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전각 애니메이션’ 창시자 고암 정병례
세계 최초의 ‘전각 애니메이션’ 창시자 고암 정병례
  • 김재원
  • 승인 201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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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국 소재를 21세기 디지털에 담는 ‘새김미술’의 충격 / 김재원

 

 

 

 

【인터뷰365 김재원】 인터뷰 중에도 그는 예고 없이 작품으로 돌아가 돌에 칼을 꽂고 새김작업에 열중하곤 했다. 고암 정병례 화백(67). 그는 ‘전각’을 ‘새김아트’라 작명하는가 하면 전각을 애니메이션화하여 또 하나의 미술 장르로 구축하고 있다. 전세계에 ‘전각애니메이션’이라 하면 현재 그가 유일최초의 예술가로 꼽히고 있다. 그는 돌에 그림을 새기고 있으면서도 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돌이 아니라 가슴에 새긴다’고 그가 말했을 때 듣는 가슴이 알알해졌다. 고암과의 인터뷰는, 1차 인터뷰 며칠 후로 약속된 2차 인터뷰를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여름에서 가을로 늦춰졌다. 그러나 그를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최초의 전각 애니메이션 작가라는 점에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화풍이 전각의 민속성을 서양화적이고 가장 21세기적인 새로운 추상성의 그릇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이 분야의 국가 브랜드로서 세계에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인터뷰어의 강박관념도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가 2차 인터뷰를 거절한 ‘사연’ 역시 다분히 ‘예술적’, 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그 점은 이 기사의 ‘하편’에서 밝히기로 하고 우선 돌가루 풀풀 날리는 아트리에에서 흰머리와 긴 수염으로 특징 지워진 고암과 마주 앉는다.

 

 

지난 9월 10일 오후 5시 MBC가 생방송 한 ‘서울 드라마 어워즈’ 시상식을 보니까 거기 참석한 세계적인 ‘꽃미남’ ‘여스타’보다 더 눈을 끈 것이, 정화백의 전각으로 도배하다시피한 배경이며 무대 바닥이었습니다. 전각이 어떻게 TV 프로에 그처럼 대규모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 드라마 어워즈’는 43개국에서 172편의 드라마가 출품되었고 한ㆍ중ㆍ일을 비롯 영국 캐나다 이태리 등의 심사위원이 참석하였으며 전세계에 생중계된 바 있는 국제규모의 드라마 페스티벌이다. 그 날 그는 전각작품으로 시상식장 전체를 뒤덮었을 뿐 아니라 그 행사의 예술감독으로 참석하여 작품상에 대한 시상도 맡았다.)

영문이랄 게 뭐 있나요? 예술감독으로서 작품 의뢰를 받고 열심히 작업한 것 외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다만 제가 제작한 전각이 세계적인 심사위원들이 심사하는 공중파의 2시간짜리 생방송 프로를 완전히 커버하게 될 만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그동안에 인정 못 받았다는 것이 한스러웠다기보다는, 이제부터라도 과거의 것을 새로운 21세기라는 그릇에 담은 작품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전각(篆刻)이라면 대개는 도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정병례 화백도 “나는 도장장이었다”라고 토로하면서 도장으로 시작하여 40여년이 흘렀다. 지난 98년 6월에 그가 전각 애니메이션 전시회를 가졌을 때 그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한 ’전각애니메이션 작가’로 등극했다. 그 전시회 이후 전각에 대해 알고 싶다고 외국에서 하도 많이 문의도 오고 찾아오기도 해서 일일이 대꾸하기가 힘들어 홈페이지(www.saeghimart.com)를 만들어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외롭고 힘든 작업을 40여년이나 이어왔다. 이제 전각애니메이션 작가로 인정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정부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미술 저작권 보호나 세계 특허 문제, 특히 전각애니메이션의 해외 수출 등에 대해서 제도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의견을 이 정부는 어떻게 받아들이려는지...

 

 

 

 

서양에도 전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전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한자(漢子)나 한글 같은 글자였지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작품에는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또 글자이긴 한데 추상화되고 있는 점도 특이하고요. 우선 그 부분부터 설명을 좀...

서양 쪽에는 전각이 없었습니다. 전각은 중국에서 시작되었고요. 그러니까 그림은 서구에 밀렸지만 전각은 서양보다 앞서 있다, 정도가 아니라 서양엔 아예 없었죠. 물론 이집트의 상형문자 같은 것을 서양의 전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전각은 글자다”라는 것은 전각에 대한 고정관념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전각은 구상(具象) 뿐 아니라 추상도 얼마든지 가능한 분야입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 자체가 추상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고 회화적 성격도 있거든요. 그림에서 문자가 나왔고, 글자 위주의 전각도 사실은 추상을 배경에 깔고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글씨 자체가 그림이란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의 형상에서 나무목(木)자가 나왔다든가...

