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 소년에서 청와대 화가 된 정형모 화백
나무꾼 소년에서 청와대 화가 된 정형모 화백
  • 김두호
  • 승인 201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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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담뱃불 붙여준 인물화의 대가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원로 서양화가 정형모 화백(74)은 35년 전인 1975년 8월 어느 날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요청을 받았다. 장발이면 머리를 짧게 깎고 오기를 바란다면서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만나고 싶은 날짜와 약속 시간을 정해 일방적으로 통고를 해온 것이다.

정 화백이 약속된 날 서울 대방동의 장관 자택에 도착하자 윤 장관은 대기하고 있던 낡은 피아트 승용차에 정 화백을 태웠다. 운전기사는 말없이 차를 몰고 청사를 빠져 나갔다. 장관 차는 경복궁을 돌아 청와대로 달렸고 경호실도 미리 연락을 받은 듯, 검문을 하지 않고 정문을 통과시켰다. 정 화백은 청와대 본관 앞에 도착해서도 그곳에서 오르지 자신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로 윤 장관과 함께 들어선 것은 정확히 1975년 8월 28일 12시였다. 박 대통령은 50여 평쯤 되어 보이는 집무실에서 큰 영애(박근혜)와 먼지 묻은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박 대통령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 정 화백은 온몸이 경직되는 위압감에서 먼저 인사말도 못하고 어리벙벙하게 서 있었다. 윤 장관이 정형모 화백이라고 소개를 하자 악수를 청하며 “청와대에 정 화백 그림이 제일 많이 걸려 있어요”라고 따뜻한 목소리로 환대를 해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박 대통령은 응접의자로 안내를 한 뒤 곧 담배를 끄집어내 정 화백에게 권하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었다. 정 화백은 그 때 대통령 앞에서 혼자 담배를 피웠던 것에 대해 무척 송구스러웠다고 회고 했다.


이 날 오찬을 나누며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한 해 전 사별한 부인 육영수 여사의 인물화를 의뢰받았던 정형모 화백은 일생을 인물화에 전념해온 인물화의 대가이다. 박 대통령의 국장(國葬) 때는 150호 크기의 영정을 문공부의 의뢰로 그렸고, 뒤에 전두환 김대중 대통령의 초상화도 청와대의 요청으로 두 사람의 대통령 임기 말에 제작했다. 그의 명성이 해외로 알려져 리비아 정부의 주문으로 카다피 국가원수의 일대기 100여점을 제작했고, 미국의 카터와 클린턴, 부시 대통령, 오만과 브루네이 국왕의 초상화도 그렸다.


사실상 대통령부부의 초상화를 전담한 최초의 청와대 전속 화가인 정형모 화백은 ‘나무꾼 소년’의 성장 실화를 간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나무를 채취해 수원 장터에 나무땔감을 지게로 내다 팔던 소년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꿈 많고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소년이었고 벨라스케스, 고야와 같은 궁중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자라서 인물화와 기록화 분야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로 입지를 세우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인물화를 가장 많이 그렸고 그들의 특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박 대통령과는 그림을 통해 인연이 깊었지만 육 여사는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정 화백은 실제 만난 사람보다 더 잊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연(緣)을 간직하고 있다. 육 여사의 인물화를 제작하며 세 차례나 육 여사를 만나는 연속성 꿈을 꾼 일이 있었고 그 꿈이 다가올 현실을 예시해주었다는 일화를 전설처럼 간직하고 있다.

성장과정이 기구했던 조선말기의 화가 오원 장승업보다 더 사연이 많다는 정형모 화백을 만났다. 그는 지금도 신촌에 있는 화실에서 경제인이 주문해온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2010년 8월 15일이 고 육영수 여사 36주기입니다. 1975년 8월 28일이면 1주기에서 보름쯤 지난 시기인데 그날 박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회고해주시지요.

윤 장관이 내가 그려야 할 육영수 여사의 어린이회관 벽화 그림 크기를 대통령께 말씀드리자 너무 크게 하지 말고 재료도 외국제를 쓰지 말고 우리 것을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최종 결정은 나에게 일임을 하셨어요. 식당에 들어서자 박 대통령의 자리 맞은편에 내가 그린 환한 미소의 육 여사 인물화가 걸려 있더군요.

