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내 최초 기타를 만든 기타의 장인, 세고비아 기타 김진영 회장
[인터뷰] 국내 최초 기타를 만든 기타의 장인, 세고비아 기타 김진영 회장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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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네시아서 글로벌 기업으로 부활
세고비아 기타 김진영 전 회장.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김진영 씨(82 / 전 세고비아 회장)는 ‘세고비아 기타시대‘를 열었던 기타 제작의 장인이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통기타를 멘 젊은이들이 팝송의 물결을 타고 서울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쌔시봉에 몰려들어 라이브 무대를 이끌던 시대에 국민악기인양 사랑을 받았던 기타가 ’세고비아‘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통기타 하나쯤은 곁에 두고 살던 시대가 지나갈 무렵에 기타 제조공장으로 크게 번창하던 ‘세고비아’ 기타도 각종 브랜드의 악기들이 넘쳐나면서 국내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세고비아 기타의 장인은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진출해 지금은 두 곳에서 종업원만 1천여 명에 이르는 기타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세고비아 이름의 기타를 만들면서 OEM(주문자 상표 부착)으로 세계적인 명품 기타를 생산하고 있다.

이제는 국제적인 기타의 장인으로 인정받는 김진영 전 세고비아 회장은 놀랍게도 기타를 구경하기 어렵던 1950년대 소년시절부터 독학으로 제조공정을 익혀 직접 자기 손으로 기타를 만들어 성공한 타고난 천재형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기타를 만들며 살아온 삶은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같은 비화를 떠올리게 한다. 인도네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살다가 잠시 귀국한 국산 기타의 원조 김진영 회장을 만나 ‘세고비아’의 유래와 이면에 담겨 있던 장인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세고비아 기타가 아직도 나옵니까?

국내에서는 이제 추억의 기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아직도 세고비아 브랜드는 살아있습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는 주로 일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전통을 이어온 악기 메이커와 계약해 OEM 기타를 생산하고 세고비아 상표의 기타는 우리나라로 가져와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해외에서 운영하는 기타 공장은 어느 정도의 생산 규모인가요?

한중 수교직후인 1994년 중국 산동성 조장시에 3만여㎡의 공장 부지를 마련해 이듬해부터 생산에 들어갔어요. 회갑을 넘긴 나이였지만 기타 공장은 어디에서 만들던지 자신이 있었어요. 낯선 땅에서 평생 써먹은 내 기술로 기타를 만들어 마지막 인생의 승부를 보고 싶어 모험을 한 셈이지요. 그러다가 IMF사태로 우리 국내 사정은 어려워졌지만 나는 전량 수출로 달러를 만져 오히려 덕을 봤어요. 한때 중국 공장은 2천여명까지 고용을 했지만 지금은 700여명쯤 됩니다.

-인도네시아에도 있다면서요?

5년 전인 2010년 인도네시아 제2도시인 수라바야에 6만여㎡의 공장 부지를 확보해 현재 450여명을 고용한 공장에서 OEM 기타를 생산하고 있어요. 인도네시아 공장은 발전성이 많아 앞으로 1600여명까지 공장 생산인력을 늘일 계획입니다.

팝 뮤직시대와 함께 국산 악기의 새길을 연 기타의 명장 김진영·김춘지 회장 부부. 부군은 기술 생산에 몰두하고 부인은 경영과 마케팅을 맡아 세고비아 기타의 신화를 만들었다./사진=인터뷰365

-국내에서는 생산 공장이 없는가요?

사연이 깁니다. 곡절이 많았지요.

-그 얘기를 시작하시지요.

세고비아 기타는 내가 직접 만들고 아내(김춘지 전 세고비아 기타 대표)가 종로 2가에 매장을 열어 판매를 하면서 키운 회사였지요. 난 지금도 그렇지만 돈(경영)을 몰라요. 모른다기보다 관심이 없어요. 그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기술자로 살았어요. 사업은 아내가 맡아 성공을 했지만 판매시장이 위축되고 생산량이나 매출도 떨어질 때 노조운동이 물결치고 임금 인상 요구가 높아지는 등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로 부도가 났어요. 직원들 퇴직금까지는 정산을 했지만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지 못해 문을 닫았어요.

