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영화제가 처음으로 주목했던 거장 영화감독 이두용
유럽영화제가 처음으로 주목했던 거장 영화감독 이두용
  • 김두호
  • 승인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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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스타 황정리와 신작영화 ‘I want to go home’ 준비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영화 <피막> <여인잔혹사. 물레야물레야> <돌아이> <뽕> 등을 연출한 이두용 감독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 변화를 주도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에 본격적으로 우리 영화가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물꼬를 튼 해외 진출 원조(元祖) 영화인이다.


칸, 베니스 등 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와 영화인에 대해 제대로 주목하게 된 것도 <피막>이 1980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인 ISDAP상, <물레야 물레야>가 1984년 칸영화제에 초청받아 ‘주목할 만한 시선’의 작품으로 선정되면서 비롯된다. 그의 작품연보에는 1989년 미국에 스카우트되어 현지에서 연출한 액션 영화 <침묵의 암살자>도 포함되어, 할리우드 수출 감독을 꼽는다 해도 그의 이름이 첫머리에 오른다.


60편이 넘는 연출 영화 중 역사, 토속물에 집착했던 일련의 작품은 ‘한국적인 소재의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됐다. 우리 영화사에 독창적이고 기여도가 뚜렷한 창작혼(創作魂)을 심어온 이두용 감독은 시대극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물, 액션에서 애정 멜로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출 활동으로 작품의 예술성과 대중성에서 고루 평가를 받아냈다. 작품 활동의 성향과 연출 역량에서 임권택 감독과 비견되기도 하지만 후반에 이르러 영화사와 극장 운영으로 그의 연출 작품이 줄어들었고 이어서 활동 무대를 대학 강단(현재 동아방송예술대 예술학부 석좌교수)으로 옮겨 2000년대부터 후진 양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다.


1942년생이니 올해 68세,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는 원로 영화인 이두용 감독은 지금도 영화 작업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고 산다. 1970년대 자신이 신인배우로 발굴했던 홍콩배우 황정리(黃正利)와 의기투합해 미국 올 로케이션 영화 ‘I want to go home’ 이라는 액션영화 한편을 준비 중에 있다. 홍콩으로 진출한 황정리는 성룡과 <사형도수> <취권> 등에 함께 출연하면서부터 성룡의 무술 스승으로 홍콩 액션영화 붐을 이끈 홍콩영화계의 거물이다.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를 첫 작품으로 발표한 뒤 2002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리메이크한 <아리랑>을 끝으로 연출 활동을 중단했던 이두용 감독을 최근 그의 일과 일상의 무대였고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서울 충무로에서 만났다.




충무로에서 오래전부터 담배와 커피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으로 소문이 나 있다. 커피만 하루 30˜40잔을 드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때가 있었다. 1979년 <최후의 증인>을 연출할 때 제작부장이 내가 마신 커피 값으로 300만원을 영화사에 청구해 영화사 사장을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사장은 돈보다 그렇게 마시고 버틸 수 있느냐며 나의 건강을 걱정했다. 당시 300만원은 거액인데 워낙 마셔대니 파악을 못해 대충 계산한 액수였다. 지금은 하루 5,6잔 정도로 줄었다. 커피를 적게 마시니 담배도 줄더라. 하루 한 값 정도 피우지만 단 하루도 끊어보질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질지 못해 금연이 어렵다.


<최후의 증인> 얘기가 나왔는데 그 영화는 원작부터 대하드라마였고 영화도 연출 스케일이나 제작비 투자 규모에서 대작이었다. 정윤희의 순박한 미색에 젊은 최불암의 개성있는 리얼리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그 영화는 이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안타까움이 따른다. 이유는 어디 있는가?

이념과 사회문제에 대한 미묘한 해석 차이로 영화검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나온 작품이다. 여기에 극장 배급에 따른 상영시간까지 감안하다보니 2시간 37분짜리 필름이 1시간 35분짜리가 됐다. 상상이 갈 것이다. 나중에는 공안검사까지 불러서 검찰을 부정적으로 본 부문이 있다고 따졌다. 외국영화 수입 특혜가 부상으로 주어진 대종상 작품상 수상 경쟁이 치열하던 때라 누군가가 투서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무혐의를 받았지만 지금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연민과 애정을 함께 느낀다.


