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150년 통사 펴낸 언론인 김호준(상)
고려인 150년 통사 펴낸 언론인 김호준(상)
  • 김두호
  • 승인 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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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고려인 역사의 진실 복원하다

【인터뷰365 김두호】김호준(70) 원로 언론인이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50만 고려인의 150년 대하(大河) 역정(歷程)을 집대성한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을 출간했다. 서울신문과 문화일보에서 편집국장, 편집인 등을 역임하기까지 일생을 신문과 해로(偕老)한 그는 지난 10년에 걸쳐 열 번이 넘는 현지답사와 취재, 다양한 자료 수집과정을 통해 고려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555쪽의 방대한 통사(通史)로 정리했다.
고려인은 선조가 같은 우리의 동포들이다.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주 동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유대민족의 유랑에 비유되는 디아스포라(離散)의 처절한 고려인 기록들도 이윽고 생존한 그들의 증언을 통해 집합되어 책으로는 나온 것이다. 올해는 또 외세에 흔들리던 조선왕조 끝자락인 1863년, 고려인 선조들이 두만강 너머 연해주로 개척의 길을 떠난 지 150년을 맞이한다.
‘카레스키 150년은 통사(通史)이자 통사(痛史)였다’는 표현으로 저서를 함축해서 소개한 저자 김호준 원로 언론인은 지금 고려인지원센터인 ‘너머’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언론사를 떠난 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과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 등 공직에도 머물렀으나 후반 인생은 카레스키로도 부르는 유라시아 고려인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살고 있다.
우리 민족 해외 이주사의 개척자들인 고려인, 그 고통의 역사와 함께 극복과 성장의 발자취를 인터뷰를 통해 정리했다.


고려인의 잃어버린 역사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은 역사학자들이 학술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자료를 직접 수집하거나 현지 인터뷰를 통한 증언으로 발굴 정리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집념과 역량이 크게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고려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변천사의 전반에 걸쳐 그들의 잃어버리고 묻혀버린 역사를 통사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결과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나올지 두렵고 궁금했다. 그러나 당대의 실존 사건을 기록하고 보도 정리하는 직업이 저널리스트인 탓으로 오히려 묻힌 역사의 진실을 캐는 데도 발로 뛰는 기자 근성과 방법이 통했다.


고려인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을 것이다.
문화일보 편집인을 끝으로 신문사를 떠나던 해인 2002년 여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하면서 그곳에 우리 동포가 2만 명 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모국에서 6천km나 떨어진 멀고 먼 이곳까지 흘러 온 그 많은 우리 혈육의 역사가 궁금했다.


저서에는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지역, 러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고려인의 역사적 발자취를 모두 다루고 있다.
처음은 키르기스 고려인이 나의 관심사였고 연구과제였다. 수없이 찾아가 그들의 기록을 들추어 가다보니 역사의 궤를 함께한 유라시아 전체 고려인으로 취재영역과 발길을 넓히지 않을 수 없었다. 키르기스 고려인은 유라시아 50만 고려인의 일부일 뿐이다.


유라시아 고려인들의 이주사(移住史)를 기록한 책으로는 처음인가?
1960년대에 고려인 역사학자 김승화의 <소련 한족사>라는 책이 나왔지만 스탈린시대 소련의 강제이주와 관련된 수난의 발자취는 꺼내지도 못했다.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고려인들도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언로를 열었고 1991년 소련연방 해체와 함께 해제된 비밀문서를 통해서도 강제이주의 진실이 드러나 관련 수기나 논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자료들뿐이어서 큰 틀의 통사로 정리해 보겠다는 의욕을 가진 것이다.
지난 10년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생존한 원로들의 증언을 인터뷰하고 각종 문헌 자료의 수집, 비공개 사진과 통계자료를 발굴해 책에 담았다.


왜 ‘고려인’인가


책의 첫머리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한인동포들이 스스로를 고려인으로 부르게 된 유래를 밝히고 있다. 사실 그들이 왜 자신들을 고려인으로 부르는지 내력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고려인의 선조는 조선왕조 때 러시아 연해주로 자진 이주한 사람들이다. 먼저 1869년 러시아의 프르제발스키라는 유명한 탐험가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 정착지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1860년대부터 이미 자신들을 고구려 또는 고려사람을 뜻하는 가우리(Kauli) 로 불렀다는 기록을 남겼다. 연해주가 먼 옛날 우리 선조인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고려’나 ‘고려인’은 그들의 역사성과 민족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망향동포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1917년에 연해주 고려인들이 고려족회(高麗族會)란 이름을 내걸었고 이어서 고려인동맹, 고려적위군, 고려공산당 등 고려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러시아어 카레이츠도 고려사람을 뜻한다.