-한창 잘 될 때 세고비아 공장의 생산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처음에는 나 혼자 집에서 수공업 규모로 기타를 만들어 내다가 1960년대에 서울 마포구 서강에서 15명 정도 고용해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969년 경기도 광주에 100여명을 거느린 공장으로 발전했어요. 이어서 1975년 무렵에는 경기도 파주 쪽의 1만5000㎡ 땅에 850명까지 직원을 둔 기업으로 성장해 월 1만여 개의 기타를 생산하며 수출까지 했었지요. 그때는 들고 다니는 기타를 보면 대부분 세고비아였던 것 같아요.

김진영씨가 시작한 세고비아 기타는 최초의 국산 기타였다.

 

-세고비아 기타는 직접 손으로 만든 국내 최초의 기타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한 건가요?

내 고향은 전남 무안의 농촌입니다. 부모님이 해방 전 일본 교토에 사실 때 그곳에서 태어나 해방 후 16살 때 부모님과 무안으로 돌아왔어요. 기타를 처음 가까이서 만져 본 것은 목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시내에서 자취생활을 함께 하던 친구가 어느 날 방학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서 삼촌이 기지고 있던 기타를 가져왔어요. 손가락으로 튕기면 소리가 나는 기타를 처음 만져보고 정말 반했어요. 환상적인 물건 같았지요. 나도 간절하게 기타를 치고 싶었어요.
그때 목포시내에 기타를 파는 악기점이 두 군데 있었고 그중 한 곳에 일본어로 된 기타교본이 있더군요. 교본을 사려고 했지만 주머니를 다 털어도 모자라 주인에게 통사정을 해서 모자라는 돈을 외상으로 달고 교본을 구입해 기타 연주 공부를 했지요. 그런데 한 달 만에 친구가 삼촌에게 혼났다며 몰래 가져온 기타를 돌려주었어요. 그 사이 나는 기타를 껴안고 살다시피 하며 악기 구조를 눈여겨봤는데 판자를 잘 다듬어 줄을 달면 되는 정도로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목판을 구해 직접 만들기 시작했지요.

-목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기타 줄은 어디서 구했나요?

그 무렵 고물상에 가면 야전용 유선전화 줄이 수북이 쌓여있었지요. 껍데기를 벗겨 동선을 활용하면 기막힌 6가닥을 만들 수 있었어요. 1번과 3번 선은 일제 동선, 2번은 미제 강선, 나머지 절반 선은 미제와 일제를 혼용해서 사용을 했어요.

-타고난 손재주가 없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손이 닿으면 물건을 잘 만드는 어머니(최귀금 / 101세로 생존)의 피를 받아 손재주는 특별합니다. 6.25전쟁 직후 장난삼아 만들어 본 권총으로 사격놀이를 하다가 불법 무기제작 소지 협의로 재판까지 받고 고생한 사람입니다.

-권총을 만들다니요?

그 무렵 총알을 구하기가 쉬울 때인데 내가 철공소에서 쓰다버린 파이프 등을 주워 모아 실제 탄알을 장전해 실제 권총만큼 사격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제 권총을 만들어 빵빵 소리내며 쏘는 놀이를 하다가 수사기관에 붙잡혀 간 거지요. 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람을 해친 일은 없어서 큰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논밭을 팔아 변호사 소송비용을 댔는데 나중에 기타를 만들어 팔아 그 돈으로 잃은 땅을 다 사드렸어요.

-코미디 같은 사연이군요. 기타를 처음 만들 때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가야금 같은 악기는 오동나무로 만들지만 기타는 침엽수나 관엽수 등 잡목을 잘 다듬어서 만드는데 혼자서 대패질을 하고 줄을 만들어 제작을 했더니 내가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기타가 악기점의 비싼 기타 못지않다는 소문이 목포시내에 금방 퍼졌어요.

소문을 듣고 목포에서도 교통편으로는 하루가 걸리는 거리의 우리 집으로 찾아온 사람이 알고 보니 내가 기타 교본을 샀던 악기점 주인이더군요. 내가 만든 기타를 만져보고 튕겨 보던 악기점 주인이 내일 다시 오겠다면 돌아갔다가 다음날 찾아와 제작을 끝낸 완성품 6개를 몽땅 넘겨달라면서 보자기를 건네주었지요.

