의 상황이나 영화 환경을 고려하고, 그의 작품 전반을 파악한 후 나왔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전양자의 연기는 60년대와 70년대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맹활약한 6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지만 70년대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60년대에 청춘영화나 멜로영화는 대중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TV의 대두에 밀려 영화제작 전반이 위축된 70년대 상황에서는 이렇다 할 ''문제작''이 나올 여건이 되지 못했다.


예술성이나 흥행 면에서 평가할 만한 작품이 1년에 몇 편밖에 나오지 않은 한국영화 풍토에서 ‘문제작’에 출연했는가를 기준으로 연기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얼마만큼 충실히 소화하고 전체적인 앙상블에 기여했나를 포괄적으로 살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전양자의 역할은 ‘조연’의 비중이 컸으며, 조역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연기의 앙상블을 높인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역이 잘 받쳐주어야 주역이 빛이 나고 영화 보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전양자야 말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조역을 소화해 낸 ‘만능 조연’이며, 영화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온 ‘전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전양자가 60년대에 출연한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보면 촌스러운 대목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학구적인 자세로 감상한다면 요즘의 기획영화, 짜깁기 영화와는 다른 제작열정과 연기의 앙상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함께 전양자라는 배우가 60~70년대 한국영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전양자는 배우의 세대교체에 일익을 했음을 평가할 만하다. 60년대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의 아성에 남정임, 문희, 윤정희 트로이카가 도전해 전성기를 누릴 때 등장한 전양자는 데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청춘영화 계열에 합류했다. 청춘스타들이 누비던 젊은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깜찍 발랄한 여대생이었다. 당시 ‘여대생’은 선망의 대상인데다 아담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여운 외모는 스크린에 풋풋함을 불어넣었고 팬들은 이런 그의 외모는 팬들에게 신선 감을 안겨주었다. 그중 인상에 남는 영화로 68년 이형표 감독이 연출한 <여고동창생>을 꼽을 수 있다. 전양자는 윤정희, 문희, 김창숙 등과 공연해 활달하고 명랑한 여대생 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연은 주연보다 연기 폭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없다. 주연은 유명세로 한 몫 하지만 조연은 약방의 감초처럼 적재적소에서 제 빛깔을 내고 주역을 받쳐주어야 하는 이중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양자의 진가가 발휘된다. 엄앵란, 남정임을 잇는 청춘배우에서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개성 있는 역할을 소화해 냈기 때문이다.


<눈 나리는 밤>에서는 가련한 여인 조미령의 딸로, 김효천 감독의 69년 작 <팔도사나이>에서는 일제에 맞서는 의로운 건달 장동휘의 여동생 역으로 다양한 변신을 해왔다. 전양자를 ‘연약한 조연’이라던가 ‘무난한 배우’라는 점도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60년대 겹치기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 소화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나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1981년 그는 마침내 연기로 승부할 기회를 얻었다. 조세희의 원작 소설을 이원세 감독이 영화화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쟁이 아내 역으로 혼신의 연기를 해낸 것이다. 전양자의 연기는 이 영화를 통해 원숙함을 드러냈다고 할 만하다.


영화에서 신세대 배우로 활약했던 전양자의 연기는 72~73년 안방의 인기를 독점한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에서 활짝 핀다. 새엄마가 겪은 일상의 애환을 생활연기로 풀어낸 데다 안정감 있는 분위기와 중후한 목소리로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평을 얻었다. 드라마 <새엄마>에서 그는 타이틀 롤이지만 혼자 우뚝 솟기보다는 공연 배우들과의 자연스런 연기 조화로 이웃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을 자아냈다.




전양자가 40년 가까이 배우 활동을 해온 장수 비결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가 나지 않는 연기의 배합과 조화다. 대다수 배우들은 인기를 노려 오버액션을 하거나 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지 몰라도 연기자로의 수명은 단축될 수가 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너무 강하면 다음 작품에서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전양자는 밖으로 흐트러뜨리는 연기보다는 내적으로 다지는 심도 있는 연기로 인기를 관리해 온 뚝심 있는 배우다. 연이어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시청자가 식상하지 않는 배우로 남는 것은 자신을 숨기고 역할에 충실 하려는 노력과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변신을 거듭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어느 드라마에서 단역에 가까운 노역을 한 적이 있는데, 분장이 어찌나 추하던지 그 맵시 고운 전양자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하나는 건강함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대인관계의 유연성이다. 그에게는 세월이 비켜가는 듯 건강미와 의욕이 넘친다.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연예계에서도 그의 처신은 둥글고 부드럽다. 여기에 연극무대에서 다진 화술과 단단한 기초가 배우 전양자의 내일을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왕년의 TV연속극 <아씨>의 악극무대에 서는 것도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간 주역만 조명했지 조역에는 너무 무관심했다. 그 결과 자료조차 변변히 없다. 조역을 재조명하는 이번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것이 한국영화, 연예계에 큰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변함없이 또 무대를 오르는 전양자 형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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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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