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만화소년 ‘배트맨’ 제작자 마이클 유슬란
영원한 만화소년 ‘배트맨’ 제작자 마이클 유슬란
  • 이희승
  • 승인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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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은 내가 평생 사랑한, 내 인생의 큰 존재”

【인터뷰365 이희승】교수이자 만화광, 애처가이자 영원한 소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배트맨’ 시리즈의 판권을 산 마이클 유슬란(62)을 설명하는 단어다.
‘배트맨’ 시리즈 제작자 유슬란이 올해로 38회를 맞는 세계영상위원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충북 제천을 방문했다. 그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이번 총회에 참석한 이유는 “첫사랑이자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 낸시가 한국에 너무 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유슬란과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그에 대한 소개를 좀더 하자. 흑백으로 만들어진 만화책과 TV시리즈로 나왔던 배트맨을 영화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유슬란의 심미안은 ‘비웃음’에서 시작했다. 시간은 그의 나이 20대였던 40년 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형 출판사였던 DC코믹스의 사장조차 “당신이 가진 돈을 날리지 말라”며 계약을 말렸을 정도. 이 호기로운 청년이 끝까지 판권 계약을 고집하자 몇 개의 캐릭터는 무료로 얹어(?) 주기도 했다.
그가 ‘배트맨’ 시리즈의 제작자로 벌어들인 돈은 정확히 추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문제아였던 팀 버튼부터 독립영화계의 이단아 크리스토퍼 놀란까지 검증되지 않았던 감독에게 ‘배트맨’ 시리즈의 탄생을 맡길 걸 감안할 때 그의 관심은 ‘재미’에 집중되어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제천에서 만난 마이클 유슬란의 첫인상은 의외였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쇼비즈니스맨을 상상했는데 스파이더맨 넥타이를 매고 인터뷰장에 나타났다. 디씨코믹스의 대표 히어로인 배트맨을 총괄한 남자가 마블코믹스의 대표주자를 목에 걸고 나타난 이유를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스탠 리(마블 원작 만화 대부분을 그린 작가)가 선물한 거라서...”
그의 인간적인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라고 들었다.
5년 전엔 혼자 방문했었다. 그때의 소감을 들은 아내가 이번에 또 간다고 하니 너무 가고 싶다고 하더라.(웃음) 평소에도 아시아 문화 중 특히 (한국어로)‘만화’에 관심이 많다. 슈퍼 히어로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는 자서전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질문하지 말아달라. 내가 사랑했던 존재를 일로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난 영원한 소년이다. 머리는 비록 하얗게 변했고, 양복에 넥타이까지 맸지만 내 안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12세 소년이 들어있다.


배트맨 시리즈는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인기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슈퍼 파워를 가지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고, 어린 시절 부모의 살인을 목격한 뒤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인물이다. 그가 배트맨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희생이 단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매일매일 지옥을 걷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배트맨이 오늘날 도시의 무사이자, 용과 싸우는 히어로라는 점이 인기를 끄는 것 같다.
사실 어린 소년이 부모가 살해되는 순간에 함께 있었다면 어느 나라나 문화의 구분없이 감정적으로든 똑같은 충격을 받았을 거다. 관객들은 그래서 더더욱 그가 배트맨 마스크를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한다. 게다가 최고로 악랄한 악당들을 상대하지 않나. 그게 배트맨이 가진 ‘결정적인 인기’ 비결이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2’(1992),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포스터

