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곡의 등대지기 한명희 ‘비목’ 작사가(하)
우리가곡의 등대지기 한명희 ‘비목’ 작사가(하)
  • 김두호
  • 승인 20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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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결단으로 국내 최초 가곡의 밤 성공시킨 일 못잊어”

【인터뷰365 김두호】남양주시에 위치한 이미시문화서원에서 만난 한명희 <비목> 작사가와의 인터뷰는 곡 발표 당시를 회상하며 이어진다.

최초 ‘가곡의 밤’ 대박

한국 근대문학사를 쓴 재일 동포 학자가 6.25 전쟁을 묘사하고 나타낸 글 중에 <비목> 만큼 함축된 표현은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목>이 등장한 1960년대는 젊은이가 있는 곳마다 통기타를 치는 가수들에 의해 번안 포크나 외국에서 히트한 팝음악이 물결칠 때였습니다. 트로트도 아닌 가곡이 히트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시기였지요?
<비목>이 발표 초기에 이어서 1970년대로 넘어가 다시 바람을 일으킨 계기가 왔어요. 나는 1975년 방송국을 떠나 자유인으로 대학 강의를 다닐 때인데 한진희 장미희 씨가 주연으로 나온 TBC드라마 <결혼행진곡>에서 배경음악으로 <비목>이 소개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 모았어요.

가곡의 대형 홀 공연음악회도 그 무렵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음악 프로듀서로 있을 때 처음으로 우리 가곡의 밤 공연을 추진했어요. 물론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시민회관 홀에서 1969년 5월 12일 밤 7시에 막을 올렸습니다. 아, 감격적인 대박이 나왔어요. 회사에서 팝도 아니고 트로트도 아닌 가곡으로는 사업성이 없다고 결재를 해주지 않았어요. 관계 책임자들이 포기를 요구했어요. 나 혼자만 자신이 있었던 건데 결국 안 되면 사표를 내겠다고 서약하고 지원을 받아 사생결단으로 행사를 열었어요. 그게 인산인해로 터져 A석 500원, B석 300원의 좌석이 동나고 비싼 암표상까지 등장했어요. 여성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 온 거예요.

쾌재를 불렀겠군요.
아니에요. 회사에는 폼을 잡을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심신이 녹초가 되도록 정력을 탕진해 병이 났어요. 폐결핵으로 6개월간 치료를 받았어요. 내 젊은 날의 신화였고 오만이었지요.

방송국을 떠나 대학으로 가신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가요?
우리 음악의 이론을 전공한 사람이 많지 않아 방송국에 적을 두고부터 강릉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 강의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1985년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게 된 건데 국악은 여전히 서양음악에 안방을 내주어서 대학 교육에서도 뒷전에 밀려나 있는 경우가 많아요.

국립국악원 원장을 하셨으니 전공을 제대로 활용하실 기회였겠습니다.
교수로 있을 때 일종의 파견근무였지요. 그 때 내가 방송국 시절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알아둔 덕분에 국악방송국을 설립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어요. 창립 계획을 세우고 허가 절차를 밟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국회 등지의 나를 잘 아는 관계자들이 사심 없이 도와주었어요.


이미시문화서원 야외조각품 앞에서. 스스로를 “이삭 줍는 노인‘이라 표현한 한명희 작사가는 이미시문화서원을 통해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에 떨어져 있는 소중한 문화 이삭 줍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6.25 공원 조성이 꿈

대학(서울대 음대)에서는 국악을 전공하시고 박사학위는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받으셨지요?
박사에 이른 학문적 깊이로 보면 부족한 부문도 있겠지만 음악을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시각으로 들여다 본 계기였지요. 국악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느리다는 걸 주로 이유로 꼽아요. 왜 우리 조상은 느린 걸 좋아했을까, 중국이나 일본은 2박자 계통인데 왜 우린 3박자인가, 그런 걸 파고들다보니까 서양음악처럼 박동의 문제가 아니라 호흡의 문제가 대두되었어요. 또 우리 음악은 왜 유순하고 식물성 질감이냐, 서양음악은 왜 날카롭고 금속성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분석이 필요해요. 나는 사실 음대를 가기 전 문리대 철학과를 먼저 지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음악을 했지만 철학과 강의도 다녔으니 인생길 어느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접속 합류를 하게 된 겁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늘 강조를 해요. 국악을 전공한다고 국악만 보지 말고 문화 전체를 봐야한다고, 다양한 문화적인 안목을 가져야 국악도 발전한다고, 요즘 학문의 융합, 과학의 통섭을 주장하는데 그런 게 음악에도 필요해요.

후학들에게 심어준 의미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비롯한 문화, 학술 분야의 국제교류를 위해서도 꾸준히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음악사를 동북아문화권이나 동이민족문화권으로 확대해 국경없는 인류유동사(人類流動史)적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셨지요?
한국음악사나 한국사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실크로드로까지 이어져요. 옛날에 무슨 비자가 있었나요? 살기 좋은 곳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던 때를 생각하면 동북아지역을 공통문화권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신라 때 최치원의 행악잡영(鄕樂雜詠) 오수(五首)에 나오는 게 모두 실크로드에서 가져온 외래음악이에요.
1991년 모스크바작곡가연맹에서 한국 음악인들을 러시아로 초청했을 때 참가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던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 사는 고려인 작곡가 정추라는 분을 만났어요. 그 양반과 친분을 맺게 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 음악인과 교류를 시작 했어요. 실크로드에 인접한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국가들을 방문해 우리 음악인의 공연도 해주고 서울로 초청도 하며 20여년 꾸준히 민간차원의 교류를 해왔어요. 머물다가 헤어질 때면 그곳 동포들이 붙잡고 울어요. 그들의 눈빛은 순수하고 가식이 없어서 가슴이 뭉클해요.

