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의 ‘완도소년’ 프로골퍼 최경주
뚝심의 ‘완도소년’ 프로골퍼 최경주
  • 김다인
  • 승인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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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편견 없애고 꿈나무 키우는 것이 할일”

【인터뷰365 김다인】가무잡잡한 피부, 작은 키, 토종 한국인의 외모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미국 PGA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로골퍼 최경주(43)의 첫 인상이다.
지난 18일 관훈클럽에서는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최경주 선수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계 재계 사회의 굵직굵직한 저명인사들의 토론 자리를 마련해온 관훈클럽에서 스포츠 선수를 초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남자 프로골퍼 최초로 미국 PGA에 진출해 현재 PGA 7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경주재단을 설립해 사회적인 일에도 발벗고 나서고 있는 그의 무게감을 인정하는 방증일 것이다.
최경주 선수는 완도에서 태어나 ‘줄을 잘 못 서는’ 바람에 골프를 시작하게 됐다. 골프의 ‘골’ 자도 모르는 섬 소년, 유도를 하고 싶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골프 클럽을 잡게 됐고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골프의 기본을 익혀 나갔다. 완도에서 일본으로 다시 미국으로 보폭을 넓힌 것은 오로지 순수한 그의 의지와 노력 덕분이었고 그 걸음마다에는 맨땅에 헤딩하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날 관훈클럽 토론에서 최경주 선수는 자신이 걸어온 발걸음에 대해 하나씩 짚어 이야기했다. 인생 이야기와 골프 실전, 거기에 유머를 적절히 섞은 그의 달변은 한 시간이 넘도록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보통 관훈클럽은 초청인사의 모두발언 30분, 패널과 참석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한 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이 관례인데, 이날은 최 선수의 이야기가 길어져 참석한 패널 두 사람은 질문을 한 가지씩밖에 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날 관훈클럽 토론은 이전처럼 질문과 답 형식이 아닌 최경주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완도 소년, 난생 처음 골프클럽 잡다

관훈클럽 초청을 수락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관훈클럽에 대해 말만 들었지 잘 모르는데다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을 잘 극복해야 한다.(웃음). 설마 미국 갔을 때보다 어려우랴 싶다.
난 스타 강사, 교수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여태까지 지내온 일들을 중심으로 이 시대, 기성세대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동안 수많은 강연과 골프클리닉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완도에서 당신 같은 프로골퍼가 나왔는가이다. 완도라는 섬에서, 외떨어진 곳에서, 골프장도 없는 데서.
운동을 시작한 것은 역도에서부터였다. 하지만 내 몸은 역도에 맞지 않았다. 역도선수는 악어처럼 팔 다리가 짧아야 하는데 난 키도 작고 다리도 짧지만 팔이 너무 길다. 그나마 용상은 괜찮은데 인상에서 역기를 들어올리면 뒤로 넘어지기 일쑤였다.
역도를 2년 했는데 결국 감독이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난 이미 몸이 운동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16세 때 결론을 내렸다-난 공부보다 운동이다. 운동을 하려면 넓은 광주로 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완도수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수산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역도해본 사람? 하고 묻길래 손을 번쩍 들었다. 10명이 나섰는데 두 줄로 세우더라. 그러더니 한 줄은 역도, 다른 한 줄은 골프란다. 보니, 난 골프 쪽에 서 있었다. 역도 줄로 옮기려다 저지당했다. 사람은 정말 줄을 잘 서야 한다.(웃음) 골프 쪽 줄에 선 아이들은 서로 “골프가 뭐냐” “내가 어떻게 아냐”라고 수근댔다.
그래서 골프부에 들게 됐는데, 오전 수업 4교시를 마치면 포니 자동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닭장’(망이 쳐진 골프 연습장)으로 갔다. 감독선생님이 골프클럽을 하나씩 주더니 망을 넘기면 연습 공 주워오는 일을 열외시켜 주겠다고 했다. 다들 공 줍지 않으려고 열심히 치는데, 내 바로 앞 학생은 헛스윙에 땅볼을 쳤다. 내 차례가 돼서 치는데, 치는 순간 홈런 10배의 감이 왔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지금도 그때 모습과 감이 남아있다. 마치 불쏘시개에 불을 당긴 듯 그때 내 마음에 불씨가 생긴 것이다.
골프를 하겠다니까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돈이 얼마나 드는 운동인데, 부모 등골 빼먹으려 그러느냐 등등. 그래서 돈 안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주위의 친척, 친지들의 골프클럽과 공을 닦아주자 빵 사먹으라고 만원씩 줬다. 당시 빵 한 개에 500원이었다. 그렇게 만원이 2만원 되고 2만원이 3만원이 되고...공 치면서 돈을 벌었다. 어른들이 공을 칠 때 내가 족집게처럼 한마디씩 조언을 해주면 아주 좋아했다.
완도에서 광주까지는 차로 3시간이 걸렸다. 처음 광주 골프장에 가서 공을 한 130개쯤 친 거 같다. 산에 널려있는 공을 50개씩 주워 빨래비누와 수세미로 깨끗하게 닦아 좋은 건 내가 갖고 쓸 만한 건 골프장 손님들에게 팔았다. 골프를 시작하면서 부모님께 8만원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돈을 더 부탁한 적이 없다.