필름의 사후 검열(심의)은 물론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도까지 있던 시대의 얘기를 듣게 되면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지금 세상에서는 상상도 안 되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것이다. 그 시대의 이야기나 의식세계를 옳게 반영하지 못한다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드라마를 드라마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정없이 가위질을 하던 시대에는 영화감독이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영화의 승패를 좌우했다.

<최후의 증인>으로 고통과 갈등을 겪은 뒤 그 속박감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시비에 오를 일이 없는 작품을 준비했다.



다음 작품은 <피막>이 아닌가?

힘을 빼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카메라를 돌린 작품이 <피막>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샤머니즘의 공간을 통해 봉건사회 여인의 본능과 한을 다룬 작품이다. 아름답고 차가운 양면을 가진 여배우(유지인)의 캐릭터가 무리 없이 살아난 영화였다.


<피막>은 1980년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유럽 영화계가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도록 부표(浮標) 역할을 한 작품이다. 감독부문 특별상인 ISDAP상을 받았을 때 유럽의 언론은 대사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상과 구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극찬했다. 동양적인 강렬한 소재와 색채 감각에 충격을 받았다는 외신기사들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출품 당시의 일화를 다시 듣고 싶다.

그 무렵 우리 영화인들에게는 아시아영화제 수상이 최대 목표였고 관심거리였다. <피막>은 일본에 체류하던 영화사의 임원이 일본에서 출품 신청을 해 나도 모르고 있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는 것을 본 이탈리아 주재 우리 외교관들이 현지 상황을 파악해 정부에 보고하면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정부 관계자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이어서 영화제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고 베니스까지 가는 데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고 하루하고 반나절 걸렸다. 난생 처음 카펫을 밟고 수상식장에 들어 가 낯선 유럽영화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시간을 잊지 못하겠다. 사회를 본 솔본느대 훌치 디오니 교수가 “한국영화를 통해 이제 아시아 영화에 주목할 때가 됐다”고 한 소개말도 인상적이었다.


2년 후 <여인잔혹사 물레야물레야>를 칸영화제에 출품한 것은 <피막>으로 자신감을 얻은 덕분인가?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대종상 주요부문상을 휩쓸었던 화제작이었다.

우리 쪽에서 먼저 출품을 신청하지 않았다. <피막>도 자신들의 영화제에 먼저 출품하지 않은 걸 서운하게 생각하던 칸영화제 측이 나의 후속 신작이 나오자마자 곧장 초청해 ‘주목 받을 만한 시선’ 영화로 선정한 것이다.


<피막> <물레야물레야>이후 주로 한국적인 소재의 영화를 통해 베니스와 칸영화제에서 본상을 받는 우리 영화인들이 많이 나왔다. 이 감독의 작품을 보면 영화작가로서의 연출 성향에 특징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피막>에 앞서 1979년에 만든 <초분>이다. 이어서 <물도리동>을 연출하고 차츰 토속영화로 일컫는 역사물에 천착해 영화의 대중성과 함께 작품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욕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잘 지적했다. 액션물을 흥행을 위한 저급 오락성으로만 평가하고 연기자를 ‘으악새’(쓰러지고 맞는 연기자를 지칭)로 비하하는 시각에 불만과 반감이 일어났지만 다른 장르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1970년대의 영화제작 여건은 소재 선택이나 표현에서 제약도 많았고 우리 사회 분위기도 남녀 불평등의 가부장적 보수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봉건사회에서 여인들이 겪은 수난, 희생, 한의 정서는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이면서 인간의 본질과 본능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발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1970년 첫 연출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로 화제를 돌려보자. 당시 청춘스타 신성일 문희가 공연한 그 영화는 제목부터 최루 영화라는 것을 금방 느끼게 한다.

그렇다. 나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멜로영화의 히트작인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정소영 감독 연출팀에서 활동하다가 독립했고 첫 작품도 그곳에서 영향을 받았다. 1969년에 제작에 들어 간 <잃어버린 면사포>는 김수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상류가정의 아들과 호스티스의 사랑이 남자 부모의의 반대 속에서 눈물겹게 이루어지는 소재인데 그 무렵 사회의 일면이기도 했다.



김수현 작가는 지금도 방송드라마를 쓰는 현역이다. 이두용 원로감독께서 김수현 작가의 40년 전 시나리오로 데뷔를 했다는 얘기가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 감독의 굵직한 히트영화 중에는 <용호대련>(1974년), <돌아이>(1985년) 등 액션영화들도 많다. 모두 속편이 시리즈로 제작되어 세월을 두고 화제도 많이 쏟아냈다. 뒷얘기가 많을 것이다.