가고 난 뒤 풀어보니 돈다발이었어요. 한 보따리가 되는 돈을 아버지께 드렸더니 황당해서인지 헛기침을 하시며 아주 대견해 하시더라고요. 땅을 살 돈이었으니, 집에서 별 볼일 없는 손장난이나 치는 것으로 보이던 아들을 비로소 기특해 하시며 아들의 재주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지요.

세고비아 기타 김진영 전 회장. 사진=인터뷰365

 

-또 기억나는 잊을 수 없는 얘기는 없나요?

많지요. 그 중에 우리 아내가 주선을 해서 아무나 여권 만들어 외국 못나갈 때 일본의 악기공장을 둘러보고 왔어요. 일본에서 유명한 야이리 기타 공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오해받지 않으려고 관찰한 기록을 화장실에 들어가 메모해서 가져왔었어요. 뭐 대단한 정보는 아니지만 일본의 최신 기타의 재료와 제작 공정을 제대로 파악할 기회였어요.

-언제 서울로 진출하셨나요?

목포의 악기상을 통해 소문이 광주까지 전해졌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한국클래식기타협회회장이라는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무안에 기타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당신이 기타 만드는 사람이냐고 확인을 하고 내가 만든 기타로 한 시간쯤 말없이 연주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처음으로 기타에서 울려나오는 황홀한 음악소리를 들었어요. 정말 신비롭게 잘 치더군요. 그분은 방송국 교향악단의 멤버로 지방 순회공연 중에 제주도로 가다가 기상관계로 못가고 광주에 머물다가 나를 찾아온 겁니다.

-그분이 서울로 옮기도록 했군요.

그렇습니다. 22살 때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지요. 알고 보니 그 분도 독신으로 살면서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의 거처에서 얹혀살더군요. 당시 방송국 교향악단 전속단원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서울 계동에 있는 운현궁에서 궁녀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그곳에서 살았어요. 나도 그분들 덕분에 운현궁 마굿간을 고쳐 방을 만든 창고 같은 곳에 공방을 만들어 일종의 가내 수공업으로 기타 제작 일을 하게 되었지요.

-언제까지 그곳에서 사셨던가요?

결혼하고부터 뜨내기 생활을 청산했어요. 여동생 친구로 한 고향이고 목포여고를 나온 색시를 만나 결혼하면서 몇 개씩 내 손으로 만들던 기타를 사업으로 생각하며 키워갈 수 있었지요. 마포 서강에 조그마한 공방에서부터 시작해 그게 나중에 세고비아라는 상표를 달고 큰 공장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세고비아라는 이름은 제품을 악기점에 가져가면 무슨 물건이 이름도 없느냐고 해서 그냥 누군가 부드러운 이름이라며 달아주었어요.

 

가수 윤형주가 세고비아 기타에 관해 적은 글. 자료=세고비아 기타 홈페이지

 

-그럼 지금도 부인이 기업을 운영하는가요?

아닙니다. 국내 사업이 실패하면서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 무렵부터 장성한 딸과 아들이 경영 일선에서 활동을 합니다. 사실 세고비아의 성공담은 아내의 역량이 가장 큰 힘이 되었어요. 품질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내가 반품을 받아 제작공정을 고치게 하고 꾸준히 판매 현장에서 소비자의 소리를 종합해 회사를 발전시켜 갔으니까요.

이제 나는 기술 고문 정도로 품질만 관리하고 홍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하고 온 딸(김수정 / 50)이 대표이사로 경영을 총괄하고 한양대를 나온 아들(김종훈 / 47)이 상무로 인도네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공장 운영 실무를 챙기고 있습니다.

-서양악기인 기타를 직접 만들어오면서 일생을 사셨는데 한마디로 자신의 직업과 인생관을 표현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가요?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내가 타고난 손재주로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 물건을 국제시장에서 인정받는 상품으로 만들어 가니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인생을 즐기려면 일하는 것에서 행복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 인생관은 즐기며 살기입니다. 지금 인도네시아에 주로 머무는데 그곳 기후가 몸에 맞는 것 같아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악기점에 가보면 내가 만든 악기들이 명품 브랜드를 달고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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