박 대통령이 민족 기록화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을 때 나도 박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기록을 그리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박 대통령은 직접 2층 서재로 올라가 앨범 두 권을 가져와 나에게 좋은 사진 있으면 그림 소재로 선택하도록 배려했어요. 점심 메뉴는 토스토 한쪽씩에 만두국과 반찬 세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때 만나 본 박 대통령의 인상을 어떻게 간직하고 계세요? 그날 식사만 대접 받은 것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근엄하고 인자한 아버님 같았습니다. 2시간 정도 함께 있는 동안 대통령을 모시고 가려는 사람이 두 차례 나타났지만 조금 기다리도록 미루며 초청 손님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식당을 나서면서 박 대통령은 “윤 장관 나 좀 봅시다”면서 집무실로 가셨는데 청와대를 나오는 차안에서 윤 장관이 봉투를 전해주더군요. 박 대통령이 “정 화백 사는 게 어떠냐”는 걱정을 하며 주시더라고 했어요.


박 대통령 부부의 인물화를 시작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을 것 같군요. 누가 처음 소개를 한 것인가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오랫동안 모셨던 오원철 경제수석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된 셈이지요. 그 분이 상공부차관 시절에 산업디자인의 효시인 디자인포장센터의 준공에 맞추어 새로운 목적에 참여할 미술인을 찾고 있을 때 미술협회가 나를 포함한 5명의 화가를 추천했어요. 오원철 차관이 작품을 보고 나를 선정했는데 그때 미술협회를 통해 을지로 양복점의 양복 한 벌의 맟춤 티켓을 전달받고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잣집이 아니면 전화도 없던 시절에 양복 한 벌은 대단한 선물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까?

그 후 오원철 차관이 제2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 대한석유공사 기록화 제작에 나를 추천했어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그림의 소재헌팅 작업을 위해 울산 공장으로 내려가면서 산업화의 경이로운 변화를 불러온 인물에 대한 흠모의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과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시인이던 석유공사 공보실장의 후한 대접과 안내를 받아가며 석유공사 기록화를 제작하는 동안 대통령 인물화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갖기 시작했었지요.


대한석유공사 기록화는 정부에서 의뢰한 작품인가요?

대한석유공사는 당시 걸프가 51%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였어요. 알고 보니 내가 그린 작품은 석유공사가 대통령에게 기증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을 의뢰한 것인데 펜으로 섬세하게 실물을 담아낸 극사실화인 내 그림을 본 석유공사의 외국인 사장이 한국에도 이런 화풍의 화가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극찬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박 대통령의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군요.

1972년 말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 8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 팸플릿에 소개된 박 대통령 내외분의 훈장을 착용한 정장 차림의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그 후 육 여사의 인물화를 제작하는 중에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1974년 8.15기념식장에서 육 여사가 흉탄을 맞아 숨을 거두던 시간에 서울의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변했는데 친구가 내가 육 여사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상황을 전화로 알려준 것이지요.


그 때 완성된 인물화는 청와대서 의뢰를 받은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내가 선택한 그림인데 40호 크기의 육 여사 초상화를 어느 날 아침 출근시간 전에 반포 주공아파트에 살던 오원철 수석비서관 댁에 전달하려 가지고 갔어요. 오 수석은 자신도 청와대에 있지만 각하를 아무 때나 만나지 못하는 입장이라며 난감해 하더군요. 나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그린 작품이라며 애써 전달했어요.

그런데 그 그림이 김종필 국무총리실로 전달이 됐던 것 같아요. 얼마 후 소공동에 있는 다방에서 누가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국회의원 한 분이 안내해 김 총리의 백씨인 김종갑 다코마 회장을 소개시켜주더군요. 그길로 그 분의 벤츠 승용차를 함께 타고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간 일도 있습니다.


겪은 이야기들이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곳에 가니 미술단체의 인사도 와 있었고 내가 그린 육 여사 인물화도 그곳에 있더군요. 잠시 후 나타난 김 총리는 봉황색 무늬의 붉은색 의상을 입은 육 여사의 모습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했고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79년 박 대통령의 국장(國葬) 때 영정도 제작하셨지요?

10. 26사건 다음날 오후 문공부의 방문 요청을 받고 들어가 국장(國葬)에 모실 영정 사진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지요. 그 순간 박 대통령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두려운 감정이 앞섰어요. 그러나 나는 직접 만났을 때 그분의 인간적이고 수줍은 듯 하면서 상대방의 가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그대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간 철야 작업을 하며 영정을 그리고 있을 때 김성진 장관이 찾아와 그러더군요.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 그림을 그리시더니 대통령의 마지막 그림도 그리게 되다니 대통령 내외분과 참 기막힌 인연이군요라고.

더욱 알 수 없는 그 분들과의 연(緣)은 꿈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내 인생을 통 털어 가장 충격적이고 불가사의한 사건이었지요.


