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갈뻔 했던 <여로>의 히로인, 태현실
북으로 갈뻔 했던 <여로>의 히로인, 태현실
  • 김두호
  • 승인 200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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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사건 없이 살아온 여배우의 초상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젊은 시절, 영화와 TV에서 주역 연기자로 인기 정점에 올랐던 태현실의 삶은 ‘이상적인 여배우’의 귀감이며 상징이다. 성공한 연기자로서의 명예와 함께 다복한 가정을 가진 주부로서의 행복을 나란히 향유해오며 2백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최근에 제작된 영화 ‘첫눈’에서 이준기의 할머니 역을 맡아 지금도 연기자로 건재하다. 1941년 11월 11일생이므로 주민번호 앞머리에 ‘1’이 5개가 깔려있다. 오복(五福)을 누리며 살아온 그녀를 만났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신다. 근황부터 알고 싶다.

평온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 자식 남매 중 딸은 출가했고, 34살 아들은 미국 템플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아버지 회사(금융기업)에 근무해 가족들에게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없어서 시간이 자유롭다. 지금껏 은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틈틈이 연기활동을 해왔다. TV드라마는 몇해 전 SBS-TV <작은 아씨들>이 마지막 출연 작품이고 영화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첫 눈>에 출연했다. 나이가 들어도 마땅한 배역이 주어지면 욕심을 버리지 않고 뛰어든다. 배우는 생각할수록 좋은 직업이다. 정년이 없으니까.


최불암, 김혜자, 박병호, 정혜선 등과 1962년 KBS-TV 1기 공채탤런트 동기로 알고 있다.

맞다. 그해 <신필름>에 스카우트 되어 이형표 감독의 <아름다운 수의>의 출연을 시작으로 보면 연기생활 45년에 이른다. 결혼하기 전 한창 바쁘게 활동할 때 딱 한번 삼각관계라는 호된 스캔들에 휘말렸다. 신성일 엄앵란 선배 부부가 집안일로 잠깐 불협화음이 생겼는데 그 원인 제공자로 오해를 받았다. 두 사람이 나 때문에 파경을 맞은 것처럼 떠들썩하게 화제에 올라 우리 어머니도 멀쩡한 딸 혼사길이 막혔다고 펄펄 뛰시다가 드러눕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게 단 한번의 구설수였다. 사실 배우는 크게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면 적당히 시끄러운 일로 화제의 초점이 되는 것도 허물로 생각지 않는다.


간혹 인기를 위해 스캔들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염문은 여배우에게는 이미지에 손상을 줄 수 있지 않은가?

연애를 잘 하는 사람이 연기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애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살아 움직이는 배우의 매력과 생동감은 반드시 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난 스캔들 한번 제대로 못 일으키고 살았으니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는 배우다. 한창 활동할 때 보디가드가 어머니였고 워낙 집요하고 반듯하게 행동을 감시하고 뒷바라지를 해 너무 재미없고 평범한 사생활을 보냈다. 어머니는 배우를 하겠다는 나에게 서약을 받고 허락했다. 함부로 처신해서는 안되고 배우하다가 한번 결혼하면 절대로 이혼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시집간 연예인들의 이혼풍조를 가장 두려워했던 친정 어머니의 걱정이 평생 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 그 어머님은?

아버지는 2년 전에 별세하셨고 어머니는 작년에 미국서 돌아가셨다. 내가 3남매의 맏이인데 두 동생이 미국 휴스톤에 살고 있다.


한번도 가정불화를 겪지 않고 또 이혼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인지?

