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원시 동굴벽화를 영상으로 확장해 현대 도시에 투영시킨 미디어아트 작가 이정은
[인터뷰] 원시 동굴벽화를 영상으로 확장해 현대 도시에 투영시킨 미디어아트 작가 이정은
  • 정중헌
  • 승인 201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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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생명 활동, 삶의 흔적들을 동굴벽화 속의 동물 이미지로 재현한 영상설치 작품을 발표한 미디어 아티스트 이정은 교수. 사진=양송이(러브송 스튜디오)

【인터뷰365 정중헌】지난해 말, 송년 공연으로 북적였던 서울 예술의전당 종합서비스 공간 비타민스테이션 한 켠의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는 주목할 만한 미디어 아트(Media Art) 전시회가 열렸지만 세모의 어수선함 속에서 묻혀지고 말았다.


경북대학교 미술학과 이정은(李姃恩) 교수가 연 미디어 아트 설치전 ‘beyond’(2014년 12월 23~30일)가 그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미디어 아트는 다양한 대중매체, 즉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수단인 사진, 영화, TV, 비디오, 컴퓨터 등 대중적인 파급 효과가 큰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미술에 적용시킨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화를 했던 이정은 작가는 미국 USC 영화TV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과 디지털아트를 전공(MFA)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아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미디어 아티스트로 주목받고 있는 중견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 와 2003년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되는 미디어 아트 개인전을 가졌던 그는 이번에 초기에 했던 디지털 애니메니션 필름과 함께 3D 프린터로 작업한 오브제 설치((installation) 작품, 그리고 비디오 아티스트로 전환 한 후 창작의 역량을 집합한 3편의 영상 설치 작품 등 총 6점을 전시 공간에 배치했다.


관람객들이 오가는 외벽에는 대작 ‘ongoing’(9m x 2.4m)을 걸었다. 태고의 여명 속에서 동물들이 떼 지어 이동 중인 장면을 벨벳 천에 디지털 페인팅 한 이 작품은 원시 동굴의 벽화 같은 동물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번 전시의 중심 주제를 이루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내부 공간은 크게 이등분 하여 입구에는 설치 작품 3점을, 파티션 안쪽에는 메인 전시인 영상설치 작업 3편을 중앙과 양 벽면을 연결시켜 영화처럼 상영하도록 했고, 그 뒤편에 우물 형태의 원에 각가지 이미지들을 투사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설치해 놓았다.


“영상 설치 작품이다 보니 일반인들에게 낯이 선가 봐요. 영화관처럼 어둡고 이미지도 생소하니까 학생들은 얼른 나가버려요. 그래도 어른들은 참고 보긴 하지만,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거나 관심 가진 분들이 찾아와 조언도 듣고 토론도 하고 싶었는데 연말이라 그런 소통이 부족했던 게 아쉽네요.”


해가 바뀌는 시점에서 태초에서 현재까지 시간과 공간의 변화하는 이미지를 영상과 설치 작업으로 보여주며 대중과 소통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새로운 예술 장르로 떠오른 미디어 아트 작품을 일반에게 선보였다는데 그는 의미를 두었다.

동물 떼의 이동 영상과 도시 이미지 중첩시켜 3차원 공간 체험케 해


생소하다고 하지만 침착하게 그의 작업을 음미하다 보면 새해 해돋이 감흥 못지않은 자연의 윤회와 그 너머의 미지의 세계까지 탐험하는 듯한 3차원의 느낌을 안겨 준다.


“다양한 이미지들을 되살리는 영상 작업을 통해 테크놀로지 너머에 있었던 태고의 생명 활동, 억겁의 세월을 흘러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남겨진 삶의 흔적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새로운 환생의 흔적들이 영상의 여러 켜(레이어)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정은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에는 영화처럼 제목과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첫 작품은 ‘여명(Dawn)’으로 3분, 두 번째 작품은 ‘황혼(Dusk)’으로 4분, 세 번째 작품은 ‘도시(City)’로 2분 10초다.


따라서 연속 상영되는 세 작품을 보려면 총 9분 10초가 소요된다. 호기심을 가지고 약 10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작가가 의도한 작품세계를 감상할 수가 있는데, 현대인들 특히 영상세대인 학생들마저 게임만큼 흥미롭지 않다하여 전시장을 나가버리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이정은의 미디어 아트에 등장하는 아이콘은 동물이다. 말 같기도 하고 사슴이나 들소 같기도 한 동물 이미지인데 작가는 특정 동물이기 보다는 원시 동물의 여러 특징을 디지털로 합성한 ‘오브제’라고 했다.


