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춤의 명인 국악뮤지컬 배우 손정아
소리와 춤의 명인 국악뮤지컬 배우 손정아
  • 김두호
  • 승인 201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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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황진이의 神이 들인 삶이었다”

 

 

 

【인터뷰365 김두호】소리[唱]와 춤, 가야금 병창까지 전통 예술의 기능전수자로 일생을 국악무대에서 보낸 손정아 원장(53, 사단법인 우리문화예술원)은 “황진이의 생애가 나의 인생”이라고 자신을 함축해서 소개했다. 고고한 선비와 시인묵객들을 한 수의 시로 조소(嘲笑)하고 풍자해 가며 한 시대를 풍미한 조선시대 송도의 명기(名妓) 황진이를 두고 손정아 국악인은 자신의 영혼까지 일체를 그 분의 삶을 재현하는 데 바쳤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황진이로 살아가는 손정아 국악인을 그가 설립해 운영하는 서울 여의도 우리문화예술원에서 인터뷰했다. 빌딩 5층의 100평이 넘는 공간에 60석 규모의 상설공연장을 두고 수시로 국악공연을 해온 지 오래된다. 2013년 9월부터 달포동안은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아름다운 우리꽃 무궁화’라는 이름으로 시카고에서 다채로운 한국 전통문화 공연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소리와 춤에서 천재성 기량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성장한 뒤 뉴욕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무용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돌아와 2002년 월드컵 때 선보인 작품이 바로 <황진이, 나비여 저 청산에>였다.


국립극장 해오름홀에서 황진이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창극이 아닌 국악 뮤지컬(춤과 노래, 연기) 형태로 무대에 올려 국악 예술의 새 장을 열었던 작품이다. <손정아의 춤과 소리, 황진이>라는 제목의 노래도 국악가요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손정아’를 두고 ‘국악뮤지컬 배우’라는 새 직종의 이름이 등장했다. 국내외에서 펼쳐온 그의 예술 활동은 언제나 태극기와 무궁화를 앞세워 나라사랑,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공연 동기를 부여하는 신념도 특이하다. 국악인의 공연에 민족혼이 없으면 올바른 전통 예술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송도의 잘난 남자들을 오금 못 쓰게 홀린 황진이의 자태가 분명 예사롭지 않았을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추측하지만 500여년의 시공을 넘나들며 풍류의 가인 황진이로 살아가는 손정아 국악인도 중년을 넘어선 나이인데 여전히 꽃처럼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황진이를 닮아가는 인생과 예술


2002년 월드컵 행사를 앞두고 서울시 지원으로 개최한 당신의 귀국공연 <황진이, 나비여 저 청산에>는 ‘풍류와 가무를 즐겨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국악가요로 구성한 매우 독창적인 공연’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 공연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황진이의 넋을 품안에 받아들여 고해하듯이 그 분이 아프게 살다간 삶의 원형을 조명하려고 몸부림친 무대였다. 김덕수 사물놀이와 함께 피리 대금 아쟁 거문고 가야금 등 각종 국악연주인들의 장단, 황진이역의 나와 서경덕 지족선사 등 많은 배역 인물들이 휴식 없이 100분간 춤사위와 소리를 토해낸 공연이었다.


전통 우리 가락에 전자 악기 연주의 현대 음악까지 동원해 총체극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었다. 뮤지컬 드라마의 골격이 황진이의 사랑인가, 아니면 그의 기복이 많은 팔자와 고난의 삶에 비중을 둔 것인가?
황진이의 사랑과 생애는 그녀가 남긴 시에 모두 스며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사랑과 이별은 어쩌면 괴로운 구도자의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희로애락을 파노라마로 이어서 보여준 것이다. 황진이의 사랑과 생애를 대변하는 남자는 송도 3절에 꼽히는 대학자 서경덕, 동거생활까지 한 선비이자 소리꾼인 이사종, 유혹의 손길을 주었다는 고승 지족선사.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의 시로 애절하게 떠나간 황진이를 그리워 한 임제 등이다. 모두가 사연을 간직한 한편의 주인공들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현대 뮤지컬 형식을 참작해 국악 뮤지컬로 풀어야 이 시대 관객들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소재라고 생각했다.

 

 

국악인 손정아의 공연 모습

 


황진이는 어머니나 아내, 한 가정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는 또 기생이었다. ‘황진이의 인생이 나의 인생과 같다’는 말은 인생살이의 실존 현상보다 공연 작품을 통해 교감한 철학적인 의미나 주장으로 짐작된다.
이 시대는 옛 시대와 같은 기생도 없고 또 나는 여러 남자와 사랑을 나누며 살지는 않았지만 과거는 있다. 지금은 사랑의 아픔을 씻어내고 인생을 홀로 살고 있다. 남자와 잘못된 만남으로 고통을 겪고 그 상처를 안고 혼자 살아가는 나의 입장에서 황진이의 아픈 마음, 끝없이 방황하고 안식을 찾아 헤매는 갈망의 성격과 심경이 비슷하다고 헤아릴 때가 많다. 수시로 나는 문득 황진이가 된 착각에 빠진다. 나는 그의 시조를 소리내어 읊고 노래로 부르며 그의 깊고 고독한 운명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신이 된 사연을 좀 더 밝힐 수 있는가?
성공한 멋진 남자를 만났다. 미국의 MIT 명문대를 나온 지성적이고 재력도 든든한 그런 남자와 가정을 만들었지만 헤어졌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다른 곳에 이미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게 전부다.