불가사의한 그 꿈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예술하는 사람은 과학자와 닮은 데가 있어서 비현실적인 꿈 이야기나 미신 따위를 잘 안 믿어요. 나도 자의식이 강해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를 매우 불신하는 사람인데 내가 육 여사 인물화를 그리면서 매주 한차례씩 3주간 연속 육영수 여사를 꿈에서 만난 일이 있었지요. 그 꿈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던 일들이었어요.


점점 궁금합니다. 어떤 꿈인지.

내가 오랫동안 살던 집은 아현동 산마루에 있는 조그마한 2층집이었습니다. 1층은 살림집이고 2층을 화실로 사용했어요. 어느 날 꿈에 내가 육 여사의 그림을 그리다가 진전이 안 되어 울다가 집밖으로 나와 돌아다녔어요. 서울역 뒤 염천교다리까지 내려와 지나는데 노변의 장사꾼들 속에 육 여사가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어요. 그때 육 여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쉿하는 표정으로 말하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서 집에 가 있으면 꼭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해요.


그 꿈을 꾼 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일주일쯤 후 다시 꿈을 꿨는데 우리 집에 육 여사가 오셨어요. 꼭 생시처럼 느끼며 꾼 꿈인데 딸이 손님이 오셨다고 해서 나가보니 육 여사였어요. 오신다더니 진짜 오셨군요 하며 모시고 들어와 차 대접을 하려는데 경호원 두 명이 모시고 나가더군요. 그분은 꿈속에서나마 내가 표현하기 어려워 마음고생을 하던 인상의 표현부문을 느낌으로 전달하고 갔습니다.


세 번째 꿈은요?

청와대가 1년에 한번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행사가 있어서 가족과 벚꽃구경을 갔어요. 대통령도 면담하게 되어 있어서 줄을 서 있다가 시간이 6시 마감을 넘어 돌아서 나오는데 효자동쪽에서 육 여사가 소복을 입고 나타나요. 여기서 또 뵙게 되었다며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언젠가는 대통령을 보게 될 겁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허겁지겁 삼청동쪽으로 넘어가시더라고요. 깨어났어요.

그리고 10.26 일어나고 나는 실제 청와대 효자동쪽 분향소에 문상을 갔는데 6시 입장시간이 마감이 되어 돌아섰지만 곧 150호짜리 영정을 내가 그렸지요. 김성진 장관은 내가 윤주영 장관과 박 대통령을 뵈러 갔을 때 청와대 대변인으로 근무하며 만났고 평소 각하가 내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쉽게 실감할 수 없는 희한한 현몽이었군요. 아까 말씀하셨지만 육 여사의 모습을 그리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기도 하지만 붓을 들면 천의 얼굴을 가진 탤런트 같은 분으로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학처럼 목이 가늘고 길며 외모가 우아하게 보이지만 느낌을 나타내려고 보면 선이 굵고 강한 인상을 줍니다. 표현하기가 힘든 분입니다. 인물화는 단순히 많이 닮게 그렸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아닙니다. 실물에서 느끼는 감정과 특유의 인상을 아주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려내야 좋은 인물화가 됩니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 뿐만 아니라 다른 대통령과 외국의 국가원수, 경제인 등의 명사들 인물화 작품도 많이 그리셨지요?

청와대의 주문으로 전두환 김대중 대통령의 인물화도 퇴임을 앞두고 그렸지요. 리비아 카다피 국가원수의 인물화는 처음에 이집트의 낫세르 대통령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컬러로 바꾸어 주한 리비아대사관에 전달했는데 그 그림을 접한 리비아 정부가 100여점의 일대기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해 제작했었지요. 나는 평소 카다피의 전기를 읽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비아로 초청되어 환대를 받았던 것도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그림 값은 주문자의 요청으로 약속보다 낮은 액수를 우리 기업에서 대불해주더군요.

또 카터 미국 대통령부부와 클린턴 대통령의 인물화도 청와대를 통해 전달되어 외교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카터 대통령은 방한을 앞두고 한미관계에 미묘한 틈이 생겼을 때인데 박 대통령은 다른 그림을 준비했다가 내 그림으로 선물을 바꾸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만 카브스 국왕의 초상화는 오만 대사관의 요청으로, 브루네이 국왕은 국왕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경제인의 주문을 받아 제작했었지요.

