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 빈국립음대 초청교수 타악기 연주의 명인 ‘멀티 퍼커셔니스트’ 정건영 교수
동양인 최초 빈국립음대 초청교수 타악기 연주의 명인 ‘멀티 퍼커셔니스트’ 정건영 교수
  • 유성희
  • 승인 201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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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 강에 투신할 뻔 했던 좌절의 유학생활 / 유성희

 

 

 

 

[인터뷰365 유성희] 최근 국내 초연의 슈반트너의 ‘퍼커션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타악기 연주무대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됐다. 6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마림바, 봉고, 팀발레스, 크로탈, 큰북, 실로폰, 비브라폰, 팀파니 등의 악기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이날의 콘서트를 이끈 주역은 멀티 퍼커셔니스트 정건영(35) 교수이다. 그는 국내에서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오케스트라와 퍼커션 협주를 통한 다양한 음색과 웅장한 파워 연주의 음악으로 홀을 가득 채웠다.

 

정건영 교수는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프라이너 콘서바토리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30대 동양인 최초 빈국립음대 초청교수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관악부 출신으로,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 객원연주자로도 활동했다. 2001년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정상의 유럽 클래식 음악가들을 배출한 빈국립음대 타악기 연주과와 타악기 석사과정, 최고연주자과정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했고, 2004 오스트리아 페스테스트 타악기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한 엘리트 음악인이다.

 

정 교수의 화려한 이력은 음악활동으로 이어진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연주자로 구성된 한ㆍ오 오케스트라 팀파니 수석주자로 활동했으며 빈국립음대 연주자로 구성된 안톤 베베른 오케스트라에서는 리카르토 무티, 주빈 메타 등 세계의 유명 지휘자들과 연주를 했다. 쉔부른 오페라극장, 빈 뮤직페어라인 골든홀, 비엔나 하이든홀 독주회 등의 연주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오스트리아 상트 푈텐 교구 합창단 오라토리오 지휘 등 다방면으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빠르고 화려한 연주가 유투브를 통해 소개되어 세계 음악팬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여러 대학의 마스터클래스와 국내 오케스트라 협연을 위해 고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멀티 퍼커셔니스트’는 생소하다. 어떤 악기들을 다루고 연주하는 건가?

이번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슈반트너의 ‘퍼커션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자주 접하지 못했던 타악기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었다. 마림바, 봉고, 팀발래스, 크로탈, 큰북, 실로폰, 비브라폰, 팀파니 등의 악기가 사용되었다. 생소한 악기들이 어떻게 연주되어 어떤 리듬을 만들어내는지 색다르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멀티 퍼커셔니스트가 대중화되어 있는 반면, 한국은 그렇지 못한데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모든 종류의 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멀티 퍼커셔니스트라고 보면 되겠다.

 

슈반트너의 ‘퍼커션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국내 초연이었다. 공연 후의 느낌이 어땠는가?

타악기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가족, 친구들이 처음 보는 공연이기 때문에 부담도 되고 긴장되더라. 아무래도 관중들에겐 퍼커션이라는 장르가 생소하기 때문에 공연에 앞서 시연을 하기도 했다. 손이 제일 빠른 연주자라고 소개를 해주셨는데, 큰 홀에 울려 퍼지는 북 연주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시원하고 후련했다는 말씀을 하시더라.(웃음) 카덴차(독주자나 독창자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악곡이 끝나기 직전에 연주하는 장식적인 부분)를 5분정도 연주했는데 인상적인 공연을 남기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 좋게 봐주신 것 같다.

 

 

2004년 오스트리아 페스테스트 타악기 콩쿠르 1위를 차지했다. 어떤 대회인가.

쉽게 말해 1분 안에 가장 빠르게 드럼을 칠 수 있는 연주자를 가려내는 대회다. 나는 1분 동안 1,142타를 연주해 우승했다. 대회에 참가한 계기가 우연이었다. 학교에서 연습 중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차에 태워 무작정 데려간 곳이 이 대회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출전한 대회라 간단히 손만 풀고 참가했는데 일주일의 대회 기간 동안 나보다 빠르게 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웃음) 주로 실용음악을 하거나, 테크닉적인 드럼세트 연주자들이 참가했는데 나는 유일한 오케스트라 타악기 연주자였다.

 

 

 

 

 

 

 

 

 

보통 오케스트라 타악기 연주자 하면 뒤에서 일어나서 심벌 한번 치거나, 큰북 한번 치는 것쯤으로 생각되는데 손이 빠른 연주자로 1위를 차지했다는 게 놀랍다.

