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매료시킨 성공철학 F.U.N.경영 창시자 진수테리 (상)
미국을 매료시킨 성공철학 F.U.N.경영 창시자 진수테리 (상)
  • 김두호
  • 승인 201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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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세계적인 리더가 된다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365가 만난 재미동포 진수 테리 여사(54)가 미국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인지 몇 가지만 소개하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는 2001년 7월 10일을 ‘진수 테리의 날’로 선포하고 그가 사회저변의 다민족과 흑인들을 대상으로 성공적인 교화운동을 펼친 것을 크게 기념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2003년 소수민족 비즈니스 리더에게 주는 MBA(Minority Business Advocate)상, 2004년에 수출공로상을 수여했다. 스피치클럽을 통한 강연활동과 의류기업 컷루스의 부사장으로 회사 매출을 3배로 올린 공적을 평가한 것이다. 2005년 미국 ABC-TV는 아시아 지도자 11인에 선정했고, 미국 상무부도 미국을 대표하는 소수민족 비즈니스 지도자 100대 여성 기업인에 진수 테리의 이름을 올렸다. 2007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미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중소기업인 6인에 그를 포함시켰다.


진수 테리 여사는 지금 미국과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을 순회하며 글로벌 리더십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 개혁과 기업 개혁의 지혜를 전파하는 그는 스스로가 글로벌 리더가 되어 있다. 그가 창조한 성공 철학이며 글로벌 리더십의 슬로건이 'FUN(재미, 즐거움)을 잡아라'이다. 그 한 개의 단어를 다시 세분해서 F(Fun 즐거운 리더), U(Unique 창의적인 리더), N(Nurturing 배려하는 리더)의 뜻으로도 표현하고 있다.


F.U.N이라는 글로벌 리더십 철학은 그가 앉아서 머리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다. 회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웃음을 잃어서 실패했던 자신의 뼈저린 체험에서 찾아냈고, 그것을 교본삼아 그는 글로벌 리더로 성공했다. 그가 강조해온 말 중에 “진수 테리가 할 수 있으면 당신도 할 수 있다(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는 말은 자신을 패자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젊은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랩을 부르면서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인들과 공직자들의 초청 특강을 위해 서울에 체류중인 진수 테리 여사와 인터뷰 시간은 말 그대로 즐겁고 편안해서 좋았다. 그는 시종 웃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는 경쾌하고 명랑했다. 서울 강남의 번잡한 커피숍에서 이루어졌지만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았다. 금방 친구 같은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며 인터뷰에 응했다.

이 인터뷰는 상, 하로 나뉘어 게재된다.






50대의 래퍼

성공한 기업인에서 지금은 미국연설가협회의 첫 한국인 정회원이 되어 저명한 연설가로 주목을 받고 있는 당신의 다채로운 활동 중에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고 싶다. 직접 가사를 쓰고 부른 랩 음반이 워너뮤직그룹을 통해 판매계약을 맺었다는데 어떻게 래퍼가 되셨는지 신기하다.

하하하. 나의 랩 음악은 나의 강연에서 주제가 되는 ‘FUN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한 보조 수단도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사회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과 여성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고 싶고, 그들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시범교육의 연장선에서 실행한 것이다.


어떤 내용의 노래인가?

학교에 가라, 꿈을 이루는 7가지의 스텝, 장벽은 없다, 사랑을 택하라, 웃음을 되찾아라, 펀리더가 되자, 열심히 일하자 라는 타이틀처럼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자신감을 가지며, 즐겁게 사랑하며 살자 라는 교육적인 내용이지만 노랫말과 리듬을 재미있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글로벌 스피커라고 말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다민족과 일을 하면 누구나 창의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처럼 가질 수 있다. 50대를 넘어선 나이에 뮤직비디오를 찍거나 랩 음악도 할 줄 알고, 또 책을 쓴 작가이면서 만화책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 즉 당신들도 ‘진수’처럼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첫 곡이었다.