제작자로서 각 시리즈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궁금하다. 또 각자의 작품들을 연출한 감독들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내가 어릴 때인 60년대 배트맨은 무작정 싸우고 웃기기만 하는 캐릭터였다. 만화 속 원래 모습은 진지하고, 어둡고 밤을 배회하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는 진정한 배트맨의 세계를 보여주리라 꿈꿔왔다. 정확히 내가 그런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만들고 싶어 DC코믹스에서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대형 스튜디오를 찾아갈 때마다 들은 이야기는 세 가지였다. 어렵다, 어둡다, 성공할 리 없다. 그 당시 만난 게 팀 버튼 감독이다. 그는 배트맨 캐릭터를 실존하는 인물처럼 만들고, 브루스 웨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은 내 의견에 적극 동감하는 유일한 젊은 감독이었다. 팀 버튼 감독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영웅을 만들려면 고담시를 실존하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그 당시 세트장이 아닌 실존하는 도시로 보이게 만들려고 안달이 났었을 때였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팀 버튼과 나는 죽이 잘 맞았던 거다. 1989년 첫 ‘배트맨’ 영화가 나올 때 촬영장인 파인우드 스튜디오에는 5블럭 거리의 고담시가 실제로 존재했었다. 그때 나온 세트디자인으로 오스카상을 받았고, 당시의 배트 모빌은 현재까지도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그렇다면 팀 버튼 이후의 감독은 어떤가.
그 이후로는 영화 산업이 전반적으로 덩어리가 커졌다는 걸 우선 말해두고 싶다. 여러 회사가 뭉쳐 한미다로 식솔들이 많아진 형태가 된 거다. 그런 상황이 되면 회사 간부들은 영화 자체보다는 옷이나 장남감, 한마디로 맥도날드 해피밀 세트에 나가는 선물에 더 눈이 반짝거리게 된다. 돈이 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 제작사의 입장으로는 감독한테 밝고 경쾌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가족친화적인 영화를 만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악당도 3명 영웅도 2명에 의상도 두 가지씩 있어야 된다고 조건을 내건다. 이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2시간짜리 장난감 광고를 만드는 꼴이 된다. 그때 나타난 게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다. 당시 워너 브라더스의 담당자가 꽤 깐깐하고 배짱이 대단했는데, 그가 추천하는 감독이라 믿음이 갔다.
굳이 이런 이름을 예로 들지 않아도 ‘배트맨’의 감독들은 독특한 신념을 실현시킬 수 있게 다른 식으로 구성된 천재들이라고 본다. 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최근작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력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긴 하다.
그가 배트맨의 위엄과 본래의 어두움을 돌려놨다고 본다. 그건 분명 팀 버튼과는 다른 관점이다. 팀 버튼의 경우 만화책에 충실했다면 크리스토퍼는 실존인물처럼 보여주고 싶어 했다고 할까. 누구든지 배트맨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은 나랑 생각이 같았지만 고담시를 세트가 아닌 실제 도시에서 찍고 싶어 했던 욕심은 차이를 보였다. 나는 뉴욕을 고집했고, 그는 시카고까지 가고 싶어 했다.(웃음)


제작자가 결국 감독의 뜻에 따른 건가.
그때 놀란이 나를 설득한 말이 “누구든 배트맨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놀란 감독은 악당을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테러리스트로 봤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에 더 중점을 둬야 했고, 사람들이 실제 주변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뉴욕은 조금만 카메라를 돌려도 자유의 여신상이나 타임 스퀘어가 보이니까 안된다는 거였다. 결과적으로는 ‘저런 악당이 있을 수 있겠구나’란 공포감이 잘 조성됐기에 나는 놀란 감독의 이런 ‘촉’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배트맨’이란 단어가 사라진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그런 점이 잘 강조했다고 본다. 특히 모건 프리먼의 입에서 모든 사건과 상황이 나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야 말로 뛰어난 캐스팅 아닌가. 단순히 만화책에서 출발한 영화가 아닌 훌륭한 영화가 나온 셈이다.


스크린으로 배트맨을 데려온(?) 장본인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다크 나이트’가 뉴욕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했을 때다. 거긴 실제로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였고, 10대부터 만화책 ‘배트맨’을 그리거나 쓴 작가들의 사무실이나 자택이 있는 곳이었다. 난 그들을 인터뷰하려고 매일 그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특별했다.
그 중 한 명이 제리 로빈슨이란 분이었는데, 그는 초기 ‘배트맨’에서 펭귄맨과 투페이스 같은 악당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실제 작가였다. 영화 시사 때가 90세 생신이 얼추 다가올 때였는데 세상에. 택시를 타고 온다는 거다. 그 얘기에 놀라 나와 가족들이 리무진으로 모시고 현장에 갔다. 극장 근처에 조커와 배트맨 등 각종 복장을 한 사람들과 수백 명의 취재진들이 모여있는 걸 보더니, “뒷문으로 들어갈 테니, 극장 안에서 보세”라며 내렸다. 그때 나는 내 생애 최고로 큰 목소리로 “조커와 로빈을 만든 공동작가인 제리 로빈슨이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그 이후는 설명하지 않겠다. 레드 카펫의 짧은 길을 걷는데 30분이 넘게 소요가 됐고, 모든 카메라가 집중됐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한 일에 인정을 받은 거다. 그날 밤 파티에 모인 크리스찬 베일부터 실제 팽귄맨을 연기한 대니 드비토 등이 모두 감격하며 그를 껴안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중에서야 그는 그때가 자기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하더라. 2년 전 제리와 UN에서 주최한 중동 지역의 만화가 강연에 참석했는데, 그 기억이 너무 소중하다. 그는 작년에 운명을 달리했다.