“네발 달린 짐승들의 엉덩이, 다리, 몸체나 머리 등 여러 부위의 특징들을 컴퓨터로 합성화 했어요. 특히 인간과 가깝게 지냈던 소나 개 같은 가축들, 자연 속에서 같이 살아온 말, 사슴, 양 같은 동물들의 이미지를 합쳐놓았기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봐요. 아이들은 쥐 같다고도 하니까요. 동영상에 나오는 동물은 뛰는 움직임 때문에 캥거루 같다고 하고요.”


첫 작품 ‘여명’에서는 동트는 원시의 새벽에 동물 떼들이 양쪽의 벽면에서 튀어나와 중앙으로 이동하는 영상 이미지가, 두 번째 작품 ‘황혼’에서는 반대로 동물 떼가 벽면 밖으로 이동하는 이미지를 리듬감 있게 표출하고 있다. 세 번째 ‘도시’에서는 기하학적 선으로 구성된 도시의 이미지 속에 이 동물 떼의 이동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초현실적인 영상체험을 안겨주고 있다.

“이 영상 설치 작품들은 최초의 어둠과 혼돈의 세계에서 태초의 생명과 싹으로, 다시 여러 다른 동물들로 제시되어 생명체로서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이지요. 평면적 회화가 애니메니션이 되면서 더 넓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개인전 전시실 앞에 선 이정은 작가. ‘경계를 넘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띈다. 사진=양송이

3D 프린터로 제작했지만 손맛 나는 동물 조형 설치 작품 인기


설치 작품 ‘beyond 230’은 관람객들이 품평도 하고 사진도 찍는 등 인기가 많았다.
벽면을 튀어나오게 한 길 같은 구조물에 3D 프린터로 일일이 제작한 수많은 동물 조형물들을 매스로 배치하고 영상을 투사한 이 작품은 마치 대초원의 소떼나 양떼가 다가오는 듯한 동적인 체험을 안겨 준다. 역시 3D 프린트로 제작한 부조 작품은 세라믹 부조(浮彫) 벽화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다가 온다.


“제 3D 프린트 기계는 구형이어서 밤에 작업을 시작하면 닭에서 계란이 나오듯 아침에 동물 한 마리가 태어나는 식이에요. 복제품이지만 형태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게 나와 여러 동물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기계 작업이지만 손맛도 나고 친근감도 준다고들 해요.”


이정은 작가의 전시를 처음 대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인터뷰를 위해 두 번째 다시 보면서 필자는 예술대학에서 강의한 ‘매체와 예술 발달사’ 강좌가 떠올랐다. 예술과 매체의 기원과 변천사를 짚어보는 이 강좌의 교재로 필자는 랜슬렛 호그벤의 <동굴벽화에서 만화까지>(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를 선택했었다. ‘그림으로 읽는 커뮤니케이션사’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2만년 전의 들소 그림에서부터 예술사를 풀어간다.


라스코 등 또 다른 동굴 벽화에도 동물들이 달리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정은의 미디어 아트 작업들을 보면서 고대 동굴벽화의 동물 그림들이 연상(실제로 2003년 금산갤러리 개인전 때 비슷한 이미지의 작업을 선보였다)되었고, 영상 설치 작품을 보면서는 말 사진을 여러 장 빠르게 회전시켜 발명해 낸 동영상 기법이 떠올랐다.


데뷔 초기에 이정은은 성경 창세기에 나올 것 같은 태초의 세상과 그 이후의 시공간들의 변화된 흔적들을 회화로 추구해 오다가 애니메이션으로 확장시겼던 만큼 필자의 비유가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창작 작업과 이론 연구를 병행 해온 다매체 작가


아티스트 이전에 학자 같은 인상의 이정은 작가는 실제로도 현장의 창작 작업과 학구적인 연구를 병행해온 흔치않은 백그라운드를 갖췄다.


경북 대구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92년 서울 나화랑에서 데뷔전을 가지며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초기 그의 작품을 압축한 표제는 ‘흔적’이었다. 일상의 얼룩이 아니라 자연이 시간과 공간 속에 녹여 낸 원초적 리듬(그는 내재율로 표현했다)을 추적 하는 평면 작업이었다. 그 같은 시간과 공간의 층(layer)을 회화화 하기 위해서 여러 매체를 수용하던 그는 한지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얻어 1994년 세 번째 개인전(서울 갤러리 이콘, 대구 문화예술회관)을 열기에 이른다.


“한지 속으로 깊이 침투된 색채는 종이의 물성과 일치되어 자연스럽게 발색되면서 태고의 흔적들을 형상화할 수가 있었어요. 여기에 이질적인 금분 등을 활용하여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색조를 만들어 낼 수 있었거든요. 몇 겹의 종이 층을 통하여 이루어낸 색조는 시간의 흐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은은함과 깊이를 가졌고, 다른 물성과도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중첩에 의한 질감을 더해 줄 수 있었어요.”