지난해 완도어린이 골프클리닉에서 아이들에게 레슨을 해주고 있는 최경주 선수 사진=최경주재단


‘내수용’ 최경주 독기 품고 미국 가다

처음 미국에 간 것은 1997년 월드컵 참가 때문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간 선수가 장흥 출신이었는데 둘 다 검고 작고 영어 한 마디 못했다. 연습차 골프장을 갔는데 잔디가 정말 좋았다. 잔디를 망가뜨리면 안되겠구나 싶어서 두 시간 연습하는 동안 잔디 끝만 스치고 잔디를 전혀 파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가니 외국 선수들이 잔디를 팍팍 파며 치는 것이 아닌가. 둘이 눈 마주치고 얼마나 겸연쩍었던지. 그날, 전날 파지 못한 잔디까지 다 파며 쳤다.(웃음) 그때 아, 환경이 이렇게 좋은 미국에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혼자 설계했던 계획이 5년 동안 준비해 PGA에 입성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굳어졌다.
이유가 생기니 자연 연습을 열심히 하게 됐다. 하지만 아시안투어 1등도 하지 못해 “최경주는 내수용”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아시안투어 첫 우승을 한 것이 1999년, 일본에서였다. 마지막에 파를 기록해야 이길 수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기도 후 눈을 뜨니 호미로 금을 그어놓은 듯 라이가 보였다.
우승 후 인터뷰를 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상금을 받아 오라고 했다. 얼마 후 아내가 큼지막한 돈가방을 받아왔다. 1250만엔(당시 약 1억5천만원)을 전부 현금으로 준 것이다. 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내내 돈가방만 쳐다봤다. 숙소였던 작은 호텔에 돌아와 잘 때도 아내와 아이는 침대에, 난 (돈가방 지킨다고) 문 앞에서 잤다. 한국 돌아와 환전을 하니 0이 무지 많았다.(웃음)
하지만 아시안투어 우승 후 마음을 놓았는지 내리막길을 걸었다. 일본 랭킹 10위까지 내려가 미국 갈 길이 묘연했는데, 9위 선수가 자기는 못 간다며 나더러 대신 미국을 가라고 했다. 그 말 듣고 화장실 가서 춤을 췄다. 그래서 PGA에 가게 됐다. 사람들은 내가 1년 안에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독기를 품었다. 당시 내 눈에는 잔뜩 독이 올라 사람들이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할 정도였다.

골프 매너 바꾼 것은 다름아닌 태극마크

미국에 가서 처음에 골프장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우리나라는 골프장 입구부터 크게 표지판이 있어 찾기 쉽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무심히 지나가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풀숲 사이에 작은 표지판이 겨우 보일 뿐이었다. 도저히 혼자 골프장 찾을 수가 없어 하루는 미국 선수를 아침 일찍 따라나섰다. 20분쯤 달려 그 선수가 도착한 곳은 골프장이 아닌 마켓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길을 몰라 혼자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20분을 기다려 그 선수가 기저귀며 우유를 사서 나온 후에 그 뒤를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고생하며 큐스쿨을 통과하고 PGA에 들어갔다. 이후 아시아인 최초로 8승을 거뒀다. 첫 우승을 거두던 날 골프장 언덕 옆에 세워진 스코어판을 보니 CH라는 글자가 제일 위에 보였다. 선수 중 CH(OI) 이니셜을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오고 머리끝이 쭈뼛 섰다. 이후 경기를 좀 망치기는 했지만 결국 우승을 했다.
처음에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를 못하는 게 한이었다. 동양인은 나 혼자였고 2년 반 동안 말도 못 알아들어 눈인사만 하고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생각하니, 영어를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영어를 잘했으면 미국인들이 나를 가만히 뒀겠는가. 뭐라 해도 땡큐 하고 웃으니 이왕이면 좋은 얘기를 해주게 된 것 같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나의 ‘매너’를 결정지은 것은 바로 태극마크였다. 다른 외국 선수들은 백에는 다양한 국가 상징을 붙이고 다녔다. 호주 선수는 캥거루를 붙이는 등. 난 한국의 상징은 무얼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 태극마크를 붙이기로 결정했다.
골프백에 태극마크를 붙이기 전과 붙인 후의 내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가끔 공을 집어던지거나 클럽을 내동이치고 싶을 때가 있어도 참게 됐다. 난 한국을 대변하는 선수 아닌가. 단 한 번도 욕을 하거나 클럽을 던지지 않았고 그것이 굳어지자 매너 좋은 선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사실 난 매너 좋은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최경주 선수의 벙커샷은 PGA 선수들 사이에 정교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사진=최경주재단