 

그럼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전각이라는 호칭 자체에서 오는 느낌이나 그동안의 관념이 한국적, 내지는 동양적이었는데 정 화백 작품에서는 오히려 서구적이고, 특히 피카소의 기하학적인 구도 같은 것까지도 느껴지는데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추상이라면 인물 동물 정물 등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추상적 관념적으로 그린 것이 추상입니다. 글자와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글자는 원래 표의(表意)문자였습니다. 모든 문자의 시작은 표의였다가 소리글로 변하며 표음문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 아닙니까? 한국적인 것을 모티브로 작품을 한다고 해서 표현 자체도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옛것을 옛것과 똑같이 그대로 재생시킨다면 그건 장인(匠人)이 할 일이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옛것에 익숙해지되 새롭게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야 말로 한국적인 것을 21세기의 세계적인 것으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우리나라 미술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문사철(文思哲)의 내공이 있어야 과거를 소재로 미래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이 나온다고 봅니다. 단순한 것을 뛰어넘어야 되죠.

 

과거를 재현하느냐 아니면 과거를 소재로 표현을 바꾸느냐의 문제가 되겠는데요, 전각이다 하면 누구나 과거를 생각하기 마련 아닙니까? 또 선생님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곤 하는 삼족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역시 과거 역사 속의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끌어다가 현재를 건너 뛰어 미래로 간다면 글쎄요... 전위예술이라 보아야 되나요? 또는 전각, 아니 지칭하신대로 새김아트는 그럼 전위예술이 되는 건가요?

새김아트가 전위는 아닙니다. 구태여 말하라면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징검다리라고는 부를 수 있겠죠. 현대미술이라 해서 과거를 버리고 그 반대편만 보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현대냐 아니냐, 또는 좌냐 우냐라고 하겠죠. 인류사가 걸어온 철학적 내공을 21세기의 디지털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을 가지고 저는 새김아트라 부르고 있거든요. 토기는 흙그릇이고 청동기는 놋그릇인데, 담는 그릇은 변해도 예술의 본령이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을 어떻게 끄집어내느냐가 현대미술입니다. 우주속의 새 질서를 발견하는 거죠.

 

그동안 작업해 오신 전각 작품이나 전각애니메이션을, 종래의 전각을 생각하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전각은 전각일 뿐이다, 라는 주장도 우리나라 미술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과거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작품 공모전이던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전각은 하나의 장르로 보지 않고 서예 부문에 포함시켰었는데 그렇다면 전각이 서예에 포함되어야 할 분야, 또는 서예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은데요.
물론 전각이 서예의 한 종류임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일부 화가나 서예가들이 전각을 그림이나 서예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각은 나름대로의 분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지 그림이나 서예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 또 그림이나 서예가 전각의 상위 개념도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전각이나 서예나 그림은 어느 것이 상위이고 하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분야로 보아야 합니다. 또 과거의 것이라 해서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온당치 않습니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입니다. 미래를 보려면 거울을 보면 됩니다. 거울은 과거입니다. 그 속에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작품의 창출은 과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문사철의 뚜렷한 내공이 바탕이 되어야 옛것을 가지고도 자기 시대를 표현하는 창조적 예술이 가능한 거죠. 단순한 것을 뛰어넘는 창조라야 예술입니다.

 

 

전라남도 나주가 고향인 고암은 앞에는 영산강이 버텨주고 뒤로는 월출산이 버텨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를 버텨주는 것은 가난인지도 모른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고 지금도 가난하다”, 라고 말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 만큼 가난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아니 가난이 그를 지켜주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굵직굵직한 그의 수상경력을 보면1992년에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1993년에 동아미술제에서 특선, 그 외 대한민국서예대전, 서울서예대전 등의 초대작가, 많은 공모전 심사위원이나 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30여회의 개인전이 있었고 고암전각예술원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2년에 한 번씩 제자들이 주축이 된 고우회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초·중·고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돼 있다. ‘삶, 아름다운 얼굴’, ‘마음새김’ 등의 저서도 있지만 작품이나 경력에 비해 외롭고 가난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학연 혈연 지연 등 우리나라 사회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어떤 백그라운드도 그에게는 없다. 그런 것 없이 혼자의 능력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흔히 “가난이 자랑은 아니지만 죄 될 것은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고암 선생께서도 본격적인 전각 예술가가 되기 이전에, 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셨다고 듣고 있는데요,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지만 결국 전각예술가가 된 것은 지금 하시는 일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운명적으로 예술가가 되었다고 말해야 옳을까요?