경쟁사(?)인 마블코믹스의 히어로 스파이더맨 넥타이를 매고 나와 웃음을 던져준 마이클 유슬란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소장하고 있는 3만권의 만화책을 기증하고, 세계 최조의 만화학과 교수다. 일상은 어떤가.
정확하게는 4만 5천권이다.(웃음) 다음 세대의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내 소장 책들이 읽힌다는게 기뻤기에 흔쾌히 기증했다. 내가 책을 보낸 곳은 인디애나 대학인데, 내가 그 대학 1학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학위를 3개나 받았기 때문에 학교에 뭔가를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교수라는 직함을 달기엔 부족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만화로 학위를 받고 누군가가 이 과목으로 학점을 받을 수 있게 된 사실은 정말 기쁘다. 나는 MOMA나 루브르 대학까지 여러 전시회를 다니고 만화를 전시한 1세대다. 이제야 만화를 쓰거나 좋아한 세대들이 제대로 대접 받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 준 대중들에게 감사하다.


미국에서도 만화는 찬밥이었던 건가.
만화는 재즈만큼 미국적인데도 이제야 갤러리 등지에 ‘작품’으로 걸린다. 나는 만화가 현대판 신화라고 본다.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에 있던 신들이 타이즈를 신고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닌가. 만화는 그 문화를 잘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를 이해하려면 만화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본다. 안타까운 건 편견과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예를 들자면, 이제는 인터넷 만화인 웹툰이 인기를 끌고, 그걸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있다. 국내 작품 중 알고 있는 게 있나.
내 아들 데이비드는 나로 인해 만화의 세상에서 성장했다. 아들은 그래픽컬리란 회사에서 근무하는데 기존의 만화를 디지털로 옮기는 일을 주로 한다. 그 이유는 출판하는 만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만화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력이 나올 때 가장 먼저 사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운영이 가능한 회사다. 미국에서는 웹툰을 웹 에피소드의 준말인 웨피소드라고 부른다. 1분짜리 혹은 3분에서 5분짜리로 만들어져 새로운 배급 채널이 된다. TV나 대형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포맷으로 인해 꼭 한국에 살아야지만 한국의 작품을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뉴욕 양키 광팬에다 야구를 좋아해서 이현세의 원작과 이명진 작가의 라그나로크를 일부러 찾아 읽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게임으로도 나왔다. 난 이렇게 매체가 확장되는 걸 기쁘게 받아들인다.


20대에 산 판권이 현재의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20대의 어린 애가 ‘배트맨’의 판권을 살 수가 있냐고 묻는다.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무도 그 판권을 원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5,60년대에는 스무 살이 넘어서 만화에 관심있거나 혹시라도 그런 책을 읽고 있으면 한심하게 봤다. 이제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무료로 받은 것도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자신있게 말하지만 만화 팬들이야말로 진정한 승자라고 본다. 블록버스터가 되거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되는 세상이니 모두 현명하게 즐길 권리를 누리면 좋겠다.
지난 5천 년간 코란이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영웅과 무사들이 선과 악의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들이다. 히어로물이 여기서 다를 게 뭐가 있나.


‘아이언맨’ 시리즈 등 슈퍼 히어로물과 앞으로 나올 ‘배트맨 VS 슈퍼맨’에 대해 말한다면.
좋은 스토리텔링이야말로 후세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나는 만화를 영화로 만들 때 아무리 좋은 배우와 훌륭한 특수효과를 활용한다고 해도 좋은 스토리텔링이 주가 아니면 망한다고 본다. 건물을 지을 때 아무리 내부마감재나 인부들의 실력이 뛰어나도 도면이 엉망이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수많은 만화 팬들이 이런 시리즈를 보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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