마구 중얼거리듯이 쏟아내는 랩은 신세대가 아니면 흉내 내기도 힘든 음악이다.

뒤에 밝히겠지만 미국에서의 내 삶은 좌절을 딛고 일어나 변화와 꿈과 도전의 3박자로 진행됐다. 흑인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대화하려면 랩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으로 건너 간지 13년만인 1998 토스트메스트 중의 하나이지만 북 가주에서 유일한 비즈니스 스피치클럽을 만들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이 스피치클럽은 미국에서 최고중의 하나인 비즈니스클럽이라는 칭송을 미국상무부에서 받았다.

주로 백인 중심의 비즈니스 관련 강의만을 하던 어느 날 흑인 빈곤층 젊은이들의 복지문제를 다루는 기관으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나는 흑인 사회를 알기 위해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 리더들의 연설문을 탐독하고 그들이 무엇에 감동하는 지를 공부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먼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눈높이에 맞춘, 마음을 움직이는 주제를 찾는 것, 스피치는 큰 목소리로 열정적이면서 메시지를 짧고 간단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효과적이고 호소력이 있는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는 리더 십 교육에서 F,U,N을 외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대다수 참 불행하다. 아버지가 없는 결손 가정에 엄마까지 감옥을 출입하는 환경 속에서 가난하게 사는 젊은이가 많다. 첫 강의에 그들이 좋아하는 래퍼를 데려갔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물 등 먹을 것도 가져갔다. 그리고 내가 미국 와서 말도 제대로 못해 고생한 얘기, 아시안으로 백인은 물론 당신네 흑인들에게까지 무시당하고 차별을 받았다는 고생담을 들려주었더니 그들은 너무 좋아했다. 배꼽을 잡고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아이도 있었다.


그저 자신의 성공담이나 풀어놓고 빤한 윤리교육이나 가르치는 다른 스피커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친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랩이란 음악 장르도 그들이 만들었지만 흑인들 중에 음악적 영감을 가진 젊은이가 많다.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재능과 꿈이 많지만 주변에 멘토(mentor)가 없고 돈이 없어서 시도할 생각도 않고 산다. 그들의 랩은 밥 먹으면서 장난치면서 얘기를 나누면서도 나온다. 나는 그들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이해하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지내면서 강연도 하고 공연도 했다.

마침내 그들에게 인기가 있는 유명한 래퍼 에이저맨(Agerman)에게 작곡을 부탁해 처음으로 내 스토리를 랩으로 옮겨 그들 앞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진수 테리 여사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의 가사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I come to this country with a little money(난 달랑 몇 푼 들고 이 나라에 왔지)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People looked at me like I was funny(사람들은 나를 우습다고 쳐다봤지)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I made up my mind to reach my goal(나는 내 목표를 이루기로 결심했지)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Confidence in myself gave me strength to hold on(난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버텼어)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People tried to stop me because I have a dream(꿈은 꿈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다 말렸지)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But I did not stop until I reached my goal(하지만 목표에 닿을 때까지 난 멈추지 않았어)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Even though they thought I was an amateur(사람들은 나를 애송이라고 얕봤지만)

If Jinsoo can do it, you can do it too(진수가 한다면 당신도 할 수 있어)

I climbed the ladder and became a manager(하지만 나는 해냈지, 꿈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지)



50대에 한국여성으로서 젊은 흑인, 히스패닉 젊은이들과 긍정적인 랩 음반을 발표하고 래퍼가 된 것은 진기록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시범을 보여준 것 같다.

