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웃음 뒤에 감춰진 이재오 부인 추영례 여사의 고단한 삶
함박웃음 뒤에 감춰진 이재오 부인 추영례 여사의 고단한 삶
  • 김두호
  • 승인 201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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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생활비 준 적 없는 남자, 그래도 정 많고 소박해” / 김두호



인터뷰365에서는 창간 3주년 기획의 일환으로 7.28 재·보궐선거 최대 격전지인 서울 은평을 지역구를 찾아, 원내 의석 수 양대 정당의 두 후보 배우자들을 만났습니다. 이에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 배우자’ 추영례 여사의 인터뷰와, ‘민주당 장상 후보 배우자’ 박준서 경인여대 총장의 인터뷰가 게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주


[인터뷰365 김두호] ‘나는 감옥에 다섯 번이나 갔는데 그때마다 좌절하거나 굽히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내 때문이었다. 신념과 도덕적 정당성이 감옥 안의 삶을 견디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큰 힘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의 사랑과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오던 날부터 아내는 삯바느질과 재봉기술로 내 옥바라지와 아이들 셋을 키우고 병석의 장인 장모까지 모시며 철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재오 전 국회의원(65)이 2009년 8월에 펴낸 자전적 수기형식의 <함박웃음>에서 부인 추영례 여사(62)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감옥을 안방 삼아 살던 재야운동가 남편은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면서 3선 국회의원이 되고 새로운 정부와 집권여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입지를 달리해 왔지만 추영례 여사는 지금도 부군을 옥바라지 하던 시절부터 살던 서울 은평구 구산동 217번지 23평짜리 주택을 지키며 직접 살림을 챙기는 매우 평범하고 소박한 주부로 머물러 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손마디에 피멍이 들도록 바느질하던 일손을 접고 대신 이웃 동네인 갈현동에 은맥여성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점이다.


조그마한 건물의 3칸짜리 3층 방을 임대해 20년이 넘도록 운영하는 문화센터는 월 1만원만 내면 누구나 어학교육이나 취미생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는 지역 여성의 취미 교양 문화공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력을 아끼기 위해 건강한 사람은 3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꺼두고 있고 강의실은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지만 수강생들이 줄을 잇는다. 문화센터에서 추영례 여사는 원장이라기보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보람을 찾는 ‘동네 언니’가 되어 있다.


<함박웃음>의 내용 일부를 더 옮겨보자.

‘나는 평생 집사람에게 생활비를 준 적이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3선 의원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세비를 아내에게 준 적이 없고 흔히 하는 집 늘이는 이사도 해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이제 돈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 주위사람들이 말했지만 막상 되고 보니 밑지는 장사였다. 세비로 가족 먹여 살리고 정치활동하고 지역구 관리하기란 불가능 했다.

세비를 받던 날 아내에게 이 돈을 당신에게 주면 검은 돈 없이는 정치를 못하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아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살지 말라며 집 걱정을 않도록 했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그런 아내와 한 가지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4선이 되면 그때부터 세비를 갖다 주겠다고 했는데 낙선했다.

아내는 운도 없다. 평생 돈 한번 벌어다 주지 못한 남편인가 생각하니 더욱 아내가 안쓰러워진다... 총선에서 낙선하고 2008년 5월26일 집을 떠나던 날 아침 인천공항은 늘 그렇듯 만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출국장에 있는 나에게는 물론 이별의 장소였다. 나는 배웅 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거나 포옹하면서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아서였다. 아내를 힐끔 바라봤다.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의 아내에게 마지막 이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의연하고 꿋꿋하게 버텨주었던 아내가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믿음으로 그저 조용히 끌어안고 나지막하게 다녀오겠다는 한마디만 건네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고 있을 아내와 아이들을 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출국장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정부 출범의 일등 공신이었던 부군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지역구에서 패자가 된 실의를 안고 기약 없이 미국으로 떠나던 날의 느낌을 회상한 대목이다.


<함박웃음>은 추영례 여사의 부군인 저자가 ‘나도 모르게 얼굴에 박힌 함박웃음은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내 힘의 원천’이라면서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짙은 눈썹에 선이 굵은 얼굴 분위기와 다소 차가운 느낌에 강한 인상을 가진 부군과 달리 얼굴에 따뜻하고 선량한 미소가 가득한 추영례 여사의 이미지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민주투사라는 이름 아래 바람 잘 날 없었던 거친 인생역정의 길을 선택한 남자를 인내와 사랑으로 끌어안고 꺾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의지의 삶을 산 추영례 여사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부군을 두고 ‘이명박 정부의 2인자’라고 말합니다.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정치인으로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 감정에 가까이 가 본 적도 없어요. 남편은 정치인이므로 자신이 목표로 세운 일에 신명을 다해 뜻을 이루었다면 보람이나 느낌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사람인 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네 아줌마인걸요. 문화센터 원장이라고 하지만 이 동네에서 40여년 살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형님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동네 아줌마라 그런 질문이 부담스럽네요. 오히려 남편은 그런 소리(2인자)로 인해 동네 분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해 지난 18대 총선에서 떨어졌어요. 세 번이나 국회로 보내 준 동네 분들에게 외면을 받았고 그길로 또 산행을 하거나 미국으로 떠나있는 등 힘든 시간이 찾아왔었지요.