2006년 몽골 초원에서 우리 국악 공연을 주관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으시지요?
중국에서 동북공정이라고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에 연관시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댈 무렵에 몽골공연을 했어요. 넓은 초원에 가서 동이(東夷)의 기상과 기질을 보여주자, 삼국시대 전 부여의 영고(迎鼓)에서 제목을 가져와 ‘초원의 영고대회’라는 이름으로 문화사절단을 인솔해 울란바토르 부근 초원, 국립공원, 오페라극장에서 우리 단원들이 국악공연을 했어요.

지금 하시는 일, 가장 바라는 일은 무엇인가요?
비목마을 사람들의 소망이 6.25문화단지를 조성하는 것인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 힘든 사업이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하는 사업이지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희생된 용사들이지만 그들의 정신과 추모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국립묘지 비석밖에 없어요.

이미시문화서원은 땅이 꽤 넓어 보입니다.
산골 땅을 재산 가치로 따지지 않던 시절인 1974년에 2000여㎡의 땅을 3.3㎡당 1500원에 주고 샀지요. 그러다가 서울서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빚 갚고 정리해 남은 돈에 다시 은행 빚을 얻어 3000여㎡를 더 장만했는데 가까운 와부읍이 도시로 발전해 깊은 산골을 면한 곳이 됐어요.

고향은 충청도이시지요?
지금은 충주시가 된 증원군 주덕면 창전리라는 농촌인데 내가 어릴 때인 해방 전후는 춘궁기가 있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지요. 쌀밥 제대로 먹고 사는 집이 한 마을에 한두 집도 드물 때 홀어머니 슬하에서 소년기를 보냈지요. 선친은 지금의 필리핀 지역을 뜻하는 남양군도 일제 징용을 겪고 돌아오셔서 내가 여섯 살 때 별세하셨으니 얼굴 모습도 떠오르지 않아요.


비목사람들 회원인 시인 공혜경씨와 함께.

그래도 무지개를 따라가야

살아온 길, 돌아보시면 생각나는 일들이 많으시지요?
칼부세(독일 시인)의 시(詩)에 무지개 쫒는 소년을 소재로 한 시가 있어요. 무지개를 따라 저 산만 넘어가면 잡힐 것 같은 무지개, 거기 가면 없단 말이지. 결국 가시덤불에 찔리고 무지개를 잡지 못하기도 해요. 그래도 나는 남이 안하는 일, 안가는 곳을 찾아서 열심히 무지개를 잡으려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간혹 지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스스로의 반문에 나는 이삭 줍는 노인이구나 하는 답을 내려요. 가을 설거지가 끝났지만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떨어져 있는 소중한 문화의 이삭을 줍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그런 가운데 나이 들면 주로 지나간 과거 일들이 많이 생각나지요.

주로 어떤 일, 어떤 사람들이 떠오릅니까?
간혹 생각나는 과거사로 혼자 웃을 때가 있어요. 하나는 대학시절에 내가 일으킨 해프닝인데 음대에는 클래식 악기 외에는 악기 취급을 안 하고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불문율로 여길 때 내가 아르바이트로 구입한 아코디언을 메고 들어갔어요. 그것도 고명한 피아니스트인 정진우 교수의 연구실 문 앞에 있는 연습실에서 연주를 한 겁니다. 퇴교 처분을 당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어요. 서양음악에 대한 일종의 반감을 드러낸 행위인데 아마도 청년기는 음대학생회장에 총학생회 부회장도 하며 뭐 좀 의식이 강한 면이 나에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처벌을 받았습니까?
그냥 연습실에서 밖으로 쫓겨나기만 했어요. 그리고 대학시절에 정말 한눈에 반한 여학생이 있었어요. 피아노를 전공한 학생인데 입학 시험장에서 처음 발견하고 제발 저 학생도 합격하기를 마음으로 빌었지요. 그런데 입학식 날 보니 그 학생이 입학을 했어요. 그때부터 좋아해 나중에 동료 학생과 교수들까지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챌 정도로 소문이 났어요. 친구들이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를 소개해 주어도 일편단심 4년간 그녀만 좋아했지만 한 번도 손목 한번 못 잡고 말 그대로 짝사랑으로 끝났지요. 얼굴이 미녀는 아니지만 맏며느리감 같이 복스럽고 포근해 보이는 모습이 좋았던 거 같아요.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해도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든지 몸이 닿으면 타락했다고 생각하던 시대의 청순한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지요. 하하하.

대학을 떠나셨지만 전통 음악을 전공한 문화예술 분야의 원로로 후학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지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강단에서 살아온 나는 나이 50대 후반에 이르러 알량한 지식 가지고 강단에 선다는 게 부끄럽다고 느꼈어요. 교육이라는 거 정말 숭고하고 어려운 겁니다. 문화예술 교육이 실기, 실용 위주로 가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우선 이공계든 인문계든 교육은 사람교육을 기본바탕으로 삼아야 해요. 특히 국악계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시적인 안목도 필요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 국악도 나라 안에서 안주하지 말고 국경 개념 없이 교류하고 발전시켜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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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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