주변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언젠가 김혜정 씨(1960년대 영화배우)도 그런 질문을 해왔다. 자식들 키우며 언제나 행복하게만 보이는데 한번도 이혼할 생각은 안해 본 거 아니냐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접게 만드는 것이 인내심이다. 부딪치는 것은 두 사람이 똑같이 참지 못하고 물러서지 않기 때문인데 한쪽이 참게 되면 한쪽이 밀리게 되므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하루일과가 끝나고 저녁이 되면 반성의 시간을 갖는 버릇이 있다. 참고 반성하며 살다보면 바깥으로 터져 나갈만한 불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황정순 선배께서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 중에 새겨둔 말이 있다. 일이든 뭐든 1등을 해라, 1등보다 더 큰 보람이 없지만 집안에서 만은 2등을 해라, 그럼 집안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비결이다. 시대가 많이 달라져 이제는 남녀평등, 부부평등 남자도 설거지 하는 사회로 들어섰으니 지금 젊은이들에게 고루하게 들릴거다. 그러나 과거보다 지금의 이혼율이 높은 걸 보면 아직은 그 말의 뜻이 깊다고 생각된다. 평등이 잘못되어 대립관계로 발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정순 여사는 오래전부터 독신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닥터였던 부군 이박사와 오래전에 사별하셨다. 돌아가신 후 제대로 행복을 나누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자주하셨다. 그래서 사별 후에도 집에 가면 부군의 옷을 테이블 의자에 걸어두고 사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생전에 당신이 1등자리를 고집했던 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나 짐작된다.


‘성격이 팔자’라는 소리가 있다. 좋은 성격을 가져야 사는 것도 평온하고 팔자도 좋다는 말인데 과연 행복의 열쇠를 성격이나 성품으로 생각하는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르지만 대개는 자신의 성격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믿는다. 살다보면 부부간이든 형제간이든 싸울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런데 한 순간 욱하고 터지는 감정이 문제인데 그 감정의 분출 속도를 늦추거나 억누르는 성격이라면 적어도 이혼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 같다. 자제력이나 인내심이란 것도 요즘 사회에 화두가 되고 있는 ‘배려’라는 말과 같다.



태현실의 출연 영화로 대박을 낸 화제작을 꼽는다면 <용서받기 싫다> <막내딸> <길잃은 철새> <황포돗대> <가짜여대생> <홍콩의 왼손잡이>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유현목 감독의 <잉여인간>, 이두용 감독의 <장남>, 임권택 감독의 <아내> 도 출연배우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특히 봉건적인 유교 가풍이 남아있던 남녀 불평등의 시대에 여자의 아픔을 고발적으로 풀어낸 통속 멜로들, 이를테면 여성관객들의 갈채를 받은 체루영화가 쏟아져 나올 때가 태현실의 영화 황금기였다.


1964년 남석훈과 공연한 이한욱 감독의 <새드무비>는 청춘영화란 새로운 물결에 불을 지폈고, 김수용 감독의 <길잃은 철새>에 출연한 1967년 무렵을 전후, 그녀의 공연 파트너는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 박노식 등 당대의 톱스타가 망라되어 있다.


영화에서 보여준 태현실의 개성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장르, 주인공의 성격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과 이미지를 창출했으나 대부분 너그럽고 부드러운 여자의 감성을 밀도있게 표현 한 점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여로>라는 한 편의 드라마를 빼고는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한민국을 뒤 흔들었던 드라마 <여로>. 그리고 그 이후 아직 언론에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납북 미수사건’의 비화를 태현실은 털어놓기 시작했다.


활동 후반기로 볼 수 있는 TV 출연시절의 화려함도 영화출연 때 못지않았다. 1968년 동갑내기 사업가 김철환씨와 결혼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3년만에 다시 시작한 연기활동을 TV로 돌린 것은 로케이션으로 이루어지는 영화 작업에 매달리기 어려운 주부로서의 제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신은 그녀를 다시 브라운관의 최고 연기자로 불러 세웠다. KBS-TV ‘실화극장’에서 신금단 역으로 눈길을 받기 시작해 1972년 드라마 사상 최장 인기 기록을 세운 ‘여로’에서 바보 영구역의 장욱제와 공연, 어질고 지혜로운 아내 분이 역으로 자그마치 211회를 계속하는 동안 전국 시청자들의 눈과 가슴을 감동으로 끌어 잡았다. 무너져가는 전통적인 여인의 미덕과 파란만장한 인고의 여인상을 흡인력 있고 정감어린 연기력으로 복원해 내면서 아직도 ‘여로’의 신화는 방송가의 여담으로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정말 ‘여로’가 진정한 국민드라마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들려달라.