‘흔적’ ‘공(空)’ 등의 표제를 붙인 당시 작업들은 한지나 캔버스, 광목 위에 아크릴이나 혼합재료를 써서 그리거나 뜯어 내 거대한 화석과 같은 자연의 흔적들을 담아내고 있다. 일부러 의도하거나 그리지 않았는데도 그 흔적의 파편 속에 나무나 동물 형상이 이 당시부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평단을 리드했던 평론가 이일(작고)은 “거의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화면은 그 속에 무한의 허(虛)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필경은 자연의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풀릴 것 같던 작업은 어느 순간 막히기 시작했다. 웅대무변한 자연을 사각의 평면에 가두는 작업에 한계를 느낀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회화로 표현하는 것이 제한적인 것처럼, 태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영겁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을 회화로 창작해 낸다는 것은 아무리 특수한 재료와 기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전시장 외벽에 건 대형 작품 (900x240cm). 영상 작업의 이미지를 벨벳 천위에 디지털 페인팅 기법으로 옮겨 생명체의 존재를 또 다른 방식으로 부각시킨 벽화다. 사진=양송이

미국 USC에서 애니메이션과 디지털아트 전공

“문득 그림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어요. 영화와 텔레비전 영상은 일상에서 접해왔지만 애니메이션의 매력과 대중적인 소통력에 끌린 것이지요. 애니메이션 기법은 물체를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3D로 입체화 할 수 있는데다 라틴어 어원 또한 ‘생명의 숨결’을 뜻해 제 작업과 맞을 것 같았어요.”


30대 초반에 그는 미국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영상대학(School of Cinema & Television)에 유학하여 새로운 영역인 영상 작업에 입문했다.


“3년의 석사 과정을 다니면서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과 사운드 기술을 익혔어요. 손으로 하던 작업을 컴퓨터로 하게 된 것이지요. 제가 해왔던 동물이나 나무 등의 형상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음악에 맞춰 움직이게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또 다른 세계, 소통 과정의 다양함과 특히 영상의 힘을 체험했어요. 영상대학원이었지만 기본 과정만 이수하고 나머지는 제가 추구해왔던 이미지들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개인 작업을 하도록 교수들이 배려해 주어 미술과 영화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제 작품세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미국에서 돌아와 2003년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이정은 작가는 애니메이션과 디지털아트 작업을 선보였다. 그가 의도한 움직이는 그림을 동영상 작품으로 발표했고, 세라믹 등에 프린트한 영상 그림, 그리고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그려낸 동물들의 여러 움직임의 이미지를 함께 내보였다.


당시 그의 작업을 대한 미술평론가 강태성은 “존재를 공간화 하고 시간화 하는 조형적인 노력이며, 사물의 의미를 단순히 한 단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의 존재, 뒤의 존재를 갖는 자취의 논리”라고 평했다.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차원 작품 할 것

이 무렵 대구예술대학 등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새로운 영상 설치 작업을 하던 이정은은 자신의 작업을 학문적으로 보다 뒷받침하기 위하여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영상예술학을 전공했다. 2012년 그는 “말(馬)의 시각적 재현을 중심으로 예술적 상상력 표현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작 작업에 익숙한 저에게 학문과 수련의 과정은 제게 또 다른 에너지를 축적해 주었습니다. 논문은 말이라는 모티프의 물질적 이미지와 예술적 상상력의 전개,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구체화 과정을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에요. 제 작업의 학술적 백그라운드인 셈이죠”


창작과 이론을 병행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에 가속도가 붙은 이정은 작가는 “변화가 더 엉켜서 조금 더 결합되고 침범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선을 허물어 공간이 총체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전시 공간을 먼저 보고 설계하고 구상한 후 작품을 제작하는, 역순의 작업을 해야 하지요.”


재료나 기법에서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고정관념을 깬 다차원의 세계를 열고 싶다는 그는 한 발짝만 옮기면 다른 느낌을 주는 미디어 아트 작업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제 작품은 기계를 거쳐 나오는 영상 설치지만 손맛이 나게 하고 싶어요. 영상으로 그리거나 3D 프린터로 작업하더라도 기계가 주는 차가움 보다 인간적인 따듯함이 느껴지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아마도 제가 손으로 하는 회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작가 이정은의 미디어 아트 작업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탄탄한 영상이론과 테크닉을 바탕으로, 특히 회화적 감수성을 주특기로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는 해도 좋을 것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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