나는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발차기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고도의 액션 테크닉이 필요한 태권도 영화였다. <용호대련>은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던 한용철을 주연배우로 발탁하고 또 신인 연기자들을 공개 오디션으로 많이 뽑았다. 나중에 홍콩으로 진출해 성룡의 무술지도를 하고 연기 파트너로 성공한 황정리도 그 때 발견한 태권도 젊은이였다. 그들과 한동안 작품을 함께 하면서 충무로에는 ‘무술 100단의 이두용사단’이라는 호칭도 생겨났다.

1980년대 중반에 만든 <돌아이>는 전영록의 뛰어난 연기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그는 가수보다 연기에 더 소질이 있다고 생각됐다. 가수인 어머니(백설희)보다 배우였던 아버지(황해) 쪽의 재능을 더 많이 간직해 계속해서 연기활동을 했다면 더 성공을 했을 지도 모른다.


1989년에 이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사의 요청으로 미국에서 연출한 액션물 <침묵의 암살자>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첫 한국인 영화감독의 작품으로 화제를 남겼다. 미국행은 그때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할리우드의 액션영화 제작자들이 이소룡(블루스리)의 사망으로 그를 대신할만한 액션 배우나 감독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던 때였다. 유태계 미국인 제작자가 아시아권에서 만든 액션물을 검토하다가 나에게 8만 달러를 제시하고 <침묵의 암살자> 연출을 제의해 온 것이다. 주연으로 샘 존스 등을 캐스팅해 6개월 간 찍었다.


그 영화가 국내 상영을 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시대의 얘기일 것이다.

외화로 분류되어 내가 만든 영화지만 내 나라에 가져와 보여주지 못해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수입 허가를 받은 영화사만이 연간 한편의 외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았으나 풀지 못하고 마음고생만 했다. 외화 한 편의 수입쿼터를 확보하려면 당시 3억 원 정도가 필요하던 시대였다.



60여 편이 넘는 자신의 작품 중에 스스로의 만족도에 따라 서너 편을 꼽는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궁금하다. <홍의장군> <경찰관> <물레야물레야> 등 대종상 작품상 영화도 여러 편이다.

아무리 내 작품이라 해도 서로 특색이 있고 장단점이 달라 몇 작품을 선뜻 뽑기가 쉽지 않다. 편하게 생각하면 <최후의 증인> <장남>(1984년) <피막> <물레야물레야>... 등이다.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뽕>이나 <내시>를 이 감독의 걸작선에 포함시키는 평론가도 많다. 특히 <뽕>(1985년)은 나도향 원작의 건조한 고전을 현대적이고 영화적인 시각에서 재구성,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 흥행영화로도 성공하고 작품성에서도 평가를 받아냈다. 이대근과 이미숙의 걸쭉한 입담과 감칠맛 나는 연기가 명품으로 회자된다. 연출 비화를 들여 달라.

원작의 분위기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나름의 실험정신을 적용한 작품이다. 원작의 무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영화적인 요소에 맞추어 드라마를 재구성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시나리오 사전 심의에서 6차례나 반려(불합격) 되었고 영화사도 이곳저곳을 노크하다가 마지막에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을 만나 그의 전폭적인 제작지원을 받아 마침내 카메라를 돌렸다.

<뽕>은 촬영 장소 헌팅이나 캐스팅에서도 고생 끝에 운이 따랐다. 초가집이 있는 마을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합천 산골에서 초가마을인 속칭 보쌈마을을 찾아냈다. 연출팀이 길에 빠진 자동차를 끌어내 엉뚱한 산길로 들어섰다가 우연히 초가동네를 만난 것이다.


캐스팅에도 운이 좋았다는 것은 누굴 뜻하는 얘기인가?

나는 배우가 결정되면 각본에 배우를 맞추지 않고 배우의 캐릭터에 각본을 맞추어 작업을 시작한다. 연기자가 살아나야 드라마가 살아난다. 우선 투박하고 익살스러운 머슴 역에 이대근을 결정하고 그의 상대역인 안협네로 이미숙을 정했지만 그녀는 각본을 몇 번 검토한 뒤 자신의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거절했다. 자신은 도회적인 분위기인데 농염한 산골 촌부의 이미지로 변신할 자신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이도 극중 인물보다 훨씬 어리다고 했다. 나는 분장을 해보고 결정하자고 설득했다. 그녀에게 안협네의 옷을 입혀보면서 모두가 자신감이 생겼다.