유학을 떠나기 전, KBS교향악단 객원연주자였을 때 스네어 드럼을 연주했는데 그때 테크니커로 유명했다. 근데 당시에는 음악적인 부분보다 손만 빠르다는 기술적인 부분으로 인식했기 때문인지 빠른 연주로 테크닉이 좋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그래서 정통 클래식에 대한 배움을 얻고자 유학을 결심하게 된 거다. 빈국립음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테크닉적인 연주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테크닉적인 연주가 나에게 기회를 만들어준거나 다름없다. 빈국립음대 실기시험 때 스네어 드럼을 빠르게 연주하는 걸로 교수님들의 눈도장을 찍는 계기가 되었고, 적응이 쉽지 않았던 유학생활에 친구들이 내게 먼저 관심을 가진 것도 테크닉적인 연주를 보인 뒤부터였다. 나 스스로도 타악기 연주자라면 클래식이건 실용음악이건 테크닉적인 연주가 음악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된 거다.

 

8년 동안의 긴 유학생활에는 고생담도 많을 것 같다.

가장 큰 벽은 언어와 나이였다. 언어가 원활하지 않아 놓치는 학교입시정보도 많았고, 당시 27살이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주 실력이 좋아도 가능성을 보고 뽑는 어린친구들에게 밀렸다. 나를 지지하고 도와줬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시험을 봤던 학교에서마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떨어졌을 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연습할 장소도 없어 매일 도나우 강가에 앉아 연습용 악기로 ‘뚝딱뚝딱’ 거렸는데 옆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그곳마저 여의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내가 여기에 왜 와있는 건가 싶었다.

도나우 강가에 자주 가서 연습하고 시간을 보냈는데 강물이 흐르는걸 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약해지더라. 절망스러운 마음에 뛰어들 결심을 하고 여러 가지 계산을 했다. ‘물이 얇은 곳은 돌이 많아 아프니까 최대한 멀리 뛰자’ ‘물이 깊어도 본능적으로 수영을 하게 되면 허사일 텐데’ ‘집에 세탁기가 없으니까 옷만 젖으면 낭패겠다’ 갖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결국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웃음)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는 이야기인데 그때는 절박하고 진지했다. 얘기할 친구도 없었고, 강가에 앉아 한 종류의 빵만 지겹게 먹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 3개월간 궁지에 몰리는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걱정하실 게 뻔해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켜드렸는데 너무 힘든 나머지 아버지께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딱 한마디 하셨다. “건영아 너 젊잖아. 젊은 놈이 뭐가 두려워 그러느냐”고 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때부터 내 진가를 알지 못하고 떨어뜨린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잘해 보이고 싶은 독기가 생겼다.

 

빈국립음대에서의 학교생활은 어떠했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시간 이상 연습을 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하게 마음을 품었는데 혹독한 연습만이 답이 아니란 걸 배웠던 계기가 있었다.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학생들이 조를 나눠 실기발표를 하는데, 오스트리아 친구들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근데 한 두 시간 연습한 친구들은 10시간 이상 연습한 실력을 보여주고, 정작 10시간 연습한 나는 그들보다 못한 실력을 보여주고 무대에서 내려 온 것이다. 뒤풀이 자리에 참석해 화나고 속상한 마음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있으니 친구들이 ‘네 연주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답은 여유에 있었다. 친구들은 무대에 서는 자체를 즐기는 거였다. 나처럼 10시간 연습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니 부담감에 실수가 많았던 거다. 그동안 무대와 관객 사이에 커튼을 치고, 내 만족을 위한 연주를 했던 거다. 근데 여유라는 게 단시간에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교수님께서는 연습만 하지 말고 날씨가 좋은데 나가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누워서 낮잠도 자고 오라고 하시는데 그게 잘 안됐다. 한번은 연습을 못하게 내 스틱을 뺏어서 감추기도 하셨다. 연습하면 소리 지르고.(웃음) 사실 우리는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정답이라고 배우지 않았나. 오히려 나는 ‘안 되는 건 안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배우면서 음악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빈국립음대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예후디 메뉴인, 주빈 메타 등 세계적인 음악인을 배출했다. 음악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많을 것이다.

주빈 메타가 빈국립음대 동문으로, 일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할 때는 굉장히 온화한데 학교에 와서 지휘를 하게 되면 무섭게 변한다. 아무래도 직속 후배들 이다보니 혹독하게 가르쳐주려는 진정한 애정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일텐데... 그래서 주빈 메타만 학교에 오면 모두 초긴장 상태가 된다. 본인도 다른 학교 가서 절대 이렇게 혼내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애정 어린 얘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 더 자부심이 느껴진다.

 

 

 

 

 

 

 

 

 

프라이너 콘서바토리움 타악기과 정교수로 재직,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30대에 빈국립음대 초청교수로 발탁됐다. 어떻게 학생들을 지도하나?

나는 친구처럼 지내며 장난도 잘 치는 재밌는 선생으로 통한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른 교수님들에 비해 학생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음악을 재밌게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무조건 열심히 하라는 얘기는 안한다. 연습하기 지루하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을 권한다. 무슨 일이든 규칙적인 학습결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5분을 연습하더라도 하루도 거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교육방법은 내가 그동안 겪었던 시행착오에서 비롯된 방법이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물어오는 질문이 ‘하루에 얼마나 연습을 하는 가’이다. 짧은 시간 연습하더라도 진정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면 나중에는 시키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스스로 연습하고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근데 정작 본인은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나?

