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품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쇼호스트 유난희(상)
[인터뷰] 제품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쇼호스트 유난희(상)
  • 김다인
  • 승인 201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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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시험 22번 낙방, 10년만에 이룬 꿈”

【인터뷰365 김다인】억 소리 나는 사람을 만났다. 작은 얼굴은 숏 커트 머리와 함께 빈틈없이 잘 매만져져 있으며 자그마한 몸매를 블루 블랙 패션으로 파워풀하게 코디한 사람, 그리고 눈과 입이 동시에 활짝 웃는 사람. 억대 연봉을 받는 국내 쇼호스트 1호 유난희씨다. 첫인사를 나눈 유난희씨는 TV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얼굴이 작고 훨씬 잘 웃고 훨씬 신났다.
필자는 그 이름보다 목소리를 먼저 알았다. 홈쇼핑에 단 1%도 관심이 없었던 터라 그 방송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케이블을 깔아놓고 나자 홈쇼핑이 슬쩍슬쩍 필자의 시야를 기웃거렸다. 공중파 사이사이에 홈쇼핑 채널이 포진하게 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고객님 이거 사면 횡재하는 겁니다” “벌써 전화가 백 통 넘게 걸려오고 있습니다” 등등 높은 톤, 빠른 목소리가 영 신경에 거슬려 냅다 리모컨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뚝 떨어지는 낮은 톤에 천천히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뭐지, 이 사람은? 첼로가 연주하듯 말을 하는 이 사람은?
남대문시장을 화면으로 옮겨 생중계 하듯 떠들썩한 홈쇼핑 방송 중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현상을 일으킨 이 사람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유난희씨였다. 필자만 알지 못했던 홈쇼핑 세계에서 그는 이미 대스타였다. 그가 소개하는 상품들은 늘 기록적인 매출을 보이며 그가 방송하는 시간은 고정 시청자들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유난희씨는 그 자신이 국내 쇼호스트의 ‘진행 중인 역사’다. 일반사람들이 쇼호스트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모르던 때 그 일을 시작해 홈쇼핑이 자리 잡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데 주춧돌을 놓았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2001년 이미 연봉 1억 원을 돌파한 커리어우먼이다. 최근에는 방송 패널로 인기 강사로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는 이제 물건을 판다기보다 자신의 이미지를 파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가 된 것이다.
고생한 얘기마저 유쾌하게 웃으며 풀어내는 유난희의 리얼 스토리를 들어보자.


쇼호스트로서는 드물게 말이 느리고 목소리 톤도 낮다.
원래 목소리는 빠르고 높았다. 빠르기는 조절해서 느리게 바꾼 것이고 소프라노였던 목소리는 성대결절을 세 번 겪으면서 낮아졌다. 직업병인지 7년마다 한 번씩 지금까지 세 번이나 성대결절이 생겼다.


단도직입적으로 우선 묻자. 현재 연봉은 얼마인가. 2001년에 이미 연봉 1억을 넘었다는 기사가 났으니...
(웃음) 일한 만큼 받는다. 하지만 억대 연봉이라는 것이 너무 강조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럼 이렇게 묻자. 지금 프리랜서인데 계약조건은 어떻게 되나.
연간 몇 편, 편당 얼마씩 해서 1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 내가 방송한 상품들 매출이 좋으면 그에 따른 보상금을 따로 받는다.


유난희씨는 내숭없을 성격 그대로 구체적인 연봉 등을 밝혔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그 액수를 밝히지 않는다. 그는 쇼호스트가 돈 많이 버는 직종으로만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얼마 전 신입사원 원서를 냈던 한 청년이 예상보다 연봉이 적다며 치잇, 하고 가버린 일이 쇼호스트에 대해 부풀려진 인식 탓이라 보기 때문이다.


남들은 그런 직업이 있는 줄도 모르던 때에 어떻게 쇼호스트가 됐나.
원래 꿈은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고 도전했는데 보는 족족 떨어졌다.(웃음) 이금희, 정은아, 백지연씨 등이 나와 함께 아나운서 시험을 본 사람들이다. 백지연씨가 KBS, MBC 동시에 붙었을 때 난 두 곳 모두 떨어졌다. SBS 개국 때도 아나운서에 응시했는데 떨어졌다. 결국 아나운서가 되길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은 것이 쇼호스트로 이어졌다.


