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은 어머니의 기도와 아내의 사랑이 원천 (하)
나의 행복은 어머니의 기도와 아내의 사랑이 원천 (하)
  • 김두호
  • 승인 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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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머슴에서 호방한 임금님까지 사극영화 휩쓸어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투박한 머슴에서 호방한 임금님까지”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신데, 고향은 언제 떠나셨어요?

평산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친께서 별세하시고 이듬해 삼남매 자식들의 교육문제와 장래를 걱정하신 어머니의 결정으로 서울로 이주해 서울 동대문에 있던 흥인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고향에서는 내가 다닌 한포초등학교를 아버지가 세웠고 부농으로 넉넉하게 살아 서울로 온 뒤에도 고향에서 식량을 가져왔으나 3.8선이 막아서면서 서울에서의 성장기는 어려운 환경에서 보냈어요.


서울서 맞이한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가장이셨군요.

어머님 묘비에 당당하게 장한 어머니셨다고 새겼어요. 30대 초반에 아버지와 사별하시고 서울에서 어린 세 남매 키우시며 공부시키려고 쌀장수 떡장수도 하시고 생활력이 강인하셨어요. 그리고 기도로 사셨지요. 병상에서도 헌금할 돈을 준비해 문병 온 목사에게 바치는 신심이 깊은 분이었어요. 내가 어릴 때 서울에서 고향으로 쌀 가지러 가시는 어머님의 손목을 잡고 38선을 넘어 황해도 평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그렇게 가족을 뒷바라지하셨지요.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한동안 치과 닥터를 하셨지만, 청소년기부터 배우활동을 하셨으니 의사 직업을 버리고 연기를 다시 시작해 영화배우가 된 일도 엉뚱하다기보다 당연하게 볼 수 있군요.

아내는 결혼 때 이야기가 나오면 치과의사라서 결혼했지 배우였다면 안했을 거라는 얘기를 먼저 말합니다. 군의관 시절에 이화여대 정외과 3학년생으로 만난 집사람은 큰 욕심 없이 조용한 가정의 아내로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나의 첫 영화작품 <과부>를 보고 난 다음부터 내가 천부적인 연기재능을 가졌다고 인정하며 더 이상 배우의 길을 막지 않고 오히려 남편의 연기활동을 뒷바라지했어요. 매니저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아내가 작품 계약이나 스케줄 관리를 도왔지요. 남편이 선택한 배우의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해 밀어주는 일을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하하하.


두 분의 러브스토리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고 인연이 되셨어요?

무용을 하는 처 조카 아이가 명동 국립극장에서 무용을 하게 됐는데 내가 분장 일을 도와주게 되어 인연이 됐어요. 난 연극을 해서 분장을 할 줄 아는데 내가 군의관 시절 아는 사람이 부탁을 해온 거였지요. 그곳에서 만난 아내와 교제를 하면서 어머니께 인사를 시켰더니 첫눈에 며느리 감으로 맘에 쏙 드신다며 적극적으로 혼사를 서두셨지요.



1960년 데뷔 초기부터 호쾌하고 선이 굵은 연기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과부>출연 이듬해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영화 황금기인 1970년대 말까지 294편의 작품을 남기셨고, 데뷔 이듬해에만 연간 30여 편에 출연한 연보를 보면 도대체 그 시대 인기배우의 활약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상상이 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겹치기, 한해에 그 많은 작품을 감당하셨어요?

한창 바쁠 때는 아침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촬영장을 옮겨 다니며 하루 4∼5편을 찍어요. 잠 잘 시간 때문에 스케줄을 잡는 제작부장들과 아내가 대립하는 일도 많았어요. 촬영장도 지금처럼 정돈된 세트시설과 현대적인 소도구도 없고 특수촬영 기술도 부족해 배우가 몸을 던져서 연기를 해야 했어요. 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는 위험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옛날 배우 선배들의 고생담은 지금 배우들이 믿지 못할 정도로 모험담이 많아요.


연기 현장에서 겪은 실제 사례를 좀 들려주시지요.

죽음도 두려워 않는 연기를 해야 좋은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였고 나도 연기를 하다가 죽는 것을 영예롭다는 각오로 몸을 아끼지 않았어요. <5인의 해병>에서 땅 먼지를 일으키는 총격 장면은 저격수들의 실탄으로 연출한 실제 사격 장면들입니다. 총알이 땅에 박히지 않고 돌에 튀어 배우가 다칠 수 있었지요. <빨간마후라>에서 총알을 맞고 박살나는 조종석 유리창 앞에서 액션연기를 할 때도 죽는 연기였지만 진짜 죽는 줄 알고 눈앞이 앗질 했어요. 명사수를 불러다가 내 등 뒤에서 유리를 향해 진짜 소총을 쐈거든요.


초기에는 사극영화에 출연을 많이 하셨지요?

<연산군>이후 내가 출연해야 흥행이 된다면서 사극영화 캐스팅 1순위의 배우가 됐던 것 같아요. 때문에 말 타는 연기를 많이 했지요. 그런데 승마용이 없어서 미친 듯이 질주만 하던 경마용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낙마 위기를 많이 넘겼는데 그 무렵 낙마 사고로 다친 배우나 단역 연기자들이 수없이 많았어요.


경마용 말 타고 어떤 일을 당하셨어요?