지금도 하루에 7-8시간 정도는 연습하는데 투자한다. 한국에서 연습하던 시절에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스틱을 놓지 않았다. 연습실에서 가까운 세종문화회관 분수대에 나가면 안면 있는 노숙자 형님들이 많았다. 새벽에 연습을 마치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매일 그 자리에 있는 노숙자 형님들과 이야기하며 친해진 거다. 당시 슬리퍼에, 땀에 전 까만 체육복이 내 고정된 옷차림이었다. 추레한 건 나도 만만치 않았다.(웃음) 하루 종일 연습만 하니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도 없었는데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도 나눠먹고, 여러 가지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 그분들은 나를 같은 노숙자 처지로 알고 계셨다. 당시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북을 잘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오직 음악에 대한 생각뿐이어서 내 주변을 돌보지 않고 생활했다. 방법을 몰라 손에 물집 잡히며 죽어라 연습만 하던 시절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데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힘든 유학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관악부 활동를 계기로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는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선배 형이 트롬본으로 애국가를 연주하는데 너무 멋있게 보였다. 쉬는 시간 음악실에 가서 기웃거렸는데 마침, 신입생 중에 연주자를 뽑는다고 했다. 트롬본을 불어봤더니 손이 짧아 연주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클라리넷을 불었는데 이번엔 침이 너무 많이 나와 고민이 되더라.(웃음) 트럼펫도 불어봤는데 얼굴만 벌게지고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가 할 건 없겠다 싶어 마음을 접고 나오려는데 구석에서 두 사람이 ‘똑딱똑딱’ 악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실 ‘무슨 재미로 저걸 칠까’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였다. 연주하던 형이 불러 악기를 두드렸더니 단번에 ‘재능이 있다’고 나를 추켜세우는 게 아닌가. 결국 그 말에 넘어갔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타악기에 지원하는 신입생 지원이 없어 나를 꼬드긴 것이다.(웃음)

 

음악을 한다는 말에 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버지(정해성)께서는 반대를 하셨다. 근데 내가 뭔가에 빠지면 말릴 수 없는 성격이다. 어머니(최성숙. 63)가 옆에서 응원을 많이 해주셨는데, 땅을 사야 할 돈으로 마림바를 사주실 정도였다. 당시 학교에는 마림바가 없었고, 대학입시 실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마림바 연주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마림바가 집에 온 날 벽에 쪼그리고 앉아 잠도 안자고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내 방에 있는 게 마림바가 맞나 싶었다. 아직도 갖고 있냐고? 유학 갈 때 팔면서 작별하게 됐다.(웃음)

 

현재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객원연주자였을 때 KBS 방송에 나오기도 했는데 그때 아들 얼굴이 비추고 하니 좋아하셨다. 지난해 마스터클래스를 위해 한국에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 중이셨다. 아버지께 내년 7월 8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게 됐다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아들 공연에 오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수술이 잘못돼 돌아가셨다. 객지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얼굴도 보여드리지 못하고, 어렵게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연주하는 모습을 많이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공연을 보러 오신 어머니도 많이 속상해하셨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많은 공연을 하지 않았나?

아버지 어머니께서 비행기 타는 걸 무서워 하셔서 비엔나에 한번도 오시지 못했다. 동네 분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신 적이 있는데, 마침 처음 탄 비행기였는데 착륙할 때 흔들림이 많아 놀라셨다. 집으로 오실 때는 배를 타고 오실 정도였다.(웃음) 내가 비엔나에서 한국 간다고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께서는 잠도 못 주무신다. 공항에 도착해서 전화를 드려야지 안심을 하고 주무신다. 내가 도착하면 어머니는 목소리부터 다르다.(웃음)

 

 

 

 

좌절의 시간을 거쳐 꿈을 이룬 음악인으로 현재의 행복한 순간들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세계 각지로 다니는 순회연주는 많은 경험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유럽의 유명한 홀에 동양인 연주자가 등장하면 시선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때도 뿌듯하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나를 소개하기도 한다.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한국은 잘 모르는 게 사실이다. 하도 얘기해서 심지어 외국인 친구들은 내 고향 충남 예산이 어디 있는지도 안다. 하하.

 

한국에서 남은 공연일정을 소개해 달라.

8월 19일 경기도문화의 전당, 20일 인천종합문예회관에서 오케스트라 협연을, 28일과 29일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단독공연을 한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세계적으로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교류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자로 많은 활동을 보여줄 계획이다. 또한 동해 타악기 앙상블을 통해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고, 음악을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이 해외 음악인들에게 한국을 알렸듯이 나또한 후배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역할모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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