대기업의 창업주인 삼성의 이병철, 한진의 조중훈, 코오롱의 이동찬 회장 등의 초상화와 이순신, 권율 장군 등 역사인물들의 영정도 많이 그렸습니다. 지금도 내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서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합니다. 또 동포3세인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 같은 분은 틈틈이 나를 초청해서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성장과정이 장승업 화가만큼이나 사연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 고백이지만 나를 잘 아는 친구는 내가 나뭇꾼 출신의 어진화가(御眞畵家)라고 합니다. 태어난 곳은 강릉이고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 효자동 전차종점에 있던 외가로 옮겨 청운초등학교를 1년쯤 다니던 때 외삼촌이 아버지가 산다는 수원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시내가 됐지만 수원도심에서 10리쯤 떨어진 이목동이라는 동네에 새엄마와 사는 아버지 집으로 갔지요. 그곳 학교를 다녔지만 가난해서 산에 나무를 해다 새벽장터에 내다 팔고 신문 배달도 하며 번 돈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 때 신문은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이 제일 잘 팔렸는데 내가 배달하던 신문을 10% 이상 확장했더니 지국장이 맛있는 점심을 사주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하나 두고두고 안 잊어지는 일이 있어요.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가는데 언제나 겁이 나요. 비가 쏟아지는 심야에 묘지 앞길을 걸어가는데 고급 승용차가 내 앞에서 멈추어요. 아무나 자가용을 탈 수 없을 때 그 아저씨는 생쥐처럼 비에 젖은 나를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너는 언젠가 훌륭한 인물로 성공한다‘며 이상한 확신을 던져주고 갔어요. 그 분의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지요. 잠시 지나쳐간 인연이지만 아주 강하게 찍혀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지요?

학생 시절 그림도 잘 그렸지만 서예도 잘하고 글도 잘 쓰며 전교 1등을 유지했어요. 초등학생 때 교장선생이 담임에게 그림을 계속시키도록 지시한 것을 들었습니다. 수원 파장초등학교 졸업 때는 가난해서 안양에 있는 삼막사 수학여행을 못 갔지만 구경 갔다 온 급우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행문 쓰기대회에 제출해 장원으로 뽑혔던 일이 있습니다. 하하하.

수원에서 통학으로 다닌 인창중고교 시절에는 국어선생인 황금찬 시인에게 반해 문학지망생의 꿈에 젖기도 했어요. 박목월 모윤숙 시인들의 시를 줄줄 암송하면서... 그러면서 수원에 있던 서울농대생들의 농촌 4H운동에 참가해 문맹퇴치 야학운동도 하고 연극 활동도 했는데 그 때 만난 동료 중에 한 명이 아내가 되었지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 어느 때입니까?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1950년대 말은 전시회장 같은 곳도 드물었고 그림을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대표적인 곳이라면 백화점이었지요. 어느 날 통학 기차역인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을 찾았다가 그곳 3층 미술품 코너에서 초상화를 접하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저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하는 감동을 받고 운영자인 일본 우에노 회화전문학교 출신의 김종래 선생에게 실습생이 되고 싶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곳은 미술공부를 제대로 한 화가 지망생들이 10대 1이 넘는 치열한 경쟁으로 들어가는 곳인 줄 몰랐지요. 신문배달 할 때 사귄 친구의 지원을 받아 좋은 재료로 촛불 밑에서 밤새도록 그린 테스트 작품을 들고 갔지만 거절 당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간청을 하다가 마침내 한 달간 잡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게 됐지요.


함께 활동한 화가는 어떤 분들입니까?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빨래터>의 화가인 박수근 씨도 동화백화점에 자주 찾아온 사람입니다. 키가 크고 착했지만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습니다. 사후에 명성을 남겼지만 꼭 밀레 같은 사람이었어요. 원석연, 박득순 박영선 문학진 등의 화가들이 활동했지요.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화풍이나 작품의 표현기법 등 특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내 그림을 내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은 오만이지요. 어느 집에 내가 그린 금붕어 그림을 보고 그 집 아이가 진짜인줄 알고 가정부에게 그 고기를 잡아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매우 현실적인 감각과 극사실적인 표현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사례지요.




끝으로 가족 분들을 소개해 주시지요.

조선조 중종 때 명제상이었던 정광필 선생의 15대 손이라는 걸 늘 자랑으로 생각해요. 정인보 초대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도 집안 어른입니다. 6년 전 고인이 된 아내(박연희)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아내의 사랑과 헌신으로 지금의 나와 내 자식들이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맏딸 정진원 (51)은 헝가리 엘테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맏아들 정진철(50)은 시인, 차녀 정진미(48)는 서양화가, 삼녀 정진영(46)은 대치동 조이매쓰센터 원장, 차남 정진석(44)은 KBS촬영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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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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