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겹겹 쌓인 위안부할머니들의 한을 담는 사진작가 안세홍
[인터뷰] 겹겹 쌓인 위안부할머니들의 한을 담는 사진작가 안세홍
  • 김다인
  • 승인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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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사과 받아낼 때까지 셔터 계속 누를 터”

【인터뷰365 김다인】지난 11일 작은 기사 하나가 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지인 이용녀 할머니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는 단신이다. 이 할머니는 1926년생으로 16세 때인 1941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미얀마 양곤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뒤 1946년 귀국했다. 나눔의집에 기거하며 외상 후 스트레스 등 평생 질병에 시달렸던 이 할머니는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한 많은 인생을 접었다. 이용녀 할머니 사망으로 국내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57명으로 줄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생긴 지 70년여 년. 한국을 비롯해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의 여성 20만 명 정도가 강제로 일본군 트럭에 태워져 만주에서 윈난, 태평양 연안까지 전장의 위안소로 내몰렸다. 하루 수십 명씩 일본군을 상대하는 성노예로 내몰린 이들 중 상당수는 종전 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타국 땅에 버려졌다.
전무후무한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 일본은 총리들이 사죄 담화, 사죄 편지 등으로 때우고 있으며 아직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그리고 적절한 배상 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 말뚝 테러, 일본 정부 각료들의 연이은 망언 등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1992년부터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국민들에게 위안부들의 슬픔과 아픔은 어느덧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언론매체들은 위안부 문제를 뉴스 전면에 내세울 것이지만, 그날이 지나가면 다시 위안부 문제는 연로한 할머니들과 뜻을 같이하는 주변 사람들의 힘겹고 지루한 싸움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진작가 안세홍(43)은 그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싸움에 12년 동안 앵글을 맞춰오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일상을 사진에 담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전을 열어 그 실상을 알려왔다. 할머니들의 자취가 점점 없어져가자 ‘겹겹’이라는 사진에세이집을 묶어 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한과 실상을 영원한 현재형으로 고정시켰다.
왜 그는 이 일에 뛰어들었을까. 그가 만나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일본 전시회, 북 토크 콘서트 등으로 바로 다음날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안세홍 작가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은 게 언제인가.
1996년이다. 당시 ‘길’이라는 잡지사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면서 화보 촬영차 처음 나눔의집을 방문했다. 그때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차마 말도 못 건넸다. 이후 계속해서 나눔의집을 방문해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차차 할머니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할머니들의 아픈 사연도 듣게 됐다. 3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면서 98년부터 할머니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을 전공했나.
아니다. 강원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중고교 시절 집에 굴러 다니던 미놀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면서 처음 사진을 찍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됐고 사진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이 다 흑백이던데 디지털로 찍은 것인가.
필름으로 찍는다. 필름으로 찍어 직접 현상을 하고 디지털화해서 스캔한 후 인화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열고 셔터를 누르는 안세홍 작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고 어떤 점이 가장 마음 아팠나.
7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아픔을 잊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팠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말 그리고 모습을 왜곡없이 그대로 세상에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왜곡이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나, 사람들의 기억은 시간이 오래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굴절되지 않나.
그래서 검증에 검증을 했다. 같은 사안이라도 이리 묻고 저리 물어서 내 나름대로 크로스체크를 했다. 할머니들에게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의 마음이 열린 후 내가 포착했던 그 표정이 나오면 셔터를 눌렀다.


나눔의집에서 중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눔의집 봉사활동 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에서 소식지를 만드는 일을 했다. 2001년에 연구소에서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 실태 조사를 갔는데 그때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할머니들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찾았나.
정신대연구소에서 90년대부터 자료를 수집했다. 할머니들이 종전 후 대개 위안소 근처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위안소 근처 마을에 수소문을 했고 신문광고도 냈다. 2001년에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난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가서 할머니들을 만났다. 헤이룽장에서 베이징, 류산, 상하이, 우한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2001년부터 3년 동안의 기록을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 알렸다.


이번에 펴낸 사진에세이집 ‘겹겹’을 보면 중국에서 살고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의 기록이 나온다. 이들 역시 지속적인 연락을 하고 있던 분들인가.
그렇다. 전화를 하거나 찾아 뵙던 분들이다. 그분들을 뵙기 위해 일곱 번을 갔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늘어났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열 분도 넘었는데 한 해 두 해 갈수록 돌아가시는 분이 늘어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번에 책으로 엮었다. 글재주가 없어 할머니들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에 사진을 더했다.