어느 날은 경복궁 촬영장에서 내가 올라탄 말이 순식간에 말 몸뚱이만 빠져나갈 수 있는 작은 문간으로 질주해 고개를 숙이는 동작이 단 1초만 늦었어도 머리가 온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말 때문에 생긴 사고도 많았지만 김승호 선배와 공연한 <나그네>라는 영화의 팔당호 촬영 때는 추운 겨울이라 물에 빠지는 연기를 하면서 비닐을 감고 뛰어들었다가 몸을 움직이지 못해 죽을 뻔했어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품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는 소품용 총으로 엑스트라 배우의 머리를 쏘는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데 방아쇠를 당기기전 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테스트로 두꺼운 골판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 봤어요. 한데 퍽하고 구멍이 뚫려 깜짝 놀랐어요. 소도구도 그렇게 위험하고 엉성한 것들이 많았어요.



위험한 연기를 보여줄 때는 전문 스턴트맨들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모든 것을 실제처럼 만들어내는 디지털시대로 발전했습니다. 요즘 영화를 보실 때 어떤 느낌이 드세요?

내가 출연한 <연산군>이 컬러 시네마스코프시대를 연 첫 작품이었고 본격적인 스펙터클로 등장한 <빨간마후라>도 신상옥 감독이 그 시대의 특수촬영 기법을 많이 동원해 영화의 수준을 높이고 발전시킨 획기적인 작품이었어요. 그럼에도 최근 <해운대>나 <아바타>를 보면 나의 배우시절 영화 기술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전설 같이 느껴집니다.


1960년대 주연배우 최고 스타의 출연료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집 한 채 4, 5백만 원쯤 할 때 편당 70만 원 정도니까 물가를 감안해도 지금 배우들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지만 당시는 영화배우가 아주 거액의 고소득자로 분류되었어요.


<마부> <상록수> <5인의 해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한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잉여인간> <남과 북> <갯마을> 등 출연 작품 중에는 연로한 영화팬들에게 잊을 수 없고 영화사에서도 빛을 남긴 화제작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연기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사신다면서요?

영화는 내 인생의 영원한 고향 같은 곳인데 잊을 수 없지요. 지금도 누가 물으면 나는 헤밍웨이 원작의 <노인과 바다>에서 젊은 시절 내가 닮고 싶고 동경했던 배우 스펜스 트레이시 같은 연기와 배역을 꼭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배우의 연기에도 철학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런 배역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 시나리오 한편을 후배 연기자를 통해 건네받아 읽고 있어요. 노부부의 마지막 생애를 소재로 한 멜로물인데 과연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구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하하.


인기 스타로 드물게 염문이 없었던 배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홍콩 여배우가 짝사랑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로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지요?

나중에 오해가 풀렸지만 누명을 쓰고 고생을 했지요. 내가 세 번째 대종상 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달기>라는 작품이 홍콩과 합작한 작품인데 그 영화에서 홍콩의 최고 미녀배우 린따이와 공연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촬영이 끝나고 얼마 후 자살한 것을 두고 이면에 상대역인 나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추측기사가 터진 거죠. 나중에 자신의 가정불화를 비관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오해를 샀어요. 촬영기간 아내가 곁에서 뒷바라지해 나보다 우리 집사람과 친하게 지내 그녀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지요.



그때도 인기 배우는 열성 팬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았을 테지요?

우리 가족들이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에 밤잠을 설친 경우가 많았지요. 아내에게 노골적으로 왜 당신 혼자 차지하고 사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나타나는 등 별난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 아내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 때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뜻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세 차례 연임을 하는 동안 회원들의 권익과 발전을 위한 일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뜻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생각보다 먼저 지역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은 당시 여권 고위층의 반 강제 요청을 받아 준비도 없이 갑자기 뛰어들어 고생했어요. 적은 표 차이였지만 낙선으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있었으나 예총회장에 대한 정치권의 배려로 15, 16대 국회에서 활동하게 됐지요.


의원으로 활동 중 폭로성 질의나 한건주의식 돌출행동을 하지 않고 다양한 설문조사와 분석, 사례를 통한 정책을 제시하고 지적해 품격 있는 정치인으로 국회안팎에서 호감을 많이 샀던 것으로 압니다. 부자로 인색하다는 소문은 나 있지만 평소 인품도 겸손하고 남의 험담을 절대로 하지 않는 인격이 존경을 받습니다. 남다른 인생관을 듣고 싶군요.

말이 많고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는 것을 늘 경계하며 살아왔어요. 연기를 할 때는 큰소리를 내며 했지만 평소 내가 사는 방식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해요. 실제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못하고 꾸며내지를 못해 지금 나이에도 쑥스러워 하고 수줍음을 타요. 또 돈을 별로 낭비하지 않고 사는 검소한 편의 생활이 부자답지 않고 인색해 보이나 봐요.


‘배우 신영균’은 끼가 넘치고 투박하거나 동물적으로 광포한 면을 주로 드러냈지만 ‘인간 신영균’은 전혀 반대쪽의 조용한 성품을 가진 것 같아 대조적이고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배우는 감독들이 끌어내고 만들어내는 다양한 작품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요? 주로 억센 남자역을 맡다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한번> 같은 멜로 작품에서는 순정적이고 마음이 약한 남자로 변신한 적도 있어요.


명보극장도 아끼는 재산이셨지만 함께 기부하신 제주 신영영화박물관도 오랜 세월을 두고 100억원이 넘는 재산을 투자해 집을 짓고 영화 기념 사료를 모으셨다는데 간혹 아깝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1967년 영화 <마적>의 제주도 촬영 길에 발견한 곳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노후에 아내와 와서 살 거라고 생각하며 마련한 곳인데 박물관을 세워 놓고 보니 그런 것은 젊을 때의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나 혼자 소유하고 즐기는 것보다 나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소유하고 즐기는 것이 더 뜻이 있고 기쁜 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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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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