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도 사인 남긴 죽변 카페의 정수일 사장
노무현 대통령도 사인 남긴 죽변 카페의 정수일 사장
  • 김두호
  • 승인 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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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사업하는 작은 부자의 즐겁고 행복한 인생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강릉에서 남쪽으로 옛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모두 바닷가 절경이다. 죽변(竹邊)은 강원도 땅에서 경상북도 경계를 넘어서면 곧장 가닿는 작은 해변 도시이면서 어항이다. 유서 깊은 등대가 있는 뒷산마루에 울창한 대나무 숲길이 있고, 그 길과 이어진 절벽 위에는 동해의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세워 둔 TV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세트시설이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다.


죽변 도심을 벗어나 울진으로 가는 길목인 봉평(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해변도 풍광이 빼어나다. 그곳을 지나게 되면 문득 시선을 끌어 잡는 순백의 2층짜리 길고 큰 건물이 있다. 바다로 통하는 창들이 수없이 달려 있는, 말 그대로 바닷가의 아름다운 화이트 하우스다. 웨딩홀과 모텔, 라이브 카페가 들어 있는 개인 소유의 영업장 건물이지만 주인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그 집 주인 정수일(62) 사장은 죽변 토박이로 바닷가에서 살며 사업을 하는 성공한 지역 경제인이다. 경제인이라기보다 그 동네 부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마당 끝자락에 해수욕장의 파도가 넘실대는 그의 사업체 중에 라이브카페로 들어서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써두고 떠난 방명록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 그 중에 ‘사람 사는 세상 / 89. 11. 12 / 잠시 즐거웠던 시간을 기념하며 / 노무현’이라고 적어 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빛바랜 육필에서 묘한 여운이 전해온다. 그는 요식업을 하며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고 일생을 두고 세계각지를 여행하며 살았다.


세상에 자랑할 만큼 큰 재산이나 명예를 쌓은 분도 아니고 당장 뉴스의 주인공이 될 만한 화제 거리도 없는, 우연히 마주친 죽변의 사업가 정수일 사장과 무작정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인물과 주제가 없는 삶의 한담(閑談)이었지만 그는 즐겁고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체험적으로 들려주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면 별 것도 아닌 사회적 업적이나 명예에 매달려 쫓기듯이 사는 사람들보다 그의 보통 인생이 한결 여유 있고 멋져 보였다. 모든 것은 오르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불교 화엄경의 중심사상인데, 이순(耳順)에 이른 그가 발견한 체험적 삶의 진리도 “잘살고 못사는 것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집의 손님으로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1989년이니 대통령이 되기 전 국회의원 시절이지요. 청문회를 통해 얼굴을 알고 있었고 배우처럼 인기가 있을 때였습니다. 다른 의원들과 함께 찾아와 생선회 요리를 드셨는데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고 그 분만 TV를 통해 얼굴을 알고 있어서 사인을 받아두었어요. 인상이 밝고 목소리가 활달해 보였습니다.


그때 혹시 대통령까지 될 분으로 생각해 사인을 받아둔 것은 아닌가요?

하하하, 내가 사람을 볼 줄 알고 세상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평생 이 바닷가에서 살겠습니까? 그 때 우리 집은 다른 곳에서 구경할 수 없는 아주 큰 광어양식장이 있는 생선횟집이었습니다. 봉평횟집이라는 우리 집 간판은 서울에서 찾아올 정도로 이름이 났었지요. 지금은 횟집을 여기서 조금 떨어진 오른쪽 해변에 따로 마련하고 이곳은 오래전에 건물을 새로 지어 예식장에 모텔, 라이브카페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간판도 굿모닝으로 바꾸었죠. 그래도 여전히 유명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이따금 기분나면 사인을 받아둡니다.