1990년에 연출한 ‘청송으로 가는 길’은 걸레스님으로 일컫는 중광 스님을 연기자로 출연시켜 화제를 모았었다. 어떻게 섭외가 이루어졌는가?

그 영화는 한국판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같은 전과 38범 인물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인물이 아기같이 천진난만한 면이 있어야 하는데 우연히 미술전시회에서 마주친 중광 스님을 보고 주인공의 캐릭터와 일치하는 것을 느껴 출연 요청을 했다. 농담으로 끝났지만 출연료로 자신이 살 집과 노모가 살 집까지 두 채를 사달라고 요청했다. 배우가 되면 엄청나게 돈을 받는 것으로 아셨던 모양인데 실제 그 분은 돈을 모르는 아기같이 순진한 분이었다.




이 감독의 많은 작품을 통해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가 드라마의 일정 부분에서 미스터리 터치의 사건이나 인물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흥미를 유발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데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 기법으로 볼 수 있는가?

나의 연출관이나 취향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의외성을 제시해야 한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그게 무엇인가? 따위를 던져주는 것은 관객에게 상상에 따라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흥미를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한 때 두성영화사를 설립해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극장도 여러 개를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 부자가 되신 건가?

아카데미영화상 우수외국영화부문 본선에 진출했던 <내시>를 비롯해 <뽕>의 속편 시리즈 등 9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극장도 4개를 임대 운영해 제법 사업기반을 쌓았고 돈도 벌어 보았다.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부자가 되면 천당 가기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옳은 말임을 깨달았다. 부자로 살려면 얼굴에 철판 깔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돈을 벌고 챙겨야 하는데 그걸 못하겠더라.


<청송으로 가는 길>에 이어 <흑설> <연애는 프로, 결혼은 아마츄어> <위대한 헌터 G,J> 등 소재와 형식이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2003년 나운규 <아리랑>의 리메이크 작품 연출 후 그 동안 대학 강의 활동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 강의는 1997년부터 명지대에서 객원교수로 적을 두고 꾸준히 해왔고 2009년부터는 동아방송대에서 석좌교수로 제작실습을 가르치고 있다. 그 일보다 오히려 국내외 영화제 심사나 각종 영화행사에 참가하는 시간이 더 분주하게 만들었다. 1993년 프랑스 라로셀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이두용헌정시사회’를 시작으로 이듬해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이두용작품전’, 2005년 프랑스 보졸영화제에서는 <뽕>으로 예술공로상을 받았다. 또 지난해에는 미국 LA에 있는 채프먼대 필름회고전에서 <장남>을 초청받았다.



틈틈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2009년에만 하와이국제영화제심사위원장을 비롯해 국내외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8차례나 맡았다. 심사는 보람 있는 일이다. 쉬지 않고 젊은 영화인들이 만든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을 고루 볼 수 있는 점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다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는가?

영화감독은 죽는 날까지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지금 나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 촬영에 들어갈 두 편의 신작을 홍콩에서 돌아온 황정리와 함께 준비하고 있다.


어떤 영화인지 미리 밝힐 수 있는가?

한 편은 <전장>이라는 제목의 지리산 공비 토벌전 때의 이야기이다. 한 때 2만여 명의 공비와 토벌군이 대치했던 또 하나의 전장인 그곳에서 두 쌍의 남녀 이야기에 맞춘 휴먼 드라마이다. 다른 한 편은 ‘I want to go home’ 으로 제목을 정했다. 미국에 태권도 시범경기를 왔다가 본의 아니게 마피아들의 유혹에 빠져 미국에 낙오된 북한 출신 청년의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전량 촬영을 하게 된다.


요즘 자주 만나면서 가깝게 지내는 영화인은 어떤 분인가?

황정리와 양택조 씨 등 연기자와 시나리오 작가 백결 씨를 자주 만난다.

영화와 더불어 살며 영화에 전부를 바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는 언제나 나에게 고통을 요구했다. 영화 작업도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내 실존 인생도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며 영화의 주인공처럼 산 것 같다. 미워하고 좋아하고 무너지고 일어서고... 가공의 세계인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직업적으로 만들며 살아서인지 실제 내 인생에서 부딪치는 희로애락도 그게 그것같이 느낌이 둔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게 달관인지 무감각인지는 깊이 분석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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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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