가수가 될 재능이 있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진수도 할 수 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는 꿈을 갖도록 한 것이다. 2001년부터 내가 지은 18곡을 북가주 최고의 작곡가들에게 넘겨 앨범을 내놓기까지 7년이 걸렸다.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 그들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인드도 바뀌어 갔다. 성공의 진정한 가치는 돈이나 명예에 있지 않고 인간을 포용하고 배려하는 리더십에 있다는 말랑말랑한 사고를 하게 되고 스피치 대상도 기업인 쪽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활동 폭을 넓혀 많은 다문화민족을 만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시가 ‘진수 테리의 날’을 선포한 영예는 그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곳에 살며 흑인사회는 물론 다민족을 위한 각종 리더십 강연과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했다. 글로벌 문화행사도 많이 주관하고 그곳 검찰국의 요청으로 교도소에 수감중인 여성들의 교화강연도 열심히 다녔다.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즐기며 일을 한 것인데 각종 상을 받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한 때 나에게 상처를 안겨 준 미국에서 내 스스로의 놀라운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2001년에 ‘진수테리의 날’을 제정하고, 2003년에는 미국 서부지역의 히스패닉 인디언 아시안 유태인 전소수민족기구의 대표도 됐다.





한 통의 전화

이제 미국이 안겨 주었다는 그 상처 얘기, ‘변화와 꿈과 도전’의 3박자 삶의 모티브를 제공한 좌절기의 얘기를 들려 달라.

미국 전역에서 한국은 물론 아랍과 유럽까지 다니며 F.U,N을 강연하는 진수 테리가 한때 웃음도 유머도 없고 언제나 표정이 굳어 있어서 말 걸기도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고백을 하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랬다. 그래서 실패자가 됐던 과거가 있다. 1985년 미국에 건너간 나는 10년간 패배감만 가득하던 재미없는 여자였다.

음식점 종업원에서 최저 임금을 받는 의료기 공장생활을 거쳐 2년만에 가죽벨트를 만드는 서카(Circa)라는 기업체에 취업했다. 한국에서 섬유공학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섬유회사 근무 경력을 다소 인정한 덕분인지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 60여 명을 관리하는 생산담당 매니저의 임무가 주어졌다. 실제는 작업을 함께하는 작업반장 정도의 자리인데 자존심이 상했지만 열심히 일해 인정을 받겠다는 각오로 죽어라 일만 했다. 6시에 모두 퇴근해도 밤 10시까지 일했고 휴일도 회사에서 살았다.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를 교육시키고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는 성과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나의 노력으로 제조공정과 기술이 크게 개선됐다. 매출이 2년만에 3배, 4배로 증가해 관리하는 공원이 300명으로 늘었고 명품 브랜드인 갭(Gap)을 비롯해 백화점마다 납품이 되어 회사는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7년이 되도록 월급은 올려주면서 승진을 안 시켰다. 당당하게 승진을 요구하려던 참에 경영을 총괄하던 부사장 마이클이 어느 날 나를 찾았다. 승진 소식인줄 알고 달려간 나에게 그는 해고를 통고해 왔다. 몸 바쳐 회사를 키운 나를 이유 없이 내쫓은 것이다.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만 나왔다. 가난한 노동자를 착취하고 울린 기업이 파렴치한 악덕 인간들이 사는 곳이고 미국이 인종차별까지 하는 형편없는 나라로 보였다.


근로자의 인권이나 권익을 존중한다는 나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한 것 같다.

그 일로 나는 표정이 더 굳어지고 우울해졌다. 승진을 못하고 해고까지 당한 이유가 미국에서 인정하는 학위가 없기 때문이라는 주변사람들의 분석을 받아들여 샌프란시스코주립대 MBA(경영학 석사) 과정에 등록을 하고 다시 새 직장을 구했다.