타이거 우즈도 부러워한 벙커샷

골프클럽과 골퍼가 처음 만나는 것이 그립이다. 공이 사느냐 죽느냐가 그립에 달려 있다. 그립은 마치 등산하는 사람이 줄에 거는 고리와 같은 것이다, 고리를 어떻게 거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골프가 재미있다 없다의 기준은 스코어가 아니다. 재미있게 치는 것이다. 난 골프가 깨끗한 운동이어서 좋다. 18홀, 54홀이 끝나봐야 경기가 끝나는 것 아닌가. 축구나 야구는 심판이 있다. 하지만 골프는 자기 마음이 심판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1998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바람이 강하게 부는 바람에 공이 우측 러프로 날아가 버렸다. 캐디가 공을 찾았다고 해서 가 보니 이틀 전 내가 연습하면서 잃어버렸던 공이었다. 난 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것은 벙커 샷이다. 타이거 우즈도 내 공이 벙커에 빠지면 앞 선수는 틀렸다는 듯 그냥 간다. 타이거 우즈도 와서 보고 쓱 지나간다. 그야말로 벙커는 나의 것이다.(웃음)

한국 브랜드 알리는 골프에 대한 국내 편견 아쉬워

선수는 기록밖에 없다. 기록을 세우기 위해, 또 그 기록을 깨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선수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은퇴 후에 냉랭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아쉽다. 국가를 위해 뛴 선수들은 은퇴 후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문화센터가 하나쯤 세워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축구든 야구든 관계없이 한국에 도착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세워질 시대가 된 것 같다.
골프에 대해서 말하자면,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골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인 인식을 깨트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침 이 자리에 오는 동안 국감에서 골프장 근처에서 왜 밥을 먹었는가가 쟁점이 되고 있는 뉴스를 들었다. 골프 접대 등 안 좋은 이야기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골프 치는 사람들에 대한 국민적 편견이 생기는 것이 아쉽다.
골프는 외국에서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알리는 데 으뜸 역할을 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골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골프장들도 스스로 문을 열어 주변 이웃들과 유대감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2013 SK텔레콤 오픈에서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고 있는 최경주 선수. 사진=최경주재단
골프꿈나무들과 함께 노숙인들을 위한 밥퍼봉사 참여한 최경주 선수 사진=최경주재단

최경주재단 통해 아이들 체력과 소통 중점

내가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은 주위의 관심과 배려 덕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서 2007년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이들이다. 요즘 학교에서 체육을 많이 하지 않는다. 인조잔디가 몸에 해롭다는 부모들의 항의에 학교에서는 운동 대신 공부를 시킨다.
참고로 난 아이가 3명이 있는데 이들에게 적용하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과 있을 때 절대 TV를 보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자기 전까지 잠들지 않는 것이다. 애들에게 골프를 시키니까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든다.
운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몸이 피곤하지 않으므로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게임을 한다. 컴퓨터나 게임으로 각각 놀기 때문에 서로 소통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재단의 일은 아이들에게 운동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20, 30년 후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관계를 잘 맺으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일은 계속 추진할 것이다.

최경주 선수의 이야기가 끝나고 패널들의 짧은 질문이 이어졌다.
골프는 정신력이 90%인데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최 선수는 “골프는 자신감과 믿음이며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올해 성적이 별로 안 좋은데 내년 시즌은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질문에는 “작년 101위에서 올해 73위를 했으니 30계단 상승한 것 아니냐”며 “성적보다는 인생관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서울에서 살아야 행복하고 완도에서 살면 덜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답했다. 이어 “나름대로 지금 성적에 만족한다. 내년에 50위를 해도 잘하는 것이다. PGA 선수 14년 동안 역대 선수 평가 20위 안에 올라있다. 난 제로에서 시작했다. 만원, 2만원, 3만원 주면 행복했다. 지금도 그렇다. 잔은 다 채울 수 없다. 50%만 채우고 나머지는 남겨주자, 그래야 주변을 채운다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화기애애하고 유쾌하게 이어진 이날 자리는 원하는 참석자들에게 최경주 선수가 직접 사인을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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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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