아나운서가 왜 그렇게 되고 싶었나.
어렸을 때 마이크를 통해 듣는 내 목소리가 좋았다. 아버지가 마이크를 오디오에 연결해 주면 하루종일 마이크를 잡고 말하고 노래하고 놀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다시 들려줬다.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아나운서가 되는 것을 꿈꾼 것 같다.


방송중인 유난희씨. 최근에는 홈쇼핑뿐 아니라 공중파 방송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대학은 가정관리학과(숙명여대)를 갔다.
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여자는 대학 나와 시집 잘 가야 한다며 과를 정해줬고 대학은 당시 연대 다니던 오빠가 정해줬다. 오빠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여대생들에게 몇 번 채였는지(웃음) 강력하게 숙대를 추천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휴학을 하려다가 선배로부터 우연히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 등에 대해 듣고 3학년 때 한국방송예술원에 들어가 아나운서 시험에 대비했다. 평소 말이 빠르고 혀 짧은 소리를 낸다는 지적을 받고 6개월 과정 동안 연필을 물고 책을 읽어 그 버릇을 고쳐 나갔다.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왜 번번이 아나운서 시험에 낙방했을까.
서류시험은 통과하고 실기에서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실기 현장에 가보면 정말 예쁜 수험생들이 즐비해서 주눅이 들곤 했다. 난 작고 깡마르고 목소리도 가늘고 숫기도 없어서 공중파 방송에서 원하는 아나운서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심지어 한국방송예술원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은 과정 이수 중에도 리포터 등으로 취직이 됐는데 나만 열외였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도 아나운서에 게속 도전했나.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정말 우울해졌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가정교사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교직과목을 이수해야 했는데 난 방송국에 들어가겠다는 꿈 하나로 교직과목 이수를 포기했다. 그러니 취업이 더욱 막막했다. 그러다가 과 사무실에서 어느 벤처회사 비서 모집에 응시해 보라고 했고 그곳이 내 첫 직장이 됐다. 하지만 비서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반 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아나운서 꿈이 꿈틀댔고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이후 백수가 되면서 시립도서관 등을 다니며 다시 아나운서 시험공부를 했다.


언제까지 아나운서 시험을 봤나.
백수시절을 겪은 후 잠실 롯데백화점이 오픈하면서 사내 아나운서를 모집했다. 거기에 붙어서 아나운서는 됐다.(웃음) 대학시절에 롯데백화점에서 의류 판매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과 사내 아나운서 경험이 후에 쇼호스트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구매자의 심리, 소비 트렌드, 마케팅 전략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롯데 아나운서를 하는 틈틈이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도 봤다. 지방 방송 아나운서까지 다 합해서 22번 시험을 봤는데 다 안됐다. 나이 커트라인에 걸려서 더 이상 시험을 볼 자격도 없어질 때까지 본 것 같다.


참한 현모양처가 되라고 가정관리학과를 권한 아버지에 대한 정면도전 아닌가.
가정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던 아버지와는 당연히 부딪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내 뜻대로 밀고 나가 아버지 반대로 접었던 프랑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롯데 아나운서 일은 나름대로 재미있고 열심히 했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졌고 의욕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가서 패션을 공부해 보자 결심했다.


아나운서 시험 보느라 청춘이 다 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케이블TV 아나운서가 됐다.
1991년 초, 부모님 몰래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방송예술원에서 나를 가르쳐주셨던 KBS 김상준 아나운서실장님이 케이블TV에 원서를 넣어보라고 권하셨다. 그때는 케이블TV가 뭔지도 몰랐는데 김 실장님께서 3년 후 케이블TV가 본격 시작될 거라면서 정부에서 시범사업단을 구성하니 아나운서에 응시해 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붙었다. 유학 대신 한국통신 케이블TV 시범방송사업단에 입사했다. 내가 한 일은 지역 정보를 모아 뉴스로 전달하는 지역 뉴스 아나운서였다. 개포동에서 사업단이 있는 목동까지 매일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니면서도 재미있게 일했다.