고려인이라면 1937년 스탈린 독재시절 정착지인 연해주에서 멀고 먼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강제 추방당한 수난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특히 고려인의 선조들이 1863년 두만강 건너 연해주로 이주해 대륙진출의 문을 연지 150주년이 되는 점에서 고려인의 역사를 다룬 저서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의 출간은 관심을 모으게 한다.
일제의 스파이로 몰려 18만 고려인이 집단으로 강제 이주된 수난사는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고 인류잔혹사의 엄청난 기록이다. 150년전 연해주에서 시작된 개척의 뿌리에서부터 스탈린시대의 험난한 강제이주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한편은 소련 붕괴 후 다시 황야에 선 그들의 재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소망에서 책을 준비해 왔다. 지금 역사적인 조국인 한국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묻히고 잊혀진 역사의 진실을 복원한 최초의 통사(通史)이지만 수난의 역사로 점철된 내용은 아플 통(痛)자, 통사(痛史)로 볼 수도 있다.


한국의 역사와 민족사에서 볼 때 고려인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 민족사에서 고려인은 역외 개척의 선구자들이다. 서기 926년 발해 멸망이후 비좁은 한반도에서 칩거하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시킨 주역이 그들이다. 고려인들은 1860년대에 연해주 이주를 시작한 지 10년도 안 돼 천리 북쪽 아무르 강변에 첫 정착촌을 건설했고 이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서진(西進)을 계속했다.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민족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역외개척사의 한 페이지였다. 지금 고려인의 생활무대는 러시아 동단 캄차카 반도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장장 1만2천km에 뻗쳐 있다. 고려인은 인구가 50여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에 고려인이 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밀집해 사는 곳도 없어서 유라시아 고려인은 대표적인 분산민족으로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가별 현재 고려인의 인구 분포를 알고 싶다.
2011년 통계로 독립국가연합 지역인 구소련지역에 52만 3천500여명이 산다. 그중 러시아에 21만3천여명, 우즈베키스탄 17만1천여명, 카자흐스탄 10만5천여명, 키르기스스탄 1만7천여명, 우크라이나 1만2천여명, 타지키스탄 1천600여명 등이다.


연해주는 고려인 이야기가 나오면 등장하는 지명이다. 우리 민족과 역사적 지리적으로 깊은 연고가 있다는 점을 알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관계인가?
고려인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반도와 접경해 있는 지리적 조건 외에 역사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영광과 회한이 베어 있는 땅이다. 연해주는 우리 선조의 하나인 부여, 북옥저족이 거주한 지역이었고 뒤에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아래 장기간 우리 민족문화가 꽃을 피운 영역이다. 그러나 서기 926년 발해 멸망을 끝으로 연해주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잊은 땅이 되었다. 러시아 땅이 된 것은 1860년이다. 베이징조약으로 청나라가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긴 것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연해주 최남단의 크라스노예셀로는 조선의 옛 영토 녹둔도였다. 녹둔도는 세종 때 6진을 개척하면서 우리 군사를 주둔시킨 두만강 하구의 작은 섬이다. 이순신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둔전제를 실시하다가 여진족의 반격으로 군사 11명이 전사하고 주민 160여명이 끌려가 그 책임으로 백의종군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잊을 수가 없다.


김호준씨는 10년에 걸쳐 열 번이 넘는 현지답사와 취재, 다양한 자료 수집과정을 통해 고려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사(通史)로 정리했다.


안중근의사 우국충정의 무대


저서에는 연해주에서 시작된 고려인의 이주 초기 비화나 역사적 기록들을 소상하게 밝혔는데 요약해 달라.
조선말기 연해주와 접한 함경도는 농경지가 적고 척박한 곳이었다. 더구나 지배층의 수탈 등으로 살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에게 건너편에 있는 연해주는 허허벌판 신천지였고 기회의 땅이었다.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65명이 남부 연해주 국경지대에 있는 지신허강 유역으로 집단이주한 것이 이주의 효시로 보고 있다. 1920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연재된 고려인의 역사기록 ‘아령실기’는 고려인 이주민을 이끈 인물이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라고 밝히고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개척의 선봉이 된 것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불법 월경자가 잡히면 장터에서 공개 효수하는 관례가 있었지만 기아와 억압을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연해주로 넘어갔다. 1867년 12월에는 경흥군 두 마을의 주민 150가구 전체가 연해주의 얀치헤 마을로 집단이주하기도 했다. 이주 붐이 일어나면서 연해주는 러시아인보다 고려인이 더 많이 살았다.


연해주가 일제 침략기와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기지 역할을 해 연해주의 고려인과 관련된 독립운동 비화가 많은 것 같다.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농경 개발과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착 초기 러시아인들의 차별과 박해가 따랐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촌은 항일운동의 기지가 돼 주었다. 일제에 대항해 의병활동을 한 고려인이 연인원 11만명에 달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가 의거 준비를 한 곳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신문 대동공보사였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지가 됐던 연해주는 바로 우리 민족이 흘린 개척의 땀과 구국항쟁의 피가 배어 있는 곳이다.