중국에는 현재 몇 분이나 생존해 계신가.
다섯 분 남았는데 두 분은 한국으로 돌아와 나눔의집과 요양원에서 살고 있고, 세 분은 중국 샤오관과 동닝, 우한에서 살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여덟 분 할머니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기막히다.
헤이룽장성 동닝현 인근 경로원에 사는 이수단 할머니는 조선말도 잊은 채 고향 가족들이 보낸 사진 한 장에 의지해 평생을 살았다. 김순옥 할머니는 전쟁 후에 소련군을 피해 달아났지만, 더 멀리는 감히 도망치지 못한 채 위안소 근처에서 살았다. 배삼엽 할머니는 오래전 한국에서 사망 신고가 되어 있어, 국적 회복과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포기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경우다. 김의겸 할머니는 당시 부모도 모르게 끌려갔는데 종전 후에도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을 찾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귀국을 포기했다. 박대임 할머니는 일제 치하에서 8개월 된 아들과 함께 끌려갔는데 밤에 잠도 안 재우고 그 짓을 하던 일본군에 여전히 치를 떨었다.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지도를 보고 있는데 백내장으로 눈이 침침해도 고향인 진천은 정확하게 짚어낸다. 위안소 시절 받은 고문으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린 현병숙 할머니. 갈 수만 있다면 고향에 가고 싶다고, 그래서 방법이 있겠냐고 묻던 박우득 할머니, 어떻게 잊겠냐고, 위안소 그 앞을 지날 때면 천불이 난다던 박서운 할머니 등이다.


그중 어떤 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나.
92세인 이수단 할머니다. 우리말을 하지 못해 통역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향 말을 잊어 부끄럽다고, 연신 미안해 하신다. 한국에 오고 싶어도 반겨줄 친척 하나 없어 귀국을 포기했다. 이 할머니는 2005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중국에 있어도 생활지원금 70만원을 받게 됐다. 현재 경로원에 계시는데 내년 봄쯤 의사 등 자원봉사자들과 다시 찾아 뵙고 건강도 체크하고 집도 고쳐 드릴 예정이다.


안세홍 작가가 찍은 중국 거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누추하고 힘들게 살아도 결코 고향을 잊지 못한다.


중국 거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정부에서는 왜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가.
국적 문제 때문이다.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 가운데 관동지방으로 끌려간 경우는 종전 후 거의 그곳에 그대로 남게 됐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정부 지원 등을 받을 수 없었다. 남태평양 쪽으로 동원된 위안부들이 종전과 함께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 것과 대조적이다.


이미 일본, 미국 등에서 여러 차례 위안부 관련 사진전을 열었다. 특히 일본에서의 반응이 궁금하다.
올해 3월 19일부터 4월 18일까지 한 달간 미국 뉴저지에서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을 열었다. 작년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전시회를 열었는데 특히 도쿄 신주쿠 소재 사진전시관인 니콘 살롱에서 전시회를 열 때는 일본 우익단체들의 갖은 협박으로 방해했다. 그래서 도쿄지방법원에 사진전 개최 불가를 취소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내 승소판결을 받은 후 전시회를 열었다.


사진전을 열기 위해서는 40여 점의 대형 사진을 인화하는 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정부 지원이라도 받는 건가.
하하. 그냥 내가 한다. 가끔 아르바이트도 하고 강연도 하고, 아내도 일을 하고. 일본에서는 기부금을 받고 있다. 600명 정도가 후원하고 있는데 극우단체의 공격이 두려워 그분들 이름은 밝히지 못한다. 한번은 극우단체에서 지원자를 집까지 쫓아간 적도 있었다. 한국에도 계좌를 열어놓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들어오는 기금은 공적으로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가족상황은 어떻게 되나.
나고야에서 아내와 여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산다. 아내는 재일교포인데 한국에 유학 와 단국대학교에서 조선복식사를 공부하던 중에 나와 만났다. 2005년 일본 강제징용자 진혼제 때 자원봉사자로 만나 2007년 결혼했다. 결혼 후 한국에서 살았는데 아내가 적응을 못해서 처가가 있는 나고야로 가서 살고 있다.


일본어를 잘하나, 아들은 어떤가.
난 일어를 잘 못한다. 아들은 집에 있을 때는 우리말을 잘하더니 유치원에 들어가니까 일어를 더 잘하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그 점이 걱정이다.


이수단 할머니
개인이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이번에 낸 책 제목인 ‘겹겹’은 장기 프로젝트명이기도 하다. 겹겹이란 할머니 얼굴에 쌓인 주름. 세월의 겹, 한의 겹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겹겹 프로젝트의 기본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과 한을 일본 미국 등지에 널이 알리는 것이다. 앞으로 할머니들은 최대 5년 이상을 생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계속 그들의 겹겹 쌓인 한을 풀어주고 일본의 정식 사과를 받아내야만 한다. 앞으로 20년을 내다보고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안철수 의원 등이 역사관과 나눔의집을 방문했다. 역사관은 경기도 퇴촌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휴식처 나눔의집 바로 옆에 있는 세계 최초 성노예 주제 인권 박물관으로, 일본군 위안소 모형,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과 기록,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전장의 위안부라는 전대미문의 일을 당하고 수십 년을 그 후유증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의 삶이 박물관에 전시되고만 말 것인가. 그러기엔 할머니들의 겹겹 주름에 쌓인 한이 아직도 많은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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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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