시범사업단이 해체된 후에는 어떻게 됐나.
3년 동안 시험방송이 끝난 후 케이블방송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시 나를 비롯한 시범사업단 친구들은 그대로 지역방송인 양천방송에 남게 됐다. 실망이 컸다. 늘 공중파 방송을 꿈꾸던 내게 지역방송은 너무 좁았다. 지역방송을 벗어나기 위해 뉴스 전문 채널 YTN, 경제 전문 채널 MBN 아나운서에 응시했지만 역시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1995년 초 알고 지내던 PD에게서 연락이 와 양천방송을 그만두고 다솜방송(당시 교육채널) 리포터로 자리를 옮겼다.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프리랜서로 일했다.
다솜방송에서 일한 지 4개월이 됐을 때 어느날 아침 조선일보에 난 모집공고가 눈에 띄었다. 홈쇼핑 텔레비전(HSTV, 39쇼핑 전신)에서 낸 모집공고였는데 그중 쇼호스트라는 직종에 눈이 갔다. ‘방송에서 상품을 소개해 주는 전문 진행자’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직업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이, 결혼 여부에 제한이 없어 도전해 봄직했다. 그동안 숱한 방송국 시험에 걸렸던 게 나이였다.


휴- 10년 가까이 계속된 ‘시험인생’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것 같다. 계속 떨어져서 듣기도 미안했다.
모집공고를 본 날이 마감날인 데다가 마침 토요일이었다. 그래도 아나운서 시험 22번, 다른 직장 10번 시험을 본 베테랑이어서 입사지원서, 자기소개서 등은 거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사진이었다. 요즘처럼 즉석사진기가 지하철에 있을 때도 아니어서 동네 사진관에 가 사정해서 겨우 찍어 현상하고 회사로 달려가 총무부에 가 입사지원서 달라고 해서 막차에 원서를 넣었다. 하도 많이 떨어져서 큰 기대를 안했는데 며칠 후 서류는 통과했다며 2차 시험인 실기시험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쇼호스트로서 유난희씨가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첫걸음이 됐다. 그 자부심을 지키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이다.


쇼호스트 실기시험은 어떻게 진행되나. 실제로 상품을 소개하는 건가.
상품 세 가지를 임의로 정해 소개하면 된다고 했다. 어떤 제품을 정해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막연해서 시장과 백화점을 둘러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갤러리아백화점 1층에서 프랑스 샴푸를 팔기 위해 모발 테스트 등을 하는 것을 봤다. 이거다 싶어 그 직원에게 다시 한번 샴푸에 관한 설명을 부탁하며 받아 적었다. 그리고는 아예 16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그 샴푸 세트를 샀다. 나머지 두 가지는 엄마가 집에서 쓰는 미제 다리미, 브로치로 정했다. 결과는 내가 1등으로 합격했다. 심사위원 중 내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건 미국 전문가였다. 원리며 효능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그의 마음에 든 것이다.
3차시험은 토익시험과 인성, 적성시험이었다. 무난히 통과하고 마지막 4차시험이 사장님과의 면접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데 인사부 직원이 종이를 내밀며 희망 연봉을 적고 가라고 했다. 난 그 자리에 앉아 합리적(!)으로 계산을 했다. 당시 다솜방송에서 30분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25만원을 받았는데 홈쇼핑은 생방송으로 한 시간 진행되니 50만원, 일주일에 6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니 한달로 따지면 1천2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거기에 작가도 없어 내가 다 해야 하니... 계산해보니 1억원이 훨씬 넘었다. 내 생각에도 좀 많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 연봉 액수를 1억으로 써서 주고 나왔다.