사인을 보니 탤런트 개그맨 등 연예인들도 있고 해군참모총장의 이름도 보입니다. 최원석? 저 분은 혹시 전 동아건설 회장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본인은 아주 소탈하고 좋은 분으로 기억되는데 그 분을 모시고 다니던 사람들이 워낙 요구 조건이 많고 까다로워 예약을 해오면 신경이 쓰였던 손님이었지요. 울진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 때 자주 오셨어요.


고명한 불교계 지도자이셨던 탄허 스님과 서경보 스님의 휘호도 눈이 뜨입니다. 단골 손님이었는가요?

불국사 조실이셨던 월산 스님도 그렇고, 일붕 서경보 스님과 탄허 스님도 우리 집에 묵고 가시는 손님이기도 하셨지만 내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분들입니다. 일붕 스님은 이렇게 좋은 자리에 통일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써주신 글이 있어서 별도로 저기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기념비석까지 세웠습니다. 탄허 스님은 나의 선친 대부터 가까이 모시고 소중한 연을 나눈 분이지요.


탄허 스님이야말로 선견지명을 가진 분으로 생전에 많은 예언도 하셨고 그 예언이 적중해 화제에 많이 올랐던 분입니다. 개인적이라는 인연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지요?

1950년대 탄허 스님은 마라토너 황영조의 고향 동네 부근인 삼척의 영은사에서 화엄경 번역사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수산물 무역업을 하신 우리 선친께서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올린 절이 탄허 스님의 영은사였지요. 참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우리 가족들을 각별하게 생각하셨답니다. 내가 죽변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월정사로 옮기신 탄허 스님이 비로소 “이제는 내가 용돈을 주마”하시며 나를 불러 노트나 연필 살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셨지요.


특별히 들려주신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은 없는가요?

불교에 앞서 주역이나 유학(儒學)에 통달한 분 같았습니다. 나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에서 소련연방의 붕괴, 한중수교, 남북교류 등을 미리 예언해 적중을 했었지요. 지구의 수명도 성숙단계에 머물러 있는 반절 나이라고 했는데 대개 세상이나 시대의 변화에 대한 예언을 하셨지요. 우리 집에 오실 때는 무거운 얘기는 안하시고 그저 일상적인 생활 얘기를 하셨어요.



선친께서 수산물 무역업을 하셨다고요? 그럼 옛날부터 부자였군요.

조부 대(代)부터 부자였어요. 그런데 모두 부모 유산 덕을 안보고 자립해서 사업으로 성공했어요. 할아버지는 마산에서 만석지기 지주이셨다는 데 정부수립 초기 토지개혁 때 재산을 다 잃으셨고, 아버지는 진주에서 태어나셨으나 1950년 6.25가 터지기 전에 죽변으로 이주를 해 오셨어요. 죽변항이 옛날부터 동해안에서 손꼽는 어항인데 이곳에서 해태 오징어 등 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크게 하셨어요. 그러나 나중에 실패해 재산을 남기지 못하셨지만 내가 재기를 했습니다.


횟집 등 요식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나는 젊을 때 수산물 냉동 저장업과 가공업을 해 재산을 모았어요. 어묵도 만들고 쥐포공장도 하고 판매도 했지만 그 사업은 결국 실패했어요. 1차 산업을 연계한 수산업 제조 공장이 90%가 제 살 깎아 먹기 덤핑경쟁으로 망하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 후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서 어류 축양장(양식어업) 사업을 시작하고 그걸 겸해서 1980년대 후반부터는 횟집을 열어 성공한 겁니다.


지금 사업체가 이곳 굿모닝 건물하고 또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떨어진 해안에 회센타가 있고 죽변 부두에도 임대해준 횟집 건물이 있습니다. 건평이 2300평방미터 쯤 되는 여기 굿모닝 건물에는 주로 원자력발전소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예식장과 룸이 30개 되는 모텔이 있고 라이브카페가 있지만 이 건물 옆에 있는 주택은 우리 가족이 사는 살림집입니다.


가족은 많으신가요?