오랫동안 미국서 살며 재미 국악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그곳 교포사회에서 자주 뉴스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찍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국악예술중고교를 졸업하고 주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홍경란 한영숙 이매방 이춘희 성금련 선생 문하에서 남도가야금병창, 경기민요 등을 두루 전수하다가 1983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뉴욕 근교에 있는 락클랜드 칼리지에서 연기와 재즈댄스를 전공하고 브로드웨이 스칼라 댄스스쿨도 다녔다. 국악과 서양 춤을 통해 우리의 고전과 현대 공연문화의 다른 점과 접점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 과정이었다. 일찍 몸에 밴 국악을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 발전시키려는 탐구정신을 가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나는 세속의 비구니


국악인의 길로 들어선 때는 언제인가?
나의 출생지는 제주도 애월읍 납음리라는 곳이다. 초등학교 때 교육영화에 김구선생의 딸로 출연한 적도 있는데 예능에 끼가 있어서 인텔리 신(新) 여성이었던 어머니(김경애 1933∼)가 딸의 진로를 일찍 열어주셨다. 무형문화재 27호 고 한영숙 선생에게 발탁되어 춤과 소리를 배우며 국악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철이 들면서였다. 초등학교 마치고 창경궁 부근에 있던 국악예술학교에 진학했다.


대체로 성공한 예술인의 후견인을 알아보면 일찍 소질을 키워 준 어머니들이 등장한다. 신여성이라고 표현한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짐작이 간다.
옛날 진명여고 출신이다. 6.25 때 미8군에서 영문타이피스트로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군의관이셨지만 일찍 별세하셔서 어머니와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이곳 공연장(우리문화예술원 아리랑 소극장)에 비치된 많은 무궁화꽃송이와 태극기들이 인상적이다.
나의 외조부님이 함경도 출신의 독립투사였다. 하얼빈에서 활동하고 세 차례 처형 고비를 넘기며 일제와 싸운 분인데 그 기록들을 어머니가 피난길에 모두 상실해 책으로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머니는 늘 애석해 하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에 관한 우국충정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 나라 사랑에 대한 집착이 별나게 강하다. 또 국악이란 조상의 예술혼을 받들고 이어가는 것인데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표상을 앞세우며 활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곳 극장을 아리랑으로 이름 붙이고 <민족의 혼, 아리랑의 소리를 찾아서>를 장기 공연 프로로 마련한 것도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일깨워 주기 위한 데서 비롯된다.

 

 

재미 한국무용회 회장도 지낸 그는 지금은 귀국해 우리문화예술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공연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국악예술중고교를 다닐 때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 공연도 많이 다녔다. 금방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공연은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광복 30주년 기념 공연을 할 때였다. 한영숙 박귀희(무형문화재 23호) 스승과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 선생을 모시고 일본 관객 앞에서 공연할 때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관객도 과거를 생각하며 우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을 일깨워주는 데는 예술의 힘보다 더 무서운 게 없다고 생각한다. 또 광복 60주년 때도 일본 도쿄 우에노극장에서 한민족의 예술혼을 보여주었지만 1975년 오키나와 해양박람회 때 국악공연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우리문화예술원에는 골동품으로 귀하게 보이는 불상들을 비롯해 도자기와 가구, 고서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진품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수집 했는가?
어릴 때 우리 집을 찾아온 스님이 나를 보고 비구니가 안 되면 예술인이 되겠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비구니나 다를 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불교에 깊이 마음을 두고 살아서인지 미국에 있을 때부터 골동품가치가 있는 불상을 수집했다. 고서화나 가구도 수시로 경매를 통해 매입해 수 백년 보존 해온 외국의 유물도 있다. 소장품이 모두 100점 넘는다. 매우 귀중한 친구들이 되어 내 곁에 말없이 머물러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국민훈장(목련장)을 비롯해 한국과 미국에서 받은 상패와 감사장도 벽을 덮고 있다. 국악인으로서의 명분과 명예를 상징하는 저 기념물을 바라보면 지나간 시간이 자신을 위한 진정한 인생을 잃어버리게 한 세월로 생각할 때는 없는가?
무엇을 하든 행복을 느끼면서 살았다면 보람 있는 인생이 아닌가? 나라와 민족이라는 큰 정신을 언덕으로 생각하고 내가 배운 재주를 보여주며 나의 작은 몸둥이와 정신이 열심히 해야 할 일익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지난 세월, 사랑은 딱 한 번뿐이었는가?
아니다. 20대 멋모르고 살던 시절에 명색이 재벌 2세라는 사내와 불장난 같은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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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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