최근 50평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자꾸 그런 말이 만들어져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고 그냥 웃을 때가 많아요. 남편이 귀국해서 국민권익위원장을 9개월 하셨지만 우리 가정에 달라진 것은 없어요. 결혼해서 대조동 역촌동 불광동 갈현동 등 방값이 싼 곳을 찾아 이사 다녔고 제가 모은 돈 850만원과 은행융자 2000만원을 얻어 20년 전 지금 사는 구산동 집을 샀어요. 9평짜리 연립에 살다가 23평에 방 3개나 되는 집으로 이사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더 이상 욕심이 없었고 불만이 없었지요. 이 집을 장만할 때도 남편은 나보고 간 큰 여자라고 몰아세워 부부싸움도 했어요.

제가 무남독녀인데 17년간 치매로 고생하신 친정아버님도 이 집에서 별세하셨어요. 남편은 첫째와 둘째 딸이 출가해 방을 비우자 환갑이 되어서야 자기 방이 생겼다고 행복해 했어요. 감옥에서도 자기 방을 가졌다는 사람인데 방 3개 중 작은 방 하나는 아들이 차지해 그동안 혼자서 책이라도 볼만한 자기 방이 없었거든요.


은맥여성문화센터는 설립 동기가 부군을 위해서인가요?

아마도 그렇게들 생각하겠지만 남편의 의원생활보다 먼저 시작했어요. 농협문화센터 노래교실에 갔다가 여성을 위해 나도 사회활동을 해 내 나름의 새로운 일을 개척하고 싶었지요. 남편의 정치활동을 돕는다는 거창한 꿈보다 그냥 나 같은 동네 엄마들 모아서 무엇이든 함께 공부하는 교실을 운영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역촌오거리에 20평짜리 방을 임대해 월 3천원씩 받고 꽃꽂이, 지점토공예 등 그 당시 인기 있던 취미강좌를 열었는데 수강신청자가 구름처럼 몰려 금방 동네 문화센터로 유명해졌습니다.


20년이면 거쳐 간 수강생도 엄청나겠군요.

초기의 젊은 주부 수강자들이 50대로 접어들어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 지역 문화센터인데 지금은 시설이 좋은 동자치문화센터도 생겨 수강신청자를 못다 받아들이는 경우가 줄었지만 강사진과 프로그램을 잘 운영해 강의실에 빈자리가 없어요.


요즘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강좌는 어떤 분야입니까?

영어 중국어 일어 등 어학과 건강을 위한 요가 스포츠댄스 등에 관심이 많아요. 지금도 옆 방에서 영어회화 강좌가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 재야 운동가 아내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부군은 틈틈이 자신의 지난 고생담을 얘기할 때 결혼식 때의 일화를 자주 풀어놓는 것 같습니다.

1971년 10월9일 남산에 있던 드라마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결혼식이 그날 12시였는데 신랑이 원주에서 시국강연에 철야농성을 벌이다가 네 시간쯤 늦게 나타났어요. 주례는 일이 잘못된 줄 알고 등산을 가버리셨죠. 뒤늦게 주례를 모셔와 겨우 예식을 올렸는데 신랑 옷차림이 웃기는 코미디언 같았어요. 몸에 안 맞는 친구 와이셔츠를 빌려 입고 양복은 가봉할 옷을 그대로 입고 와 소매길이가 짝짝이더군요. 더 기가 막힌 일은 신랑이 수배자였는데 수사요원의 배려로 연행 시간을 미룬 덕분에 결혼이 가능했다는 것을 뒤에 알았습니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신랑이 붙잡혀 갈 뻔했군요.

인간적으로 동정을 받은 거죠. 곧장 경주로 신혼여행을 가 여인숙에서 때 묻은 이불을 덮고 첫날밤을 보내고 대구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내면서 신랑은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몸을 감추었어요.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지만 그렇게 신혼생활도 못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된 줄은 미처 몰랐던 저는 그냥 울면서 혼자 상경해 신방으로 얻어 둔 불광동 단칸방으로 갔어요. 그런데 그곳에는 몇 명의 형사들이 이불을 깔고 잠을 자며 대기하고 있었어요.



추영례 여사의 결혼생활은 첫날부터 불안과 고통의 예고였고 시작이었다. 재야 운동권에서 활동의 뿌리를 박은 남편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도망 다니고 붙잡혀 가거나 수감되는 남편과 살면서 그에 대처하는 생존방법도 차츰 익숙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부군이 <함박웃음>에서 고백한 내용을 또 옮겨보자.

‘경찰들이 그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나를 바로 잡아가기 위해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한 번도 덮지 않은 요며 이불을 경찰들이 깔고 덮고 자는 모습을 보고 아내는 너무 놀라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아내는 아예 입원해서 일주일가량을 누워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연락이 되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가 심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은 형사들의 추적조사를 피하기 위한 과장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계기로 발휘되기 시작한 아내의 지혜로운 임기응변은 이후로도 쭉 이어졌다. 신혼 초의 내 생활은 주로 도망 다니거나 잡혀서 감옥에 가거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아내의 재치가 빛을 발하곤 했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갈 곳이 없을 때면 아내는 침착하게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 나를 숨겨놓곤 했다.