고려인들이 연해주 정착 과정에 받은 박해나 차별이라면?
고려인에 대한 당시 러시아 차르 정부의 기본 정책은 러시아인 우월주의를 앞세운 인종차별이었다. 금광에서 러시아 광주는 고려인에게 공급하는 생활필수품의 값을 시가의 배를 받았고 채굴한 금은 시가의 절반으로 사들였다. 상투를 자르지 않거나 세례를 안 받아도 벌금을 내게 했다. 1886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당국은 고려인을 전염병의 근원으로 몰아 고려인 296명을 일본 기선에 태워 원산으로 추방했다. 1902년에는 고려인과 중국인 등 황인종이 러시아인 거주 지역에 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황무지를 개척해 농경지를 만들어 놓으면 토지를 몰수하고 미개간지로 내모는 행위도 따랐고 러시아 지주들이 고려인 농부에게 소작료로 수확량의 50%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러시아 작가 페소츠키는 박해받는 고려인을 두고 ‘방랑하는 짐수레의 말과 같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인을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배척하며 차별정책을 쓴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 배경에는 여러 가지 속셈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러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시각은 이중적이었다. 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긍정적인 면과 고려인의 과도한 유입이 원동지역 안보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특히 1905년 연흑룡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황인종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황화론’에 입각해 고려인을 경계했다. 일본세력의 침투에도 고려인을 위험 요소로 생각하고 고려인 이주유입을 막았고 연흑룡주, 즉 아무르와 연해주 금광에서 고려인 7천명을 추방하기도 했다.
그런데 후임으로 온 곤다티 총독은 고려인 옹호론자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고려인에게는 러시아가 제2의 조국이 되었다면서 러시아 국적 취득을 신청한 고려인 모두에게 국적을 부여했다. 고려인이 동양인 중 가장 우수한 노동인력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고려인 고용비율을 크게 높였고 그의 옹호정책에 힘입어 1910년 망국 후 3만명 이상의 고려인이 러시아로 귀화했다. 그 무렵 연흑룡주에 등록된 고려인 수는 6만2천명에 달했고 매월 600∼700명이 이주민으로 유입해왔다.


좌우파 이념 갈등의 원조


1917년 차르정부를 무너뜨린 러시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등 러시아 사회의 격랑기에 고려인 사회도 많은 타격을 받고 변화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온다.
10월 혁명이후 고려인 사회는 정치적 이념에 따른 분화가 진행되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토지를 분배받고 귀화해 부유하게 사는 고려인을 원호라고 부르고, 귀화하지 않고 소작인이나 고용노동자로 가난하게 사는 고려인을 여호라고 호칭했다. 원호와 여호는 조선의 양반과 천민을 연상할 정도로 신분 차이가 심했다. 사는 곳도 달랐고 통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0월 혁명이후 민족운동세력은 비천한 신분인 여호 중심의 좌파와 지주 출신의 부유한 원호 중심의 우파로 양분됐다.


좌우로 갈라선 이념적 민족 대립세력의 원조나 불씨가 된 유래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런 시기에 시베리아와 원동에서는 멘셰비키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의 내전이 터졌다.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열강은 내전에 끼어들어 적군 소탕전을 벌였다. 특히 일제는 원동러시아 지역의 분리 장악을 겨냥해 1918년까지 7만명이 넘는 병력을 파견해 반 볼셰비키 세력인 백군을 지원했다. 결국 부유한 원호들은 백군파에 가담해 일본군과 연결되어 친일화 되었고, 여호들은 볼셰비키 적군파와 연대해 항일 빨치산 투쟁에 가담한 것이다.
역사는 백군이 패배하고 적군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내전이 1922년 10월 적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일본군도 연해주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그때 고려인들은 조국이 독립되리라는 희망에 불탔다. 5년간의 내전기간 중에 고려인은 46개 빨치산 부대에 1만여명이 참여했고 민간인을 포함해 2천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럼에도 소비에트 공산당 정부에 기여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를 시킨 건 보상 대신 배은망덕의 징벌행위를 내린 것인데 그들이 내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일본군이 철수한 직후 1922년 11월 고려 공산당의 한명세는 연해주에서 고려인에게 민족자치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일제의 침략 음모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 원동지역 공산당은 그의 제의를 반대하고 오히려 연해주 고려인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지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전 중 적군에 충성했던 공적은 무시하고 일부 고려인의 반러 친일행위만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결국 그게 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으로 이어졌다.
고려인들이 한층 더 서럽게 배신감을 맛본 것은 내전 중 혁명군 편을 들면 당신들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공약까지 했던 점이다. 강제 이주되기 전인 1928년부터 소련 정권은 고려인 8만7천700명을 연해주 북쪽 하바롭스크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추진하다가 고려인들의 저항으로 1931년 중단해 3천여명의 이주에 그쳤다. 6년 후 벌어진 전체 고려인 강제이주의 전주곡이었고 선행실험이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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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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