지금은 아내 (강정순 64)와 두 사람만 살고 있어요. 우리 모텔은 지나가는 낮 손님은 안 받아요. 대부분 가족들이 편하게 찾아오는 곳이어서 아침식사는 우리 부부가 먹는 유기농 식품으로 요리를 해서 식대는 안 받고 대접합니다. 종업원이 있지만 우리 부부가 모텔이나 카페의 잡일을 도우며 운영합니다.


자녀분은 몇을 두신건가요?

딸 넷에 아들 하나입니다. 막내(정준희 30)가 아들인데 중앙대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딸은 첫째(정대연 38)가 SK계열 회사에 근무하고, 둘째(정주영 35)는 미국 워싱턴대에서 공부하고 호주로 옮겨 퀸즈랜드대 경제학 교수로, 셋째(정도영 33)는 환경단체에서 활동하고, 넷째는 서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시카고예술대(SAIC)에 유학중입니다. 여기에 둘째와 셋째가 출가해 둘째 사위(박인회)는 명지대 법대교수, 셋째 사위(임현석)는 국책연구소에 근무해요.




경치 좋은 곳에서 평생을 살며 사업도 성공하시고 자녀들도 모두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부러울 것이 없겠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 부부의 인연을 이루셨습니까?

나는 이곳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동국대 경제학과)만 서울에서 다녔고 아내는 김천 사람인데 영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죽변으로 와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했어요. 우리 선친이 먼저 며느리 감을 물색해 믿고 결혼했습니다.

(곁에 있던 강정순 여사가 말을 이어갔다) 친구를 따라 죽변에 왔다가 경치에 반해 교육청에 지원을 해서 죽변초등학교에 근무했어요. 학교 뒷산 언덕에 오르면 해가 뜨고 구름이 뜨는 바다가 정말 그림같이 아름다웠어요. 이런 곳에 시집온다는 것이 행복했어요. 시어른께서 사업일로 김천까지 다니실 때여서 우리 집까지 오셔서 청혼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시집가서 계속 딸만 낳아 그 시대는 며느리로 죄를 짓는 느낌이었지만 시어른께서는 전혀 내색을 않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는 즐거움, 자녀들의 교육 뒷바라지에서 오는 보람 말고 또 살면서 어떤 즐거움이 있었습니까?

20년 가까이 1년에 두 달 쯤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부부가 함께 떠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떠날 때마다 두 세 명의 지인들과 어울려 여행을 즐겼습니다. 나의 여행은 무전여행에 속합니다. 옷차림부터 여름에는 모시 한복을 입기도합니다만 대개는 아주 초라하고 검소한 작업복 차림으로 돈을 쓰지 않는 여행을 해요. 너무 검소하게 돌아다니다 보면 현지인들에게 동정을 받을 때도 있어요.


부자가 왜 그렇게 고생하며 여행을 합니까?

부자가 자기 위해 돈을 쓰는 데는 원래 인색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여행 취미는 어느 나라를 가든지 화려한 도심보다 뒷골목이나 산골 오지를 찾아 인간냄새를 맡으며 다양한 인간의 인습과 삶의 모습을 접하는 것에 두고 있어요. 호텔보다 민박을 할 때가 많아요. 잘난 척 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찾는 게 아니므로 검소한 행동이 겸손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어떤 나라를 주로 여행했습니까?

스위스나 뉴질랜드, 호주 같은 나라는 인간보다 풍광이 크게 보이는 나라들이라 여행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진 국가들 보다 아프리카나 동남아 국가들을 많이 방문했습니다. 버스나 자전거로 이동할 때가 많아 한 나라에서 한 달 이상씩 머물기도 합니다. 베트남이 좋아서 종단 일주도 했고 중국에도 6개월쯤 머물며 돌아다녔어요. 케냐 같은 아프리카 나라에서는 음식과 숙박이 우리 같은 여행자에게는 불편해요. 민박은 힘들고 먹을 만한 음식 값은 엄청 비쌉니다.