큰 어려움이 집안에 닥칠 때마다 아내는 나를 대신하여 불평 한마디 없이 수습하고 집과 가정을 책임져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기만 한 일이다. 당연히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희망도 없어 보이는 남편을 믿고 힘들게 산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둘째딸을 낳아서 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남편은 대뜸 아기의 손바닥과 발가락을 펴 보여 달라고 해요. 힘들게 사는 아내가 조산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혹시 온전치 못한 아이가 태어난 게 아닌지 불안에 떨다가 눈으로 확인을 한 것이지요. 비록 가족 곁에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마음만은 다른 남편보다 더 절절하게 가족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남자였습니다. 고생을 모르고 외동딸로 곱게 자란 저에게 그런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도망을 갔을 겁니다. 하하하.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이신데 살아오신 걸 보면 성격은 남자 못지않게 강인한 것 같습니다.

혈액형이 O형입니다. 남편은 인상이 강해 보이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순정적이고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남편은 총각시절에 교직생활을 했는데 정치보다 선생이 더 맞을 것도 같아요. 저는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을 만난 것도 민주화 운동의 현장 사진을 찍다가 알게 됐어요. 연애감정이 생길 무렵 남편은 실반지 하나를 끼워주며 그 반지 끼고 다른 남자 만나면 손이 썩는다고 엄포를 놓더라고요.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양가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함께 노역하며 인연이 깊은 사이였음이 드러나 서로 믿고 서둘러 결혼을 시켰어요. 양가 어른이 모두 보수적이고 엄격한 분들이라 집안에서 걸음걸이와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세 자녀를 키우며 친가 부모님도 모시고 사셨다면서요?

남편이 장기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5년형을 받아 교도소에 있을 때 어머님은 위암으로 6년간 고생하시다가 별세 하셨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어머님은 저를 불공을 올려 낳았지만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뒤에 10년 넘도록 치매로 고생하신 아버님을 모셨지만 심리적으로 신앙에 의지해 안정된 생활을 했어요. 의상실의 바느질로 시작해 단골이 꽤 많은 조그마한 한복집을 마련한 것도 친정집 재산을 정리한 돈이 밑천이 되어 부모님 모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참 괴로운 일은 자식들이 철이 없을 때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지 않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할 때였습니다.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 하셨다던데 노래를 잘 부르시나보죠?

14년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는데 남편이 낙선하던 해 엉치등뼈에 이상이 생겨 입원했을 때 성대 결절 진단까지 받아 제대로 목소리를 못내 성가대에서 내려왔어요.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좋아합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부군은 강하게 보이는 이미지와 다른 부드러운 면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솔직히 어떤 장단점을 가진 사람입니까?

저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첫마디로 시트콤의 주인공 같은 남자라고 말합니다. 복잡하지 않고 정에 약하고 소박하고 수시로 웃기는 남잡니다. 왜 무서운 인물처럼 오해를 받는지 모르겠어요. 김치나 생선 반찬 하나만 있으면 맛있게 밥상을 비우고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지금도 스스로 라면을 끓여 해결하는 타고난 서민 남자입니다. 그런데 흠이 왜 없겠어요. 너무 날 믿고 가정에 대해 신경을 안씁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생활비 아이들 학비걱정을 안 해요. 가족의 부양 능력과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니 아내에게는 그보다 더 큰 결함을 가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살면서 마주친 숱한 희로애락 중에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습니까?

박근혜 전 대표님과 관계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눈물이 났어요. 언젠가 국회 건물에서 남편이 문을 열어주는 신문사진을 보고 제가 참 보기 좋다고 말했지만 남편은 박 대표님이 불의의 피습으로 입원했을 때도 병문안을 하고 집에 와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보였어요. 이제는 슬픈 일이 별로 없지만 남편이 사실과 다르게 오해를 받거나 풀리지 않은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우울해집니다.


자녀분들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큰 딸(이고은 38)과 여성지 기자생활을 한 둘째 딸(이은별 37)은 모두 출가 했고 아들(이민호 26)은 군복무를 하고 대학을 졸업해서 함께 살고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으면 아버지 머리가 아들 턱밑에 갈 만큼 덩치가 커 조그마한 방안에 누워 있으면 방안에 한가득 차요. 우린 괜찮지만 아들에게는 좀 큰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사위분들은요?

우리 아이들도 특별히 뛰어나거나 모자란 점이 없는 보통의 근실한 사람들이고 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어진 환경과 일을 사랑하고 검소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이 요즘 대다수 젊은이들의 공통점이 아닌가요?



앞으로 어떤 일을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문화센터에 새롭고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운영하고 싶은 것이 꿈이면서 제가 할 일입니다. 얼마전 남편과 이런 다짐을 나누었어요. 서로가 하는 일에서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럼 아무리 힘든 일이 또 있어도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든 불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인터뷰] 장상 부군 박준서 총장이 말하는 ‘아내, 동료로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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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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