그때 이미 억 소리가 났다.
(웃음) 몰라서 용감했던 거다. 다음날 상무님이 전화를 했다. 사장님이 면접 다시 하잔다고. 갔더니, 사장님은 “시범방송 아나운서 경력 외에 특기할 것도 없으면서 희망 연봉 1억이 말이 되느냐, 내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봉이 6천500만원, 옆에 앉아있는 전무님의 연봉이 4천만원이라고 했다. 가슴이 덜컥 했다. 연봉 액수 때문에 떨어지는 건 아닌가, 마음 조리는 날이 계속됐다. 다행히 며칠 뒤 전화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조정된 내 연봉은 3천만원이었다.


당시 31세, 결혼한 주부였다.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나.
스물여섯 살에 당시 인턴이었던 남편(현재는 소아과 의사)을 만났고 서른 살 양천방송에 있을 때 결혼했다. 남편은 누이만 넷 있는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이었다. 결혼 전 잠시 헤어진 적이 있는데 시어머니께서 내가 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일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내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명이었는지 다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하고도 일을 계속해서 시댁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MBN 아나운서 시험이 마침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마지막 면접시험이라 남편에게 하루만 신혼여행을 연기하자고 했다. 남편이 내 청을 들어줘서 결혼식 다음날 오전 면접을 보고 오후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물론 시어머니는 모르는 일이다. 홀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결혼 후 시댁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방송 스케줄 때문에 늦게 들어오고 방송용 짙은 화장까지 하고 다니는 걸 본 시어머니가 이혼하라는 말까지 하셨다. 한다하는 대기업 딸도 마다했는데, 몸은 배짝 말라 애를 낳을지도 걱정이고 서른 살 노처녀인데다 의사아들 둔 덕에 받을 법한 키 세 개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게다가 방송에 나온다고 해서 틀어봐도 어디 얼굴 보이는 데는 없고... 남편과 나를 앉혀놓고 이혼 안할 거면 나가라고도 하셨다.
밤늦게 방송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는 현관 열쇠를 여는데 한참 걸렸다. 어머니 방이 현관 입구에 가까워서 작은 기척이라도 알아채실까봐 소리 안 나게 조용히 여느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30분 가까이 마룻바닥을 기어서 내 방까지 들어가 비로소 구두를 벗었다.


말로만 듣던 시집살이를 톡톡히 했다. 정말 시어머니께서 쫓아내셨나.
96년 1월 홈쇼핑 최초로 내가 해외 출장을 갔다. 수입하는 유기농 다이어트 알약을 현지에서 직접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호주에 가서 촬영을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한시간에 5백만 원이던 매출이 1억 원으로 올랐다. 홈쇼핑 최초로 1억 매출을 올린 것이다. 그런 성과를 시어머니께서 알 턱이 없었다. 하다하다 외국 출장까지 가는 며느리를 더 두고 보실 수 없었는지 출장 다녀오자마자 나가라고 하셨다. 울면서 나왔다. 마침 남편이 레지던트를 끝내고 일산에 있는 병원에 취직을 해서 시댁이 있는 청담동에서 화정으로 이사를 갔다. 분가를 하고 곧 아이를 가져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지금은 어떤가. 가끔 방송에서 옷을 소개하면서 “시어머니께 이 옷을 사드렸다”는 말도 하던데.
당신께서 가장 아끼시던 둘째딸이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많이 바뀌셨다. 남편과 내가 시댁을 나오고 난 후 둘째딸이 들어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공부도 잘해서 교수 오라는 것도 마다하고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가 세상을 떴다. 생전에는 내게 시누이 시집살이를 시켰는데 돌아가시면서 미안하다고, 시어머니께는 올케 계속 일하게 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시어머니도 많이 바뀌신 것 같다.


얘기가 길었다. 처음에는 ‘성공한 쇼호스트 유난희’에 초점을 맞춰 그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잠깐씩 넣을 요량이었지만, 듣다 보니 그의 지난 시절이 더 의미가 있겠다 싶다. 지금의 유난희가 있기까지 취업을 위한 이십대의 부단한 노력과 좌절, 삼십대 일하는 여자들이 겪는 갈등도 있었다. 그 위기를 잘 갈무리해서 착착 자신의 현재로 만든 쇼호스트 유난희의 이야기가 이제 이어진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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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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