겪은 일화도 많겠군요.

캄보디아에서 큰 부자가 될 뻔 했는데 놓쳤어요. 앙콜와트가 관광지로 제대로 개방되기 전 그곳 여행 중에 부근 토지 5만평 정도를 평당 1만원 정도에 장기 임대받을 수 있다는 유혹이 있었어요. 임대라지만 99년 이상 보장받아 소유권을 갖는 거나 마찬가지였지요. 당시 그 가격도 거품이 있다고 외면했는데 나중에 가보니 평당 300만 원짜리로 치솟았어요. 나는 한 때 앙콜와트에 반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장기 체류를 하며 관람을 즐겼어요. 15년 전 쯤이든가? 훈센총리가 참석하는 축제에 갔다가 경호원들이 비디오 카메라를 든 나를 기자로 알고 근접촬영을 하게 하더군요.


그렇게 여러 나라를 다니시려면 언어에 불편은 없습니까?

말이 안통하면 손짓발짓이 만국 공통어입니다. 말 때문에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빈자의 행색과 정신으로 여행을 하셨다면 어디서나 시비를 걸 사람도 없었겠군요.

좋은 점도 있지만 사람대접을 못 받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지요. 목욕도 제대로 못해 냄새까지 날 때도 있는데 어쩌다 한국인 식당을 찾아가면 우리 동포들이 오히려 반가워하지 않았어요. 모처럼 욕심이 생겨 비싼 요리를 잔뜩 시키면 깜짝 놀라 불안해하는 주인도 있어요.


고생 않고 즐길 수 있는 절약 여행의 첫째 비결은 무엇인가요?

항공기 티켓을 미리 싸게 구입해 두고 그 일정에 맞추어 여행하면 긴장 없이 여행계획을 짤 수 있어요. 다음은 먹는 것이 중요한데 볶은 고추장보다 멸치를 섞은 생고추장과 새우젓을 가져가면 어디서나 우리 식 반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해외로 여행갈 여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은 데 누구보다 취미생활을 제대로 즐기신 것 같습니다. 후회되는 일이나 아직도 부러워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잘살고 못사는 것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고민을 하고 살아요. 내 마음 먹기에 따라, 내 마음이 정하는 대로 나의 행불행이 결정되는 걸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하신 말씀인가요?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욕심을 내다가 망하거나 마음고생을 합니다. 행복을 지키는 선에서 마음이 머물고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거나 무시해서 불행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을 잘 못 먹으면 결국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지요.


지금 사업에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해결 못할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는 사업들도 일찌감치 더 벌리지 않고 있는 재산을 지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면 재산관리에 아무 걱정이 없었을 텐데 이것저것 여기저기 자꾸 벌려 고민거리가 많아졌어요. 남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재산으로 보면 오히려 이렇게 큰 집을 짓기 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들어 무슨 일로 마음을 먹어야할 때는 욕심을 버려야한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합니다.


그래도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시면 자신의 ‘마음 먹기’ 결정들이 불행보다는 행복, 실패보다 성공이 많았던 것이 아닌지요?

물론이지요. 남들은 어쩌다 한 번씩 구경 오는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나는 평생을 가족과 살며 자식들 탈 없이 키우고 꾸준히 사업을 해왔으니 즐겁고 행복합니다. 재산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이곳에 사는 것만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정수일 사장은 최근에 손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발신인은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민체력센터 전문의 의학박사 서우갑’으로 적혀 있다.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정수일 사장님의 따뜻한 웰빙 아침식사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죽변 봉평에 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그대로 푸른 동해와 마주하고 있다. 지난 정월 15박 16일, 이번 5박 6일, 70평생 이 나이까지 집밖에서 한 곳에 오래 머문 곳이다. 해 솟는 동해를 향해 영원히 굿모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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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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