컷루스라는 의류기업의 공개모집에서 전공과 경력을 인정받아 채용됐으나 역시 이곳에서도 생산담당 매니저였다. 그러나 염색작업 등 내 전문 분야를 살리는 곳이어서 쉽게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제품 품질을 월등히 향상시키면서 이곳서도 나의 기여도가 기업의 성장과 직결됐다. 낮에는 회사 일, 밤에는 MBA 과정에 매달려 죽기 일보 직전의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MBA 과정도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사장을 만나 승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첫 회사에서 워낙 깊은 상처를 받았던 탓인지 두 번째는 화도 나지 않았다. 미국의 MBA도 통하지 않는다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먼저 회사에서 나를 해고한 서카의 마이클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고 이유가 무엇인가를 뒤늦게 물었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걸 당신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 무섭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이었다.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리더가 될 수 없었다는 얘기에 쇼크를 받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유능한 사원을 잃는 건 아깝지만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MBA를 안 거쳐도 나의 학벌은 차고 넘쳤고 회사에 기여도도 탁월했지만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점이 문제였다는 이유들을 접하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기계였다. 내가 관리하는 소수민족 출신의 근로자들도 오르지 일만해야 하는 기계처럼 생각했었다. 마이클 부사장이 현장에 나타나 잡담이나 던지고 사무실에서 골프채나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자리가 마땅히 내가 가야할 자리라고 생각했었다.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스피치클럽을 찾았다.




FUN사상이 한 통의 전화에서 유래됐다는 체험 에피소드가 아닌가?

그렇다. 한 통의 전화가 내 삶의 방식과 생각의 틀을 뒤집어 놓았다. 일만 잘하면 어디서나 최고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계기였다. 내 스스로의 개혁만이 나를 성공시키고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발견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경영방법을 전격적으로 바꾸었다. 내 자신을 낮추고 직원을 존중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나의 책상을 사무실에서 생산현장으로 옮겨갔다. 직원들과의 대화를 시작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라는 지시대신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시하고 권위를 부리던 경영자에서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묻는 경영자로 변천하였다. 나의 변화를 직원들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변화하기로 작정했다. 웃음을 연습하여 얼굴을 부드러운 또 표현력이 많은 얼굴로 바꾸었고 또 칭찬하는 법을 배웠다. 칭찬에서 하루를 시작해서 칭찬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스피치연습을 하여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증진시켰다. “내가 실수했어” 라고 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때 그들은 관대했고 내가 그들과 다름없는 일개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직원들이 나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점심도 도시락을 싸와 그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고 자녀들에 관한 질문도 많이 했다. 차가운 사람이 서서히 직원들 사이에 따뜻한 사람으로 바뀌어 갔고 그들은 나를 임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한명으로 인정했다.


그것과 동시에 직원들을 위한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을 다같이 배우니 그들이 자신이 배운 것을 회사에서만 써먹지 않고 가정에서도 자녀와 남편이나 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배양해갔다. 생산력 증가와 회사의 이윤을 이야기하며 직원들이 돈에 관해서 공부하며 자신들도 투자에 관해 눈을 뜨고 재산을 불려가는 법도 가르쳤다. 회사만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돈을 많이 벌수록 그들도 부자가 되어갔다. 써먹을 수 있는 교육을 시킨 셈이다. 회사가 잘되는 것이 자기가 잘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갔고 회사에 직원들이 최선을 다했다. 정말 놀라웠다. 매출 규모가 세배로 상승하고 반품율도 10%에서 1%로 낮추는 등 갭이나 에스프리, 리바이 스트라우스회사가 생산비를 감당 못해 해외로 빠질 무렵 우리 회사는 메이드 인 U.S.A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행복해하였다. 우리는 매달 재미있는 파티를 하고 항상 멋진 이벤트를 임원들과 직원들이 같이 만들어내었다. 수출목표를 100% 매달 달성했다. 직원들이 일하는 것에 너무나 신나했다. 그리고 직장을 자기의 비즈니스처럼 돌보았다. 우리는 항상 일을 열심히 했지만 노는 것도 열심히 했다. 이렇게 해서 F.U.N 경영이 시작되었다.