글쎄 뭐 운명까지 거론할 것까지는 없다 치고.(웃음) 사실은 몇 가지 일을 해보긴 했어요. 공장에도 다녔고 섬유회사에서 재단사 노릇도 해보았습니다. 20대 중반에 미술에 대한 기초 공부도 전혀 없이 섬유공장에서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그 때 스승을 잘 만나 제대로 했으면 패션디자이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27살 때인가 도장을 파기 시작했어요. 섬유공장 다니는 것보다 수입이 낫다고 해서. 그 때 좀 날렸습니다.

 

도장장이로요? 아니면 전각 작가로요?

(웃음) 글쎄 뭘로 날렸는지는 몰라도 꽤 열심히 했거든요. 다른 사람이 도저히 못 파는 도장을 파보자, 남들은 그냥 도장을 파는데 나는 아예 마음먹고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달려들었더니 좀 알아주더라고요(웃음). 36살에 결혼할 때까지 한 10여년 도장을 파면서 예술연습을 했다고 봐야 되겠죠. 제대로 작품 한다고 나서지는 못하고 다만 평생을 통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추구해오긴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마음먹고 전각이란 길을 택했습니다. 어려운 길이란 걸 알고 택했죠. 화가들 보다 살기 어렵고 인정받기도 힘들다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진 않았죠. 독학 중에도 어려운 독학을 했으니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미술대학 다니고 그랬다면 지금 같은 작품은 안 나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백지였기에 좋은 작품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요. 또 가난한 예술가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작품을 못한다는 속설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돈 있으면 작품 안한다는 소리는 농담 같아요. 예를 들면 20세기 성악가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유명하기 전에도 그랬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뒤에도 하루 6시간씩 노래했지 않습니까? 여건이 좋아지고 무대가 커지니 더욱 좋은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술가는 파트롱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는 아시죠? 사실 예술가가 좋은 파트롱을 만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겪은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의 파트롱으로 나서겠다는 사람이 예술가를 순전히 이용만 하더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누가 마음먹고 이용하러 덤빈다면 예술가란 사람들은 순진하니까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가수가 될까 생각하셨다는데 정말입니까? 가요계에서 끈질긴 스카웃 제의를 받으셨다는데 정말 노래 잘 하시는 거예요? 어느 정도 잘 하셨는데요? 솔직히 한 번 털어놓으시죠. (웃음)

아 그러니까 노래깨나 흉내 내고 그랬다, 라고 할 정도가 아니라 가수로 데뷔하라는 권유를 끈질기게 받을 정도였어요. 지금의 R&B를 그때부터 잘 부르고 소화할 수 있었고요. 소프라노 가수들의 노래를 잘 불렀어요. 높은 음의 가성이 아주 잘됐거든요. 요들송도 잘 되고요. 그러나 목소리 좋다고 다 가수 되는 것은 아니고 내공 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사실은 악기도 잘 만지고 작곡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여건이 안돼서 음악은 포기하고 말았죠.

 

결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 전각예술가가 되신 건데 완전히 전각 쪽으로 돌아서실 때까지 고민이나 망설임 같은 것도 많으셨을텐데요.

글쎄요. 여럿 중에서 취사선택 했다고나 할까요. 사실은 제가 간추리고 정리하는 걸 잘합니다. 그래서 잘 취사선택한 거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가수가 되거나 화가가 되는 것도 끼가 있어야 되는 일이지만, 내가 타고 난 모든 끼와 역량을 다 퍼부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전각이다, 라는 확신이 선 다음에는 더 이상 고민이나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그야 말로 몰두하기 시작한 거죠. 이 길이 내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왔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전각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교수들에게서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인터뷰를 하고 2차 인터뷰를 약속했던 고암 정병례 화백이 갑자기 2차 인터뷰를 거절해왔다. 그리고 그 무렵 세상을 시끄럽게 한 국새제작단의 민홍규 사건이 터졌고 뜻밖에 정병례 화백이 당초 국새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인터뷰어의 안테나에 잡히면서... 그러나 가을에 다시 만난 고암은 국새제작단 문제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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