요즘도 그 드라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내 연기 인생에서 인기가 폭탄같이 터진 사건이었다. 집나간 며느리가 그 드라마를 보고 돌아와 고맙다며 방송국에 찾아와 내손을 잡고 우는 할머니도 있었고, 공장 주인이 그 드라마 때문에 작업을 중단해 피해를 보며 산다든지, 가게주인이 이웃집에 있는 TV를 보러 갔다가 도둑을 맞았다는 따위의 항의도 있었다. 영화관도 그 시간대는 관객들에게 TV를 보여주고 영화를 상영할 정도였다. 몇년 전에도 <여로>가 뮤지컬로 만들어져 화제가 됐는데 그 때 2부에 출연했다. 전국 순회공연에서 모두 표가 매진됐고 드라마를 본 관객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많이 받았다.


영화 출연 시절에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많을 것 같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엄한 집안 분위기로 배우할 엄두를 못내다가 오빠뻘 되는 영화 촬영기사 태길성 씨의 권유로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지망하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역시 이형표 감독님의 <아름다운 수의>가 첫 작품이라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내 재산은 트렁크뿐’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는 배우가 된 걸 후회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들판에서 겨울비 장면을 찍는다고 컴프레셔를 돌려대는 통에 죽을 고생을 했다. 고문을 받는 것 같아 그만 두고 싶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나 위기의 순간들을 기억 한다면.
연기활동은 인기도 좋았지만 몸이 고달팠다. 힘들게 느낄 때 결혼했고 그 바쁜 스케쥴에서 해방되어 신혼시절을 보낼 때가 그래도 가장 행복했다. 역시 연기력을 평가받아 영화제나 방송행사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짜릿하게 보람을 느꼈다. 별로 큰 일 겪지 않고 굴곡없이 산 것도 언제나 행복을 느끼게 한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최은희 선배님이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북한에서 살다가 돌아왔지만 나도 그때 돌아가신 김희갑 선생님과 함께 세 사람이 홍콩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 선생님과 나는 일이 있어서 일주일후 2차로 가기로 하고 미루었는데 함께 갔다면 자칫 운명이 바뀔 뻔 했다.

최은희씨 납북당시 현장 기자로 일선에서 활동할 때인데 알려지지 않은 비화같다. 그럼 최여사에게 당시 홍콩 축제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 교섭을 해왔던 인물을 기억하는가?

이름이 중국계 왕동희로 기억된다. 명동에 있는 퍼시픽호텔에서 만나 점심 같이 먹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정보기관에서 알게되어 그 일로 김희갑 선생과 그 사건으로 신경 좀 써야했다.


회도 변하고 연예계도 많이 달라졌다. 연예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도 과거와 달라진 것이 많다. 선배의 눈으로 본 후배 연예인들의 요즘 달라진 모습은 어떤 것들인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시대인 것 같다. 또 돈에 너무 집착하는 풍조 같다. 의리와 정으로 통하던 과거 연예계 선후배의 인간관계로 지금을 보면 서운한 것도 많고 실망할 일도 많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연기수업을 제대로 받아 뛰어난 연기자가 많다는 점에서 좋은 변화도 따른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겸손하고 선후배간에 예절을 존중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연기자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아야 좋은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다.



요즘 만나는 친구들은?

함께 활동해온 최난경, 한길자, 윤길자 등 배우들이 많다. 최난경은 미국서 살다가 귀국했다. 정기적으로 김지미, 최지희, 엄앵란, 김혜정, 문희 씨등과 만나는 모임이 있으나 최근에는 시간을 못내고 있다. 김지미 씨는 미국에서 손주들 돌보느라고 귀국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준비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내마음의 고향인 영화계가 언제나 활기를 띄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연기자로 남을 수 있도록 마음에 맞는 작품이나 배역이 있다면 꾸준히 활동을 하겠다. 틈틈이 지금 하고 있는 사회활동을 하겠다.



태현실은 현재 연예인농촌돕기운동본부 부회장, 평화통일 상임위원, 새마을운동본부 자문위원, 국립발레단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다. 연기자가 되기전 여고시절까지 태현실의 이름은 태복실(太福實)이었다. 이름 뜻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이제껏 큰 복을 누리고 살아온 여배우 태현실과의 인터뷰는 시종 편안한 여유와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이나 함께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늘 ‘배려’의 미덕을 가식 없이 베푸는 것이 그녀의 삶이고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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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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