컷루스에서 2004년까지 근무하며 수출공로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보다 더 획기적인 변화와 도전은 나의 결점을 장점으로 뒤바꾼 성공 체험을 토대로 한 리더쉽 철학과 MBA 지식을 결합한 FUN운동, F.U.N 경영을 전도하기 위해 스피치클럽인 코뿔소비즈니스클럽을 창립한 것과 또 나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펀 글로벌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LG인화원과 함께 LG 그룹의 핵심인재 글로벌교육의 파트너가 됐다. 2004년부터 LG에서 펀을 이용한 글로벌교육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시하였고 영어를 배우고 글로벌 문화를 배우는데 매우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몇 년 전 책을 쓰기위해 구글과 야후 등의 회사를 방문했을 때 특히 구글이 이런 펀 경영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구글과 야후에 나의 펀 경영을 소개했고 펀 경영의 컨설팅 리포트를 써서 그들이 하고 있는 펀 경영을 분석한 리포트를 내놓기도 했다.



‘진수 테리’라는 이름이 미국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도 그 때부터인가?

나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 출발점이 코뿔소 비즈니스클럽이다. 클럽을 시작하려면 초기 멤버가 20명 정도는 돼야 한다. 나는 이 클럽을 세계 최고의 스피치클럽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름난 최고의 스피커 7명을 멤버로 규합했다. 아도비,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재직 중인 사람을 포함해 스탠포드, 버클리 등 명문대 MBA 출신의 저명한 스피커들이 동참했다. 미국사회에서는 비전이 확실하면 누구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클럽 미팅 장소도 샌프란시스코 중심지의 가장 멋진 건물을 골랐다. 적십자사가 들어 있는 그 건물의 관리인과도 리더십을 가르치는 클럽의 첫 미팅장소를 제공받기 위해 정면 협상을 해 기회를 얻었다. 1998년 3월 20일 클럽이 오픈되면서 나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1천200명 정도의 인재가 이 코뿔소 클럽을 거쳐갔고 이들의 대부분이 애플 구글 야후 오라클 등 첨단기업과 미국 정부에서 일하는 리더들인데 이런 리더들에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서 커뮤니케이션의 스킬을 배우고 코칭을 받았다는데 아직도 신기한 느낌을 받는다. 코뿔소클럽을 만들어 자신감을 가진 나는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리더들의 모임인 SBI(Success Builder International)를 다른 비즈니스 리더들과 창립했고 또 실리콘벨리에서 아주 유명한 히스패닉 상공회의소를 설립하는 창립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늘어난 인맥을 모아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위한 리더십과 자기개발 교육기관인 AGC(Advanced Global Connections) 등을 설립했다.


전문 스피커로 성공한 자신의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피치의 성패는 달변에 있지 않고 설득에 있다. 나는 영어로 강연하지만 영어가 매끄럽지 못하다. 한국식 악센트가 심한 것이 특색이다. 하하하. 그런데 툭툭 튀는 발음으로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청중은 더 많이 웃는다. 나의 성공 노하우는 나의 콤플렉스를 가장 매력적인 장점으로 살리고 나만의 독창적인 주제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전문 연사보다 두 세 곱의 강연료를 받는다. 간혹 초청측이 왜 강연료가 비싼지를 물으면 나의 한국식 악센트가 추가되는 비용이라고 말한다. 하하하.


F.U.N. 경영의 핵심을 간단하게 요약해 달라.

내가 주창한 펀 경영을 두고 ‘하하하’ 웃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펀 경영은 F.U.N. 을 기업문화의 핵심 정신으로 내세운 문화 변혁 프로그램이다. 펀 경영의 목표는 글로벌 리더십을 심어주고 그것을 실행토록 하는데 있다. 신나게(Fun) 일하고, 독창성(Unique)으로 승부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보살피기(Nurturing)가 핵심이다. 모두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공부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듯이 비즈니스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을 당할 자가 없다.


꿈이 있고 목표를 세워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옮겨 성취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첫째는 자기가 잘하고 원하는 것을 알아라, 두 번째는 길잡이가 되어 줄 멘토를 찾아라, 세 번째는 네가 뭘 하고 싶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라, 네 번째는 꾸준히 해라, 다섯 번째는 자기의 장점을 살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여섯 번째는 달인이 될 때까지 연습을 해라, 일곱 번째는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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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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